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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자의 슬픔 : 프레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살아남은 자의 슬픔 : 프레모 레비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기 때문에 부끄러운가? 특히, 나보다 더 관대하고, 더 섬세하고, 더 현명하고, 더 쓸모 있고, 더 자격이 있는 사람 대신에?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신을 찬찬히 검토하고, 자신의 기억을 모두 되살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또 그 기억들 중 무엇도 가면을 쓰고 있거나 위장하고 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스스로를 점검해본다.   그런데 아니다. 명백한 범법행위를 발견하지 못한다. 누구의 자리를 빼앗은 적도 없고, 누구를 구타한 적도 없으며(그럴 힘이라도 있었겠는가?), 어떤 임무를 받아들인 적도 없고(맡겨지지도 않았지만....), 그 누구의 빵도 훔친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런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각자가 자기 형제의.. 2020. 2. 17.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연애소설 : 히라노 게이치로 <마티네의 끝에서>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연애소설 : 히라노 게이치로 들이야 오늘 외할아버지 제사다. 학원 가지 마라. 에이, 오랜만에 학원 가서 춤이나 실컷 출라고 했는데. 알았어. 엄마. 네, 장인 어른 제사입니다. 아이들 데리고 처가집으로 좀 일찍 가라고 아내가 그럽니다. 자기는 오늘 모임이 있어서 좀 늦겠다고 말입니다. 직장에 다닐 땐 멀리 있어서 제사에 빠지기 일쑤였습니다. 지금은 백수라 가지 않을 핑계가 전혀 없습니다ㅎㅎㅎ. 저녁 무렵 처가에 가니 동서들도 오고 식구들이 음식 장만에 분주합니다. 밤 10시쯤에 제사를 모시기 시작합니다. 아내는 아직입니다. 제사가 한창입니다. 아내는 여전히 무소식입니다. 제사가 끝났습니다. 아내는 오지 않았습니다. 처제, 처남, 처형들에 그 배우자까지, 세째딸인 .. 2020. 2. 10.
시한부 인생의 기자가 어린 아들에게 남긴 책 : 이용마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 시한부 인생의 기자가 어린 아들에게 남긴 책 : 이용마 사마천의 열전의 서문을 보면 천도시비론天道是非論이 나온다. 예전에 도척이라는 산적이 있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아 부를 축적했다. 그런데도 그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천수를 다한 뒤에 죽었다. 이에 비해 열전의 첫번째 주인공인 백이와 숙제는 절개와 의리가 있는 선비들로, 부정하게 승계한 왕의 신하가 되지 않겠다고 벼슬을 박차고 나가 수양산에서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 죽었다. 사마천은 이를 비교하며 과연 천도, 즉 하늘의 도가 있느냐 없는냐, 도가 있다면 그 도가 옳으냐 그르냐를 따져 물었다. 나는 를 읽으면서 2000여 년 전 사마천이 했던 고민이 우리 사회에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을 했다. 독립운동가 자손은 삼대를 빌어먹고, .. 2020. 2. 6.
아주 근사한 공간에서 아주 근사한 산문을 읽다 : 제수연 <나는 아직 멀었다> 아주 근사한 공간에서 아주 근사한 산문을 읽다 : 제수연 동네에 라고 하는 도서관이 생겼다는 소식을 꽤 오래전에 듣고선 이름이 참 예쁘고 잘 지어서 가봐야지 생각했더랬는데 이제서야 문득 생각이 납니다. 위치를 찾아봅니다. 엉? 주촌초등학교? 헐? 레알? 네, 그렇댑니다. 주촌초등학교가 대단지 아파트 앞으로 이전하고, 옛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해서 도서관으로 만들었습니다. 누구 아이디언지 몰라도 너무 멋집니다. 그리고 저, 주촌국민학교 나왔습니다. 51회 전교 회장 출신이디. 데헷! 그래서 이제는 멋진 이름을 가진 도서관으로 변신한 나의 모교에 설레임을 안고 갔습니다. 도서관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했습니다. 이층에 있는 우아한 1인용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가지고 간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읽다 지겨.. 2020. 2. 3.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여정이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여정이다 : 김영하 뉴욕에서 살던 어느날 아내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여행가고 싶다." "지금도 여행 중이잖아." 아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런 거 말고 진짜 여행." (p.193) 독일을 여행하던 중 베를린에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나는 팔자 좋은 여행자였고, 그는 딸아이의 면접때문에 먼 곳까지 왔습니다. 같은 고향에 있으면서도 생전 연락 한번 안하다가 우연히 독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굳.이. 연락을 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베를린 돔이 보이는 슈프레 강가에서 만났습니다. 하도 오랜만이라 좀 어색했습니다. 음악을 하는 아이의 입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간의 사정도 오고 갔습니다. 쓴 독일 커피를 다 마셔갈 즘 그가 책.. 2019. 12. 5.
