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간 나도 가보고 말테얏! :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
함메르페스트
올해는 태양의 활동이 왕성하여 오로라를 보기에 아주 좋은 해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오로라를 보려면 하늘이 맑아야 하는데, 노르웨이 북부에서 맑은 하늘은 보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는 말도 이어졌다.
"오로라를 보려면, 적어도 한 달은 잡고 오셔야 해요!"
"한 달이나요?"
"최소한 한 달이죠."
한 달이라. 유럽에서 가장 춥고, 어둡고, 오지인 곳에서 한달.... 이 얘기를 여러 사람에게 했지만 모두 아주 재미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덜컹이는 버스에 몸을 싣고 있다. 이제 돌이킬 수도 없게 되었다. (p.27)
파리
퐁피두 센터 같은 건물에 대해 정말 맘에 안 드는 점은 그저 과시하기 위한 구조물이라는 것이다. (파리는 이런 건물로 질식사할 지경이다.) 퐁피두 센터를 설계한 리처드 로저스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건물을 확 뒤집어서 배관을 온통 밖에다 설치했어요. 나 정말 쿨하죠?"
그래도 뭔가 기능이 있다면 용서가 되겠지만 그는 퐁피두 센터의 진정한 기능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해 보지 않고 지은 듯하다. 회합 장소인지 그냥 쉬다가 가는 곳인지 도무지 정체성이 불분명하다. 안에 들어가 보면 번잡하고 혼란스럽기만 하다. 오르세 박물관 같은 공간감이나 조명, 웅장미가 전혀 없다. 그저 백화점 세일 첫날처럼 붐비기만 한다. 앉을 곳도 마땅치 않고 구심점도 없다. 시계탑도 없어서 약속을 잡을 때 퐁피두 센터 어디에서 만나자고 할 데가 없다. 중심이 없는 것이다. (p.75)
쾰른
쾰른은 음울한 도시였는데, 나는 그 점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독일인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처럼 도시를 엉망으로 설계할 수도 있으며, 쾰른이 특히 그렇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밖으로 나오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역에서 벗어나면 세계 최대의 고딕 양식 건축물인 성당이 버티고 있다.
매우 근사하고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는 성당임에는 틀림없지만, 이 성당은 너무도 황량하고 고독하며, 크기만 하고 바람이 몰아치는 높은 곳에 위치한 콘크리트 광장 한가운데 서 있다. 성당을 거기에 세울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사람을 생각하고 짓지는 않은 것 같다.
독일 퀼른 퀼른대성당
사진 출처 : http://jsksoft3.tistory.com/249
암스테르담
일단 아침에는 식사를 위해 일어났다가 방으로 돌아가 해가 전혀 들지 않게 빛을 차단한 다음, 종일 잠을 잤다. 오후 4시쯤이면 다시 일어나 복도 끝에 있는 샤워실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다음, 새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에는 기름을 바르고 호텔에 딸린 술집으로 내려갔다. 네덜란드 맥주를 손에 들고 창가 테이블에 앉아 창밖의 광경을 보면서 이 큰 도시를 아름다운 운하와 쾌활한 창녀들, 풍부한 마약으로 채우다니 네덜란드 인들은 얼마나 멋진 사람들인가 말하곤 했다. (p.133)
코펜하겐
아주 맛있는 초콜릿 크림 파이나 기대하지 않았던 거액의 수표를 받는 일을 제외하고, 상쾌한 봄날 저녁 서서히 저물어가는 저녁 해의 긴 그림자를 따라 외국 도시의 낯선 거리를 한가하게 산책하는 일만큼 즐거운 일이 있을까?
그러다가 가끔 멈춰서 가게 진열장을 들여다보거나, 교회, 예쁜 광장이나 한가한 부두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하면서 앞으로 오랫동안 흐뭇하게 기억할 유쾌하고 내 집 같은 음식점이 과연 길 이쪽에 있을지 저쪽에 있을지 망설이는 일은 또 어떠한가? 나는 이런 일이 너무도 즐겁다. 매일 저녁 새로운 도시에 가보면서 평생을 살아도 좋겠다. (p.167)
예테보리
문제 : 스웨덴에서 벽 한 면을 칠하는 데 사람이 몇 명이나 필요할까?
