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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외국)

오롯한 나로 겨울이 되고 당신과 더불어 봄이 된다 : 밀란 쿤데라 <정체성>

by Keaton Kim 2018. 1. 24.

 

 

 

오롯한 나로 겨울이 되고 당신과 더불어 봄이 된다 : 밀란 쿤데라 <정체성>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Cyrano de Bergerac

 

 

 

코 큰 남자 시라노. 코가 너무 커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지만, 의협심과 자존심이 출중한 사나이다. 친척 여동생인 록산느를 짝사랑하나 자신의 추한 외모로 고백하지 못한다. 더우기 록산느의 마음은 같은 중대의 크리스티앙에게 가 있다. 크리스티앙도 록산느를 사랑하지만 훈남인 외모와는 달리 언변이 심각하게 모자라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래서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을 위해 사랑의 편지를 대신 써 준다. 크리스티앙의 입을 빌려 자신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욕망도 있었기 때문이다.

 

 

 

시라노의 노력으로 록산느와 크리스티앙은 부부가 되지만 이도 잠시,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은 전쟁터로 향한다. 전쟁터에서도 시라노는 크리스티앙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편지를 쓰고 이 편지를 받은 록산느는 잘 생긴 외모고 나발이고 이 편지를 쓴 남자의 영혼까지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록산느를 향한 모든 말과 글은 시라노의 것이기에, 크리스티앙은 그 사랑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시라노를 향한 것임을 깨닫고 깨닫고 무모한 돌격 끝에 전사한다.

 

 

 

크리스티앙이 죽은 이후로 록산느는 수녀원에서 미망인으로 살아간다. 시라노는 장장 15년 동안 수녀원에 매주 들러 록산느를 위로하고 세상 소식을 전한다. 하지만 시라노도 거의 죽게 될 지경의 중상을 입는다. 그럼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록산느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시라노는 마지막으로 크리스티앙이 록산느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다.

 

 

 

록산느는 너무나 유창하고 또렷하게 편지를 읽어가는 시라노의 목소리를 들으며 점차 의혹에 빠진다. 마침내 사방이 어둑어둑해져 글씨가 보이지 않을 텐데도 편지를 끊김 없이 읽는 시라노의 모습 앞에서, 록산느는 크리스티앙의 것으로 여겼던 편지가 모두 시라노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생에 여한이 남지 않은 시라노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삶을 통해 끊임없이 싸워 왔던 비겁함, 위선 등의 환영에 맞서 칼을 휘두르다 록산느의 품 안에서 눈을 감는다.

 

 

 

사진 및 글 출처 : 나무위키 및 위키백과

 

 

 

무슨 일이 있었지? 웬일이야?

아무 일도 없어요.

 

 

뭐라고? 아무 일이 없었다니? 당신이 몰라보게 달라졌잖아.

잠을 설쳤어요.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어요. 그리고 아침 나절에 좋지 않은 일이 있었어요.

 

 

나쁜 일이라니? 왜?

그냥 그랬어요. 아무 것도 아닌 일로.

 

 

말해 봐.

아무 일도 아니라니까요.

 

 

그는 계속 추궁을 했고 그녀는 마침내 털어놓았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나를 돌아보지 않아요. (p.26)

 

 

 

남자들이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아 슬픈 여자 샹탈. 그런 자신의 연인을 위해 장 마르크는 자신이 시라노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녀에게 익명으로 편지를 보내는 겁니다.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너무 아름답습니다." 모르는 이의 고백 편지를 받은 샹탈은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점점 그 편지에 빠져 들어갑니다. 어디선가 자신도 모르는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고 자신을 흠모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점차 생기있고 발랄한 자신의 모습을 되찾습니다.

