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제가 이 책을 진정 다 읽었단 말입니까? :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1.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라고 들어봤슈?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첫 문장이 인상적인 소설 탑 쓰리에 들어갈 정도로 굉장히 유명한 문장입니다. (나머지 둘은 <설국>과 <이방인>을 꼽습니다.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도 인상적인 첫 문장입니다.)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부부간에 사랑이 있어야 하고, 가족들간에도 사이가 좋아야 합니다. 구성원이 다 건강하고, 돈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조건들이 충족되어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그래서 사실 행복한 가정에는 별 드라마가 없습니다.
하지만 잘 안되는 집구석은 참 다양합니다. 맨날 피터지게 싸움하는 부부, 집에 들어오지 않는 자식넘, 백수인 남편,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는 시집, 아이를 맡길 데가 없는 워킹맘 등, 무궁무진합니다. 행복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만 빠져도 삐꺽거리기 시작합니다. 불행한 가정이 불행한 이유는 다 다릅니다. 이걸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라고 부른다네요.
소설의 핵심이자 거대한 복선인 첫 문장입니다.
2. 안나의 애인 브론스키라는 넘은 어떤 넘이여?
안나 남편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관료는 이래야 되고 아내는 이래야 되고 자식은 이래야 되고 귀족은 이래야 된다는 틀에 맞추어진 사람입니다. 그 틀이 사람을 재단하는 기준입니다. 이에 비해 브론스키는 아주 자유롭고 자신에 대해 솔직하죠. 가식이 없습니다. 알렉세이가 가지고 있는 틀 같은 것이 거의 없는 사람입니다.
안나를 기차역에서 첨 보고 딱 반했습니다. 그리고 유부녀인 걸 알았죠. 당신 유부녀야? 그래서 뭐 어째라고? 나 그런 거 안가려! 이런 류의 사람입니다. 안나의 사랑을 얻기 위해 자기가 가진 걸 가볍게 던져버립니다. 심지어 군대에서 유부녀와의 불륜 어쩌고 저쩌고 쑥덕거리자 바로 미련없이 제대합니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3. 안나는 감정에 충실한 실존적 인물인가, 바람기 많은 화냥년인가?
소설은 안나의 오빠 스티바가 가정교사와 불륜에 빠져 집안이 시궁창이 되는 부분으로 시작합니다. 안나가 오빠 부부를 화해시키기 위해 스티바의 집으로 오죠. (오다가 기차역에서 브론스키를 만난다.) 그러고보니 자신의 감정에 아주 솔직한 집안이군요ㅎㅎㅎ.
소설 속의 안나는 아주 매력적입니다. 삶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고 그걸 실천하는 행동력도 있습니다. 특히나 다른 생에 대한 열망이 전문용어로 바람기 큽니다. 안정된 집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누리며 아주 편안하게 살 수 있음에도 브론스키의 사랑을 택합니다. 남편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사회적인 명성도 모두 버리고 말이죠.
그 사랑이 파국으로 끝나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안나의 선택에 박수를 보냅니다. 자신이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결점만 보이는 남편과 계속 살아야 하는 삶보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삶을 택한 안나가 매력적입니다. 더구나 130년도 더 전 아닙니까. 그 시절엔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안나의 선택이 힘들었을 겁니다. 이혼한 여자는 죽을 때까지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못하는 법이 있을 시절이니까요. 그런 사회에서 자신의 사랑을 택한 안나의 용기가 대단해 보입니다.
이반 크람스코이의 작품 <낯선 여인의 초상(1883)>. 안나 카레니나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사진은 위키백과에서 가지고 왔다.
4. 꼭 그렇게 안나를 죽였어야 했냐아?
남편을 떠나 브론스키와 함께한 날은 행복했습니다. 멀리 여행도 떠납니다. 초창기에는 힘들게 얻는 사랑을 제대로 즐깁니다. 브론스키의 친구가 그녀를 보고 "남편을 불행하게 하고 그와 아들을 버리고 명예도 뭐고 다 잃었으면서도 어떻게 이토록 발랄하고 쾌활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지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불안해집니다. 브론스키의 사랑에 집착합니다. 사랑하는 아들도 떠나보내고 왔으니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사랑뿐이었습니다. 애인의 사랑이 변함없음에도, 한결같이 사랑한다고 말해도 점점 그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져 파국을 맞이하게 됩니다.
안나의 죽음은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의 비극적 끝맺음이 아니라 증오에서 오는 자기 학대라고 합니다(석영중 교수의 강연). 그녀는 자살하기 전 애인에게 "후회하게 될거야."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걸 진짜로 해버리죠. 어쩌면 참 독한 여자이기도 합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요? 애초에 사랑하면 안되는 거였을까요? 그냥 사랑하지 않는 남편이랑 재미없게 한평생을 살았어야 하는 걸까요? 아님 브론스키와의 더 나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을 해야 했을까요? 그것도 아님 애인보다 더 나은 녀석을 찾으려 했다면요?
석교수는 오직 사랑만 남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사랑 외에 자신이 살아갈 이유나 목표가 있었다면 다른 결말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어차피 홀로 살아가야 하는 겁니다. 다른 이에게 의지하는 삶은 오래 못갑니다. 안나는 매력적이고 열정적이었지만 이걸 깨닫지 못했습니다. 나는 백수인 요즘 이 사실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5. 이 소설의 진짜 주인공은 따로 있다?