정답 : 27명. 한 명을 칠하고, 나머지 26명은 구경꾼을 정렬시키는 데 필요하다.
문제 : 노르웨이 사람들은 뿅 가고 싶을 땐 어떻게 할까?
정답 : 담배 끝에 붙은 필터를 떼어낸다.
문제 : 스웨덴에서 집에 전투 경찰을 출동시키는 가장 빠른 방법은?
정답 :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제때 반납하지 않으면 된다.
문제 : 스웨덴 사람의 식생활에는 주식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청어인데 나머지 하나는?
정답 : 역시 청어. (p.191)
로마
내가 묵은 호텔은 카부르 거리 곁에 있는 오래된 지역이었는데, 거기서부터 로마 시내 어디로든 걸어갈 수 있었고, 내가 로마에서 줄곧 한 일도 그것이었다. 나는 걷고 또 걸었다. 매일 통이 트면 일어나서 아직 공기가 신선하고 아무도 쓰지 않은 새것 같은 느낌인 그 완벽한 시간에 도시가 깨어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부스스한 차림으로 휘파람을 불며 빗자루질을 하고 차양을 내리고 셔터를 올리는 가게 점원들이 정겨웠다. (p.212)
나폴리
이제는 동네 사람들만 남았다. 사람들은 따스한 밤공기 속에 별빛을 받으며, 검은 바다와 멀리 떨어진 나폴리의 불빛을 배경 삼아 대여섯 명씩 모여 있었다. 저녁을 먹은 다음에 이렇게 모여서 반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는 게 일과인 듯 했다. 10대들은 교회 계단에서 시간을 보냈고, 더 어린 아이들은 어른 다리 사이를 누비며 뛰어 다녔다. 모두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나도 저들 중 하나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푸른 섬에서, 근사한 풍광과 친절한 사람들, 맛있는 음식을 즐기고 살면서 곱디고운 테라스가 있는 이 예쁜 광장에 매일 밤 산책을 나와 내 이웃들과 담소를 나눌 수 있다면 좋겠다. (p.242)
나폴리 정경
사진 출처 : https://www.expedia.co.kr/Naples.d6034774.Travel
제네바
제네바에서 이틀을 묵고 나니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제네바는 조그마하면서도 깨끗하고 산책하기 좋은 쾌적한 곳이었다.
그러나 제네바는 매우 매력 없는 곳이기도 하다. 물가는 비싸고, 사람들은 사무적 보수적이며, 따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사람들은 늘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서 내 앞 길을 가로막지 말고 비키라고 말하는 듯한 자세로 바삐 걸어 다닌다. 거리에는 봄이 한창이었건만 사람들의 표정은 한겨울이었다. 바나 비스트로는 암스테르담과 코펜하겐처럼 젊은이들로 생기가 넘치지 않았다. 제네바에는 활력도, 광채도, 영혼도 없었다. 이 도시의 최대 장점이라고는 거리가 깨끗하다는 것 뿐이다. (p.294)
인스부르크
나는 시내에 있는 작은 호텔 골데네 크로네에 든 다음, 기울어가는 해의 햇살이 황금빛으로 물들여 가는 도시를 산책하며 오후 늦은 시간을 보냈다. 인스부르크는 바로크 양식 건축물들과 둥근 지붕들이 이루는 전경이 아름다운 이상적인 소도시다. 노천 박물관처럼 인위적으로 관리된 느낌 없이 아주 잘 보존되어 있고, 주변 환경도 완벽에 가깝다. 길이 끝나는 곳마다 험준하면서도 잘 생긴 높은 산이 머리에는 흰 눈을 이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솟아 있다. (p.317)
스플리트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저녁이 되면 사람들은 모두 가장 좋은 옷으로 차려 입고 대로를 따라 저녁 산책을 나선다. 가족들, 자세는 구부정해서 껄렁해 보이는 10대 남자 아이들, 한껏 치장을 하고 과도하게 향수를 뿌린 10대 여자 아이들,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데리고 나선 젊은 부부들, 노부부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나와 있다. 카프리의 광장에서 봤던 것과 같은 유쾌한 분위기였는데, 이들은 멈춰서 있지 않고 수백 명이 긴 부두를 따라 계속해서 행진한다는 점이 달았다. 이 산책은 밤이 제법 어슥하도록 계속되는 것 같았다. (p.346)