독일 여행을 준비하며 : 리처드 로드 <세계를 읽다, 독일> 독일 여행을 준비하며 : 리처드 로드 하이고, 유럽 출발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이제 곧 독일로 출발인데, 아직 독일 지도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겨우 도시 몇 개가 어디 붙었는지 정도밖에 모릅니다. 여행에 가려고 하는 도시만 붙들고 검색 쪼금 했습니다. 독일 간다고 하니 경험이 있는 민주 아버지가 이 책을 줬습니다. 드레스덴이 어디 붙었는지, 독일 사람은 불친절한지, 뭐가 맛나는지 정도는 알고 가야 시행착오를 조금이라도 덜 할텐데요......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드레스덴, 그리고 체코를 거쳐 뮌헨으로. 일단의 여행 경로다. 하이델베르크 대학도, 퀼른 대성당도, 슈트트가르트 벤츠 박물관의 육중한 콘크리트 매스도 보고 싶지만 다 경험할 수 없다. 어느 것을 넣고 어느 것을 빼는 결정에 머리가 지끈지.. 2019. 6. 7.
예쁘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돼여 : 홍성수 <말이 칼이 될 때> 예쁘다는 말을 함부로 하면 안돼여 : 홍성수 아빠, 여자애들한테 '예쁘다'는 말을 하면 안돼여. 얌마, 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이다. 왜 안돼? 외모를 평가하는 말이라서요. 야, 이쁜 걸 이쁘다고 하지, 그럼 머라고 하냐? '매력적이다' 머, 이런 말로 해야지요. 그건 평가하는 말이 아냐? 우기지 마세여. 암튼 안돼여. 야 참, 학교가 별나다. 오랜만에 집에 온 아들 녀석과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 나온 말입니다. 학교에선 여학생들한테 '예쁘다'는 말도 못하는 군요. 물론 남학생들한테도 '잘생겼다'는 말을 하면, 옆에 있는 '못생긴' 친구가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기에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될 겁니다. 애들이 너무 민감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딸.. 2019. 6. 1.
가우디 건물 세 개 봤으니까 이제 떠나야지 : 오영욱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 가우디 건물 세 개 봤으니까 이제 떠나야지 : 오영욱 # 바르셀로나의 카페 바르셀로나의 많고 많은 카페 중에서 내가 특히 좋아했던 곳은 산 이우 광장에서 프레데릭 마레스 미술관의 작은 중앙 정원을 통해 이르게 되는 에스티우 카페였는데 봄날의 선선한 공기와 내리쬐는 햇살과 정원의 오렌지 나무가 고풍스러운 파티오와 잘 어울렸다. 바르셀로나 역시 많은 유럽의 도시들이 그러하듯 그 기원을 로마 제국에 두고 있다. 옛 로마의 성벽 위에 앉아 그다지 호들갑스럽지 않게 그렇다고 무덤덤하지도 않게 현재를 보내는 것이다. (p.128) 사진 : 에스티우 카페 사진 출처 :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lanbcn&logNo=221325152954&proxyRefere.. 2019. 5. 28.
작은 책방에서 정지우 작가와 함께 읽은 데미안 : 헤르만 헤세 <데미안> 작은 책방에서 정지우 작가와 함께 읽은 데미안 : 헤르만 헤세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압락시스 (p.123) 동네 작은 책방 에서 고전 강의가 있댑니다. 안 갈 이유가 없습니다. 백수가 된 자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입니다. 평소엔 이런 책 절대 안 읽습니다. 서양 고전을 읽을 좋은 찬스이기도 합니다. 책을 읽습니다. 첫 문장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하, 어렵습니다. 데미안은 청소년 필독서 아니었나? 근데, 이렇게 어려워? 눈으로 글을 읽고 있으나 문장이 전혀 잡히지 않습니다. 서사도 .. 2019. 5. 25.
