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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외국)

소비에트의 붉은 장미 :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콜론타이의 붉은 사랑>

by 개락당 대표 2025. 6. 14.

 

여자는 노동자다. 직업은 편집공. 하지만 직접 일을 한다기보다 조직을 관리하여 잘 돌아가게 만드는 일이 주된 업무다. 그는 소년처럼 보였고 예쁘지는 않았으나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 공산주이자이고 볼셰비키다. 노동자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소박하고 수수하다.

 

남자 역시 공산주의자이나 아나키스트다. 미국에서 회계를 배워 조직의 사업을 키워가고 있다. 잘 생겼으며 자유로운 영혼이다. 화려한 말솜씨를 가졌고 뛰어난 유머 감각으로 주위 사람을 즐겁게 한다. 조직 상부와 마찰은 있으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뛰어난 성과를 올린다.

 

둘은 어느 집회에서 만났고 데이트를 즐긴다. "내가 살던 고향 마을에는 시계가 없어서 우리는 별들에게 시간을 물어보았습니다." 남자는 이런 말로 여자를 유혹했고 여자도 금새 사랑에 빠진다. 남자는 여자의 요청으로 볼셰비키에 합류한다. 둘은 뜨겁게 사랑을 나누었으며 함께 살면서 여자는 남자의 일을 돕는다. 

 

하지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남자는 한 여자에게 만족하지 않았다. 공공연하게 바람을 피웠으며 여자 외에 다른 주위 사람들은 그 바람을 모두 알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여자도 알게 되고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남자는 "외로워서 그랬다."고 대답한다. 남자는 점점 뻔뻔스러워졌고 여자를 탓하기 시작했다. 결국 결혼은 파국을 맞았다.

 

여자는 다른 여자가 임신을 한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임신한 여자를 찾아가 임신을 축복한다. 그리고 자신도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 없이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하고 남자를 떠난다. 

 

어느 책에나 있을 법한 상투적인 사랑 이야기다. 너무도 흔한 이야기라 소설의 소재로 사용하기에도 평범할 정도이다. 하지만 100년 전 볼셰비키 혁명이 한창인 러시아에서 나온 이야기라면 어떨까. 위의 내용은 여성 혁명가이자 작가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1924년에 발표한 소설의 줄거리이다.  

 

 

 

 

러시아의 붉은 장미,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세계 여성의 날'이 있다. 3월 8일인데 1975년에 유엔이 공식적으로 지정했다. 1910년 노동운동 지도자인 독일의 클라라 체트킨과 러시아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제안했고, 이듬해부터 '세계 여성의 날'이 개최되었다. 콜론타이는 1872년 러시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소비에트의 노동운동가, 정치인, 외교관, 소설가로 살았다. 세계 최초의 여성 대사도 그의 자리였다. 독일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있다면 소비에트에는 콜론타이가 있다.

 

20세기 초 러시아는, 남성들이 임금을 얻기 위해 노동을 제공하듯 여성들은 자신의 성을 남성에게 제공하는 것이 의무로 여겨지던 시대였다. 여성들의 지위는 소유물에 가까웠고, 더우기 여성은 가난했다. 콜론타이는 직물 공장에서 일하던 많은 여성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과 낮은 임금으로 고통받는 모습을 보았고, 그들의 시위에 동참했다.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던 1905년 노동자들의 대규모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콜론타이는 혁명의 맨 앞에 서기 시작했다.

 

콜론타이는 뛰어난 공산주의 혁명가였고 여성해방론자였다. 그가 주장하고 실행한 것은 여성의 가사 노동 해방, 아이의 무상 보육과 무상 급식, 미혼모 보호, 이혼의 자유 보장, 여성의 재산권 행사 보장, 여성 노동자의 권익 보호, 자유 연애 주장 등 다양하다. 

 

콜론타이의 책과 사상이 1920년대 조선에 소개되었다. 많은 조선의 여성 지식인들이 그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특히 허정숙(북한의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낸 그 허정숙이 맞다)은 여성이 가정에만 머무르지 않고, 좋은 사회인이 되는 동시에 남성의 소유물이 되기를 거부하고 해방의 길을 찾아야한다는 콜론타이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전파했다. 허정숙 또한 여러 남자들과 자유롭게 사귀며 자유연애를 몸소 실천했다.  

 

 

1900년대의 콜론타이. 뛰어난 혁명가였고 능력있는 볼셰비키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유 연애를 주장하여 이후 유럽과 미국 등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사진 출처 : 위키백과

 

 

287p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가장 중요한 뉴스를 말해 주지 않았어. 그루샤, 나 의사에게 갔었어. 애를 가졌어."

 

"애기를? 정말이야? 그런데도 남편을 가게 했다고? 그 애가 아버지도 없이? 설마 너 유행을 따라가려는 건 아니지? 낙태?"

 

"낙태라니? 아이를 키워야지. 나는 남자가 필요 없어. 남자들이란 아버지가 되는 게 전부야. 어린애 셋을 거느린 페도세예프 부인을 봐! 남편이 도라한테 가는 걸 막지 못했어."

 

"그건 정말 그래. 하지만 어떻게 아이를 혼자서 키울 거니?"

 

"나 혼자서라고? 조직이 길러 줄 거야. 우리는 탁아소를 세울 거야. 너도 거기 데리고 가서 일하게 할 거야. 너도 아이들을 좋아하잖아. 그렇게 되면 그 애는 우리들의 아기가 되는 거지. 누구나 아이를 갖는 셈이지."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다. 주인공 바실리사는 아이를 가졌다는 기쁨과 새로운 사회를 만들 희망으로 가득하다. 국가가 내 자식을 키울 것이고 나는 그런 국가를 만드는 것에 온 힘을 다하리라. 아이는 우리 모두의 아이니까. 콜론타이는 이 소설을 통해 국가가 아이를 양육하여 여성이 가사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새로운 사회를 제안했다. 무려 100년 전에. 그리고 그 제안은 소비에트 시절에 일부가 실현되기도 했다. 

 

바실리사와 블리지미르가 사랑에 빠지는 모습은 매혹적이었다. 두 젊은 남녀가 눈에 불꽃이 튀며 사랑을 시작하는 건 언제나 설레는 장면이다. 블라지미르가 바람을 피울 땐 나도 모르게 개자식이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바실리사가 남자를 버리고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장면에서는 통쾌했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소비에트 시대상을 볼 수 있었고, 바실리사가 가진 노동자 의식과 당시 볼셰비키 혁명을 완성하고자 하는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도 잘 알 수 있었다.

 

콜론타이의 별명은 '소비에트의 붉은 장미'다. 붉은색은 사회주의와 혁명을 상징하며 장미는 아름다움과 여성성을 나타낸다. '붉은 장미'는 여성의 혁명가적 면모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나타내는 멋진 별명이다. 그리하여 '붉은 장미'는 여성의 자유와 진보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책을 다 읽고 콜론타이의 일생에 대해 여러 자료를 찾아보고 그의 사상과 행적을 읽었다. 시대를 앞서간 인물을 들여다보고 알아가는 것은 언제나 가슴이 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