 

 

 

당신은 존재하기 위해서는 춤을 추고 위로 솟구쳐야 하는 불꽃을 닮았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늘씬한 몸매로 당신은 경쾌하고, 디오니소스적이고, 도취한 듯한 야만적인 불꽃, 그 불꽃에 둘러싸여 있더군요. 당신을 생각하며 나는 당신의 알몸 위에 불꽃으로 엮은 외투를 던졌습니다. 당신의 하얀 육체를 추기경의 주홍색 외투로 가렸습니다. 이렇게 가리워진 당신의 몸, 빨간 방, 빨간 침대, 빨간 추기경의 외투, 그리고 당신. 아름다운 빨간 당신이 눈에 선합니다! (p.77)

 

 

 

이 편지를 받고 난 며칠 후 샹탈은 빨간 잠옷을 삽니다. 붉은 옷을 싫어하던 그녀가요. 장이 선물한, 그러나 거의 하고 다니지 않았던 화려한 진주 목걸이도 꺼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수줍음이란 감정을 다시 느낍니다. 여인의 감정을 다시 찾았습니다. 자신의 애인을 위해 시라노가 되었던 장 마르크는 다시 활력을 되찾은 샹탈을 보며 기쁨을 느끼지만, 곧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나인가, 편지 속의 그인가. 내가 사랑하는 여인은 내가 알고 있던 그 샹탈인가 아니면 편지로 인해 변화된 샹탈인가.

 

 

 

무슨 일이에요? 다시 우울한 표정이네요. 며칠 전부터 당신이 우울하다는 걸 알았어요.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에요. 말해 봐요. 요새 무엇 때문에 그렇게 우울해하세요?

당신이 당신 아닌 다른 사람이라는 상상을 했었어.

 

 

뭐라구요?

당신은 내가 상상하는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 내가 착각을 했다는 생각.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요.

잊어버려. 못들었던 걸로 해둬. (p.94)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은 177page로 얇습니다. 스토리도 아주 재미납니다. 연인을 위해 기꺼이 시라노가 되지만 그 시라노와 사랑하는 여인 그리고 갈등하는 나. 아주 스펙타클합니다. 어느 순간 다 읽어버립니다. 그러나 읽고 난 뒤의 감정은 명쾌하지 못합니다. 명쾌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작가는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야?'를 연발하게 됩니다. 샹탈과 장 마르크 사이에서 오가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변화와 더불어 본연의 모습이 변하는 걸 보면서 이 책의 제목 <정체성>을 돌아봅니다.

 

 

 

철학자 자크 라캉은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했습니다. 누군가의 기대나 사회적 통념에 부응하려고 노력하는 나를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는 '오롯한 나'이고 싶습니다. 오롯한 나란 아무도 보지 않는 상황에서의 나이기도 합니다. '타자를 완전히 배제한 나'는 가능할까요? 자신이 연관된 모든 관계로부터 탈피한 정체성이란 존재할까요? 그게 존재한다면 그게 바로 나의 본질일텐데요. 나는 그걸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정체성이라는 것은 세상에 나를 보여주는 거울이기도 합니다. 관계 속에서 타인에게 비춰지는 내 모습도 정체성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의미있는 존재이고 싶습니다. 장도 그러기 위해 편지 속의 주인공으로 자신을 모습을 바꾸었고 샹탈도 그 주인공에게 의미있는 존재로 변합니다. 타인에게 의미있는 존재를 쿤데라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읽었습니다. 밤 새 스탠드를 켜놓고 당신을 바라보겠다는 이 책의 마지막 대사는 그래서 유의미하게 다가왔습니다. 장자의 여물위춘(與物爲春 : 당신과 더불어 봄이 된다)이 겹쳐집니다.

 

 

 

샹탈은 남자들이 자기를 봐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꼈지만 나는 아내가 더 이상 나를 봐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낍니다. 앗, 그러면 내가 나에게 편지를 써야 하나? 그럼 나는 그 편지의 주인공이랑 사랑에 빠지고 그 편지를 쓴 나는 편지의 주인공에 질투를 하고? 머라는 거야 지금. ㅋㅋㅋ

 

 

 

그나저나 샹탈과 장 마르크는 어떻게 되었냐구요? 궁금하시죠? 자, 그러면 책을 읽어보세요. 쿤데라 할배의 깜짝 반전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