버킷리스트가 또 늘었습니다 : 황철호 <건축을 시로 변화시킨 연금술사들> 버킷리스트가 또 늘었습니다 : 황철호 어떤 건축물에 대해 그것을 설명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우선 건축물을 구성하는 재료로 이야기할 수 있구요, 구조나 형태로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세부 디테일로도 가능하구요. 건축가의 설계 의도로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요즘은 스토리로 많은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건축물이 언제 왜 지어졌고, 어떤 용도로 누가 사용했으며, 그래서 이런 의미가 있다는 설명이지요. 한마디로 그 건축물이 지닌 사연을 이야기하는 거죠.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요, 그 건축물을 보고 느낀 감상입니다. 재료의 질감이나 공간의 형태, 건물이 주는 분위기, 주변 건물과의 조화 등, 이런 것들은 직접 가서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책으로 공부해서 건축의 형태나 재료, 사연.. 2019. 5. 22.
저, 퇴사했는데요 : 이나가키 에미코 <퇴사하겠습니다> 저, 퇴사했는데요 : 이나가키 에미코 행님, 회사 그만두면 아이들하고 형수님하고 생활비는 우짤건데? 나 : ..... 그라고 그만두고 나서 뭐 할낀데? 나 : ..... 무슨 생각이 있을 거 아이가? 그런 것도 없이 덜컥 그만둔기가? 나 : ..... "사표를 썼습니다."라고 말하면 사람들의 첫 반응은 역시 '일순 침묵'입니다. 얼굴을 보니 헐~~ 이라는 반응입니다. 왜? 라고 묻는 것 같기도 하고, 안됐다는 표정도 잠깐 나오고, 그랬구나 라는 표정을 짓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질문을 시작합니다. 누가 괴롭혔는지, 왜 그만두는지, 언제 그만두는지, 그만두고 뭐 할건지를 묻습니다. 일일이 대답하기가 뭐해서 그냥 대충 얼버무립니다. 퇴직을 하려면 회사의 면담(그만두는 마당에 면담은 무슨 면담을....)은 필수.. 2019. 5. 16.
야쿠자 모가지를 따라구요? : 오쿠다 히데오 <쥰페이, 다시 생각해!> 야쿠자 모가지를 따라구요? : 오쿠다 히데오 오랫동안 다녔던 회사를 그만두는 일로 요즘 머리가 아픕니다.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생각을 별로 안하고 싶은데, 이게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잠깐만 틈을 주면 머리 속에 여러 골치 아픈 일들이 지네들끼리 엉키고 설켜 뒤죽박죽입니다. 생각해봐야 답도 안나오고 도움도 안되는 이넘들을 확 내쫓아버렸으면 좋겠지만,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휴~~ 이럴 땐 역시 책입니다. 흠뻑 빠져들 수 있는 소설이면 좋겠죠. 서점에서 어슬렁거리던 중 오쿠다 히데오의 책이 눈에 띕니다. 옳지, 시간 순삭에는 이 냥반 소설이 딱이쥐~~~ 여러 책들이 진열되어 있습니다. 한때 이 냥반 소설은 제목도 안보고 다 읽었는데, 요즘 좀 뜸해졌습니다. 상습적인 폭력을 가하는 남편을 .. 2019. 5. 15.
가고 싶은 매장을 만들면 고객은 온다 : 마스다 무네아키 <취향을 설계하는 곳, 츠타야> 가고 싶은 매장을 만들면 고객은 온다 : 마스다 무네아키 다이칸야마의 츠타야? 머하는 데야? 도쿄의 다이킨야마라는 동네에 있는 책방이야. 아, 그럼 마스다 무네아키라는 이 아저씨는 책방 사장님이네? 그래. 근데, 책방이 그냥 책방은 아냐. 책방이 책방이지 그럼 머냐? 책방인데, 커피도 팔고, 음악 시디도 팔고, 미술이나 필기도구도 팔고, 사진 전시도 하고, 영화 관련 아이템도 팔아. 젤 중요한 건 분위기를 파는 거지. 한마디로 니 취향이 거기 다 있어. 사진 출처 : https://fashionpost.jp/news/11668/2 https://happist.com/549283/%EC%88%B2%EC%86%8D%EC%9D%98-%EB%8F%84%EC%84%9C%EA%B4%80-%EB%8B%A4%EC%9D.. 2019. 5. 7.