톨스토이는 모든 것을 다 이룬 남자입니다. 지주에다 자식도 많습니다. 맨날 싸우는 아내이긴 하지만 결혼 생활도 지속합니다. <전쟁과 평화>로 거장의 반열에 오릅니다. 그런 그가 나이 50에 거듭났다고 합니다. 어느날 가슴에 찬 바람이 불었습니다. 여태 살아온 삶에 대한 반성입니다. 거짓말, 오입, 도박, 질투...... 아, 나는 어떻게 이런 삶을 살았던가. 그리고 새로 태어납니다. 이후로 진짜 참다운 삶을 삽니다.
그런 작가가 자기의 분신으로 레빈이라는 인물을 설정했습니다. 레빈은 귀족임에도 농노해방을 위해 시골로 내려가 농부들과 함께 일하고 그들과 소통합니다.
풀베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난 지주라도 너희 농부들이 하는 일을 같이 하겠어. 어때 나, 훌륭하지? 이런게 전혀 아닙니다. 진정으로 농부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어합니다. 풀베기에 몰입하고 그게 즐겁습니다. 풀베기가 저절로 되고 그 순간의 지순한 행복을 느깁니다. 농부들과 아무 허물없이 지내고 그들의 가족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레빈은 키티에게 버림받지만 그 시간을 인내하여 결국 키티의 사랑을 차지하게 됩니다.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며 점점 성장하게 됩니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온 것인가'라는 철학의 문제도 고민합니다. 그리고 톨스토이가 그랬던 것처럼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습니다. 아래는 책의 맨 마지막 문장입니다.
내 삶의 모든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삶에 부여하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선의 의미를 지니게 되리라.
6. 안나 카레니나 영화는 어때?
안나와 브론스키는 기차역에서 처음으로 만납니다. 역무원이 사고로 죽고 그가 안나에게 잘보이려고 역무원의 가족에게 동정을 베풉니다. 그렇게 둘의 사랑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기차역에서 안나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 사랑을 끝나죠. 안나가 죽은 후 그는 사랑의 아픔을 잊고자 전쟁에 자원하게 되고 기차역에서 전쟁터로 향하는 걸로 마무리가 됩니다.
최근에 러시아에서 만든 영화를 보았습니다. 브론스키는 전쟁터에서 대령이 되고 러일전쟁에서 부상을 입어 만주의 어느 마을에서 치료를 받습니다. 거기서 군의관으로 근무하는 안나의 아들을 만나게 되죠. 그리고 아들에게 엄마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영화는 전개됩니다. (처음에는 안나 카레니나 후속편인줄 알았습니다.)
안나 남편을 보고 효도르인줄 알았습니다ㅋㅋ. 비슷하게 생겼네요. 책에서는 안나와 브론스키 외에 여러 비중있는 인물이 나오는 반면에 영화는 오직 두 사람의 사랑만 그리고 있습니다. 책은 읽고 머리 속에서 연상하는 상상력이 필요하지만 영화는 그냥 생각없이 보면 되니 좀 편했습니다. 남편에게 '나 바람났어요.'라고 똑부러지게 말하는 안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사랑 이야기만 그려 줄거리가 너무 단순했고, 주인공 내면의 복잡한 심경을 표현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당시 러시아 귀족들의 화려한 옷차람과 호사스러운 저택, 당시의 러시아 도시의 모습과 아름답고 잘생긴 주인공을 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위대한 고전 작품에 대한 감동보다는 이 두꺼운 그리고 지루한 책을 다 읽어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이 훨씬 컸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인 안나가 기차로 뛰어드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헉" 하고 깊은 숨이 올라왔다.
7. 그래서, 읽고 나니 솔직히 어때?
일단 분량이 어마어마합니다. 세 권으로 되어 있는데 각각의 두께도 꽤 됩니다. 문장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만 등장 인물의 이름은 역시나 어렵습니다. 본명은 우찌 그리 길고, 별명도 그렇게 많은지. 그리고 인물들의 태도와 감정 변화도 심합니다. 이랬다가 별 이유도 없이 저랬다가 합니다. 번역도 별로 네, 읽는데 시간이 꽤나 걸리는 소설입니다.
<책은 도끼다>의 저자 박웅현은 살다가 힘든 순간, 설득의 순간, 판단의 순간에 답을 주는 인생의 지침서 같은 책이라고 하며 이 책을 다 읽으면 인생의 지도를 얻는다고 격찬을 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그는 세 번 읽었다고. 세 번째를 읽으면서 앞서 두 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난 도저히 그렇게는 못하겠어ㅠㅠ.)
다 읽은 뒤에 처음 든 감상은 안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끝난 결말에 대한 허탈감과 이 길고 긴 소설을 다 읽어내었다는 성취감이었습니다. 읽기에 바빠 미처 깨닫지 못한 소설의 의미를 찾으려 석영중 교수가 플라톤아카데미에 한 강연을 듣기도 했습니다. 여러 정보들이 들어오니 이제야 감이 좀 잡힙니다. 머리 속의 퍼즐이 좀 맞춰지는 것도 같습니다.
많은 이들이 각각의 입장에서 이 소설을 찬양합니다. 인류 보편의 걸작이라는 작품을 완독했다는 기쁨을 주는 소설입니다. 왜 걸작인가에 대한 이유는 책에서 찾지 못하고 남이 알려주는 걸 듣긴 했지만요. 너무 속이 보였나요?ㅎㅎㅎ
'소설 (외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나는 너를 미워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0) | 2020.04.08 |
---|---|
오늘만 사는 남자 조르바, 그리고 나의 아내 :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0) | 2020.04.02 |
내 주변에도 이데아와 메타포가 존재하나? :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0) | 2020.03.16 |
사랑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연애소설 : 히라노 게이치로 <마티네의 끝에서> (0) | 2020.02.10 |
작은 책방에서 정지우 작가와 함께 읽은 데미안 : 헤르만 헤세 <데미안> (0) | 2019.05.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