아빠, 근의 공식 이딴거는 왜 배워요? : 이권우 <배우면 나와 세상을 이해하게 됩니다> 아빠, 근의 공식 이딴거는 왜 배워요? : 이권우 딸 : 아빠, 근의 공식 알아요? 나 : 알지. 이에이분의 마이너스비 플러스마이너스 루뜨... 딸 : 근데, 이딴거는 왜 배워요? 나 : ..... 그러게. 그딴거는 왜 배우고 그럴까. 나도 그거 배워서 시험칠 때 말고는 써먹어 본 적이 없는데. 논리력과 사고력의 증진? 아서라. 나도 자신이 없는데 고1 딸이 설득될리 만무하다. 아이에게 해줄 답이 궁하다. 나도 30년 전에 저딴거를 배웠을텐데 왜 배우는지 몰랐다. 그냥 외우라니 외웠던 기억밖에. 그래도 딸은 저런 질문을 한다. 배움에 대해 의문을 느끼는 딸이 그 시절의 나보다 낫다고 해야 하나. 다음 세대가 묻는다 ▶ 늘 공부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뭔가요? 이권우가 답한다 ▶ 나만 잘사는 세계에서 벗어.. 2019. 5. 5.
그곳엔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요? 그렇담 정말 가볼 만하겠군요 : 오소희 <욕망이 멈추는 곳, 라오스> 그곳엔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요? 그렇담 정말 가볼 만하겠군요 : 오소희 라오스라는 나라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건 친구 갑수 이라는 책을 만나고부터 입니다. 그 속에 펼쳐진 라오스는 천국 그 자체였습니다. 오죽했으면 몽상가들의 마지막 피난처라고 했겠습니까. 그 뒤로 라오스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차리는 게 꿈이 되었고, 그 꿈을 지인들에게 떠벌리기도 했습니다. 베트남의 메콩강, 태국의 카오산로드, 미얀마의 바칸,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그리고 라오스와 같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여러 나라들은 가보기 전에는 죽지 못하는 저의 버킷리스트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아껴두고픈 곳은 역시 라오스입니다. 가난하지만 낙천적이고, 욕망에 대한 집착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곳 말이죠. 일상에서 잠시 멈춰선다면 저에게 그곳.. 2019. 5. 3.
악의 평범성,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악의 평범성,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까 : 베른하르트 슐링크 케이트 윈슬렛이 나오는 이 영화를 본 건 몇 년 전이었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봤더랬다. 몇몇 장면, 예를 들면 케이트 윈슬렛의 아찔한 뒤태라던가, 유대인 포로 수용소의 적막감과 쓸쓸함, 여주인공의 자살로 마무리되는 충격적인 결말 등은 아직도 머리 속에 남아 있을 정도로 꽤 인상적인 영화였다. 우연히 서점 매대에서 이 책을 만났다. 얼마 전 한나 아렌트의 책을 읽고 공부하다가 어느 블로그가 쓴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보다 이 책이 더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문장이 생각났다. 책을 손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나의 등 뒤에서 타월로 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감싸고는 문질러서 물기를 닦아주었다. 그러나 나더니 타월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2019. 4. 27.
28년 글쓰기 내공이 담긴 무공비급 : 강원국 <강원국의 글쓰기> 28년 글쓰기 내공이 담긴 무공비급 : 강원국 역시 읽기보다 쓰기가 어렵다. 읽기는 그냥 읽으면 된다. 근데 쓰기는 그냥 안된다. 일단 자세를 잡아야 한다. 누워서 읽는 건 가능하지만 쓰기는 불가능하다. 침대에서 책상까지는 이삼 미터도 채 되지 않지만 루비콘 강 너머에 있다. 온갖 유혹을 극복하고 루비콘 강을 건너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커서가 깜빡거린다. 자판 위에 손은 올려놓았지만 뭘 쓸지 머리 속에서 빙빙거린다. 에잇, 모르겠다. 인터넷 서핑을 한다. 시간이 후딱 간다. 정신을 차리고 깜빡거리는 커서를 바라본다. 책상에 앉은지 꽤 시간이 흘렀건만 하얀 화면은 여전히 그대로다. 포기하고 책상에서 내려와 다시 눕는다. 누우니까 편하다. 뜨뜻한 장판과 등이 하나가 된다. 하지만 마음은 불편하다... 2019. 4. 24.
그대, 그예 책방지기가 되려는가 : 백창화, 김병록 <작은 책방, 우리 책 쫌 팝니다!> 그대, 그예 책방지기가 되려는가 : 백창화, 김병록 기어이 책방을 열겠다고? 며칠 전 장유 까페 거리에 있는 동네 책방에 들렀다.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숲으로 된 성벽.' 기형도 시인의 시에서 땄다고 한다. 주인장의 내공이 드러난다. 하천을 따라 이어지는 까페 거리 모퉁이에 책방이 있었다. 내부는 심플하고 모던하게 꾸몄다. 차는 팔지 않고 오로지 책만 파는 책방이다. 도시 속의 오아시스다. 내가 꿈꾸던 공간이 거기에 있었다. "꿈을 이루셔서 얼마나 좋습니까?" "이거 다 빚이에요. 허허" 책방은 사모님의 꿈이라는데, 아직 직장에 다니셔서 사장님이 먼저 은퇴하고 책방지기를 하고 계신다고. 나도 책방을 낼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한가할 때 와서 여러 이야기를 하자고 하신다. 책방이 아직 돈은 안된다고.. 2019. 4. 24.
살아 있는 것과 사유하는 것은 결국 같은 거야 : 켄 크림슈타인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살아 있는 것과 사유하는 것은 결국 같은 거야 : 켄 크림슈타인 악의 평범성 1960년 5월 이스라엘 비밀경찰이 아르헨티나에서 나치 전범 한 명을 체포했습니다. 나치스 친위대 중령으로 유대인을 학살한 혐의가 있는 그는 독일이 패망할 때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15년을 숨어 지냈다가 드디어 발각된 것입니다. 바로 아돌프 아이히만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특별 취재원 자격으로 이 재판 과정을 취재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아이히만의 모습은 아주 충격적이었습니다. 무려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에 가담한 살인마가 아닌가? 인간이라면 도저히 그런 미친 짓은 못하지. 머리에 뿔리 달리고, 남의 고통을 즐기며, 피에 굶주린 악마임에 분명하리라 생각했는데, 아이히만은 너무나 평범한 중년 남성이었습니다. 심지어 평소에 매우 .. 2019. 4. 17.
이제 나도 좀 행복해야겠습니다 : 오연호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 이제 나도 좀 행복해야겠습니다 : 오연호 '꿈틀리 인생학교' 라고 혹시 들어보셨나요? 중3 졸업생을 대상으로 30명이 참여하는 1년 과정의 기숙학교로 2016년 강화도에 개교한 학교입니다. 입시 경쟁 속에서 학원을 오가며 쉴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야하는 청소년들에게 1년간 '옆을 볼 자유'를 줌으로써 스스로 행복한 인생을 설계하는 취지로 만들었습니다. 덴마크의 에프터스콜레를 우리나라에 우리식으로 적용하는 최초의 사례입니다. 오마이뉴스의 오연호 선생이 만들었고 풀무학교의 정승관 선생이 교장으로 계십니다. 첫째와 둘째가 간디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이런 저런 방면으로 촉수를 뻗치다보니 이런 학교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척박한 땅에 이런 학교가 과연 지속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무색하게.. 2019. 4. 12.
편의점 '폐기'는 달고 맛났다 : 무라타 사야카 <편의점 인간> 편의점 '폐기'는 달고 맛났다 : 무라타 사야카 # 1. "아빠. 나 핵인싸에여. 친구 완전 많아여!" "응, 그래? 좋겠네. 아빠는 완전 아싼데.ㅋ" 중학교에 들어간 막내가 자랑을 했다. 학교 생활이 즐거운 모양이다. 저렇게 자랑까지 할 정도면 친구들 사이에서도 주류에 들어가겠지.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 노는 것보다는 훨씬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친구도 있을 것이다. 주류에 끼지 못해서 일 수도 있고, 그냥 어울리는 게 싫어서 일 수도 있을테고.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것과는 별개로 혼자 노는 친구에게 함께 놀자고 손을 내미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면, 저런 친구가 있구나 하고 그냥 냅두던가. 니편 내편 나누어 따돌림을 하지 말자는 얘기다. # 2. 일본에서 편의.. 2019. 4. 2.
그저 담담하게 털어놓은 그 남자의 일기장 : 이석원 <보통의 존재> 그저 담담하게 털어놓은 그 남자의 일기장 : 이석원 나는 손잡는 것을 좋아한다. 모르는 남녀가 거리낌 없이 하룻밤을 보내는 원나잇 스탠드가 요즘처럼 횡행하는 세상에서도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는 행위가 여전히 특별할 수 있다는 것. 그 느낌이 이렇게나 따뜻하고 애틋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눈물겹다. 잠시 잠깐 만난 사이에서는 결코 손을 잡고 영화를 보거나 거리를 걷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으니까. 손을 잡는다는 것은 그처럼 온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누구든 아무하고 잘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무하고나 손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손잡는 것이 좋다. (p.14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으면서' 중에서) "너는 커서 뭐가 될래?" 만약 지금 내게 누가 다시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살다보면 .. 2019. 3. 24.
우리는 생각만큼 합리적이지 않다 : 대니얼 커너먼 <생각에 관한 생각> 우리는 생각만큼 합리적이지 않다 : 대니얼 커너먼 이 사진을 한번 보시죠. 남매 같습니다. 소풍 나왔나 보네요. 둘 다 기분이 좋아 보입니다. 사진을 보고 떠올리는 생각입니다. 실은 아무 생각없이 보기만 했는데 보자마자 머리속에서 그리 판단했습니다. (네, 울 아이들입니다. 당근 무지 사랑스럽지요.) 자 그럼 다음은 어떨까요? 34 × 26 아, 씨 곱셈이네. 이걸 어떻게 계산하라는거야? 라는 생각이 들면서 머리속으로 암산을 하기 시작합니다. 아, 근데 잘 안됩니다. 시간이 좀 걸립니다. 한 10초 정도를 들이다 계산기~~를 외칩니다ㅋㅋ. 하나 더 해볼까요? 다음 문장을 보고 꼭 따라해보세요. 흰곰 생각하지 않기 어떤가요? 잘 되나요? 저 글을 보는 순간 머리속에는 흰곰이 나타났을테고 또 한쪽에서는 야,.. 2019. 3. 16.
예술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 : 김명식 <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 예술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 : 김명식 는 우리 중 누군가 겪어야만 했고 여전히 경험하고 있는 슬픔, 고통, 비극을 함께 하며, 그 기억이 공간화되고 건축화된 현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정의 시작입니다. 조금이라도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헤아려보기 위해서지요. 이 책의 목적입니다. (p.9 서문 중에서) 영국의 비평가 러스킨은 고통을 이해하고 아름다움의 근원을 헤아려보는 것이 예술의 두 가지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고단한 근현대사를 가진 우리는 역사적으로 많이 아팠습니다. 아픔이 많았으니 그것을 기억하려고 만든 공간도 꽤 많습니다. 고통을 기억하려고 만든 공간에서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러스킨의 저 말이 아니더라도 하나의 예술입니다. 건축이 예술이 되는 장면입니다. 건.. 2019. 3. 13.
청년 세대의 정당한 분노가 세상을 바꾼다 : 장하성 <왜 분노해야 하는가> 청년 세대의 정당한 분노가 세상을 바꾼다 : 장하성         청년들아 제발 아프지 마라. 아픈 건 당신들 탓도, 당연한 것도 아니다. 이 불평등을 야기한 세력에 분노하고 요구하라   고려대 경영대학원 장하성 교수가 쓴 이 책은 460페이지가 넘는 꽤 두꺼운 책이다. 책의 절반 이상이 도표와 그래프를 비롯한 통계자료다. 그렇게 많은 증거?를 인용한 것은 울나라가 불평등한 나라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다. 왜, 어쩌다가, 얼만큼 불평등한지 머리가 아플 정도로 세세하게 분석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저 말씀을 하신다. 청년세대에게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이렇게 구구절절 이 책을 썼다.     우리나라를 이렇게 불평등하게 만든 건 기성세대인데, 왜 우리보고? 라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당연하다. 하지만 바꿀 사람은.. 2019. 3. 7.
나무, 바람, 흙, 그리고 따뜻한 나의 집 : 자크 클라인 <캐빈 폰 Cabin Porn> 나무, 바람, 흙, 그리고 따뜻한 나의 집 : 자크 클라인 우리는 모두 언제든 짓기만 하면 되는 통나무집 한 채를 마음속에 품고 삽니다. 통나무집을 지으려면 자재가 넉넉하게 들지만 보람은 크겠지요.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오롯한 나만의 안식처, 친구들을 따뜻하게 대접할 수 있는 장소가 생길 테니까요. 지난 6년간 우리는 최대한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장소 근체에서 자재를 구해 수작업으로 지은 1만 2000채가 넘는 나무집에 대한 사연과 사진을 모았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 중에서 여러분에게 영감을 줄 만한 200채 이상의 집을 소개하고 열 가지의 특별한 이야기와 사진들을 선보이고자 합니다. (p.7) 벤처 기업 사장님이 있었습니다. 한적한 시골에 자신만의 공간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합니다. 책도 읽고, .. 2019. 3. 6.
어피덩 별곡,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될 책 : 김은성 <내 어머니 이야기> 어피덩 별곡,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될 책 : 김은성 진짜 이야기가 있구나, 여기에는. 이야기에는 진짜가 있어야 하거든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우리 모두가 하나의 역사고, 우리 모두가 현대사라는 것을 보여준 정말 위대한 작품입니다. 이런 책은 사라져서는 안돼요. 세상에는 사라져서는 안 되는 책들이 있어요. 알쓸신잡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이 책을 강력 추천했답니다. 그런가부다 했습니다.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될 책이라고 김영하 작가가 극찬을 했습니다. 살짝 호기심이 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만화길래.... 책 표지를 보니 투박한 판화체의 그림입니다. 아아, 제 경험으로는 이런 소박한 그림체의 만화는 무조건 재미있습니다. 4권의 책을 차례차례 읽어나갔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난 소감은 이랬습니다. ".. 2019. 3. 6.
이 시대 우리의 건축 그리고 문화 풍경 : 승효상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이 시대 우리의 건축 그리고 문화 풍경 : 승효상 지식인은 경계 밖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추방해야 하는 자다. 그는 애국적 민족주의와 집단적 사고, 계급과 인종에 관한 의식, 성적인 특권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경구로 이 책은 시작한다. 다른 이의 집을 지어주는 고유한 직능을 가진 건축가는, 새롭게 삶을 시작하는 사용자와 새 땅을 만나 사색과 성찰로 작업해야 하며, 그렇기에 스스로 경계 밖으로 추방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건축 설계는 우리의 삶을 조직하는 일이므로 기술적인 일이라기 보다는 인문학적 일이다. 사람들의 삶을 살피는 것이 먼저다. 건축가가 지식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은 2014년과 2015년에 걸쳐 경향신문에 칼럼으로 연재한 글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지.. 2019. 2. 27.
살암 시민 살아진다 : 정용연 <목호의 난, 1374 제주> 살암 시민 살아진다 : 정용연 라는 만화책이 있습니다. 아프고 힘든 우리 근현대사를 살아온 이름 없는 백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만화인데, 작가 정용연의 가족사이기도 합니다. 읽는 이의 시선이 단 1초도 머무르지 않을 장면 하나를 위해 하루종일 매달려, 무려 7년의 작업 끝에 완성합니다. 잔잔한 감동이 밀려와 그 여운이 꽤 오래가는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작가 정용연을 처음 알았습니다. 가 2012년에 나왔으니 꽤 오래되었지요. 그 뒤로 여러 매체에 짧은 만화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책을 베껴서 먹고 사는 사람인 용서인傭書人에 대한 이야기, 정약용이 아내가 시집올 때 입었던 옷에 그려 딸에게 선물로 준 그림 매조도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아래에 소개한 조선시대 역에서 말을 돌보는 노비에 관한 이야기인 청파역.. 2019. 2. 24.
로봇과 구분되는 인간의 본질은 무얼까 : 구본권 <로봇 시대, 인간의 일> 로봇과 구분되는 인간의 본질은 무얼까 : 구본권 컴퓨터 1대와 인간 1명을 준비한다. 어느 쪽이 컴퓨터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질문을 한다. 둘 다 질문에 대답한다. 이 대답으로 어느 쪽이 컴퓨터인지 판별할 수 없다면 이 테스트는 통과다. 1950년 앨런 튜링이 제안한 '튜링 테스트'다. 인공지능이라는 것의 정의가 애매하지만, 튜링은 인간이 컴퓨터와 대화를 하는데 컴퓨터를 사람으로 착각한다면, 그 컴퓨터는 사고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인공지능이라고 했다. 2014년 영국 레딩대학교가 개발한 컴퓨터 프로그램 '유진 구스트만'이 처음으로 이 테스트를 통과했다. 우크라이나 국적의 13세 소년으로 설정된 '유진'과 대화를 나눈 심사위원 25명 가운데 33%가 진짜 인간이라 판단하여 기준인 30%를 넘었다. 하지만.. 2019.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