소피아
소피아에서는 멀리 산책을 나갈수록 더 좋다. 나는 하루를 잡고 소피아 동남쪽의 산기슭에 자리 잡은 동네들을 찾아 갔다. 이곳에는 숲과 공원이 있고, 다소 고급스러운 아파트 건물과 구불구불하고 평화로운 거리, 예쁜 집들도 몇 채 있는 동네도 있었다. 슬리브니차 강 위로 난 인도교를 건너, 그리고 이름 모를 주택가 거리를 따라 다시 시내로 들어오면서 소피아는 실로 아름다운 도시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보다도, 소피아는 내가 가봤던 도시 가운데 가장 유럽다운 도시였다. 현대식 쇼핑센터도, 대형 주유소도, 맥도날드나 피자헛도 없고, 코카콜라 회전 광고판도 없다.
내가 가본 어떤 도시도 미국 문화의 달콤한 유혹에 이토록 철저하게 저항한 곳은 없었다. 소피아는 어느 모로 보나 완전히 유럽다운 도시였다. 내가 어린 시절 꿈꾸었던 유럽은 바로 이런 곳이었다는 걸 깨달으며 마음 깊이 뭔가 불편해졌다. (p.375)
불가리아 소피아의 알렉산더 네브스키 성당
사진 출처 : http://himinq.blogspot.kr/2014/08/2013-bulgaria.html
이스탄불
나는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족이 보고 싶었고, 내 집의 친숙함이 그리웠다. 매일 먹고 자는 일을 걱정하는 것도 지겨웠고, 기차와 버스도, 낯선 사람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도, 끊임없이 당황하고 길을 잃는 것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라는 사람과의 재미없는 동행이 기겨웠다. 요즘 버스나 기차에 갇혀서 속으로 혼잣말을 중얼대는 내 모습을 보고 벌떡 일어나 자신을 내팽개치고 도망가고픈 충동을 얼마나 많이 느꼈던가?
동시에, 나는 계속을 여행을 하고 싶다는 비이성적인 충동을 강하게 느끼기도 했다. 여행에는 계속 나아가고 싶게 만드는, 멈추고 싶지 않게 하는 타성이 있다. 해협 바로 저편에 아시아가 있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저기가 아시아 대륙이라고 생각하자 경이로웠다. 몇 분이면 아시아 땅을 밟을 수 있다. 돈도 아직 남았다. 그리고 내가 가보지 못한 대륙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p.385)
여행은 온몸으로 부대끼며 느끼는 것이다. 길을 잃기도 하며, 밥을 굶기도 하며,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도시를 걷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익숙한 것에 결별하여 온통 오로지 스스로 선택하고 실행하는 자신을 만나게 되고, 낯선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여행에 목말라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여행서를 읽으며 '언젠간 나도!!'를 외치게 된다.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여행 수기들 중에서 빌 브라이슨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다. 여행에 관해 그처럼 쓰는 작가는 없기 때문이다. 그의 여행기에서는 '환상적인 여행지' 혹은 '낯선 자아 찾기' 같은 단어를 찾아 볼 수 없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여행에서 무언가를 얻는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배고프면 짜증내고 맘에 안들면 성질내는 전형적인 꼰대 아저씨다.
"집의 안락함을 버리고, 낯선 땅으로 날아와 집을 떠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잃지 않았을 안락함을 되찾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돈을 쓰면서 덧없는 노력을 하는 것."
그에게 여행이란 이런 것이다.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그 덧없는 노력을 그는 무척이나 좋아한다. 투덜이 스머프를 능가할 정도로 투덜거리지만, 낯선 곳에서 즐길 줄 알고, 따스한 마음으로 새로운 곳을 바라보며, 언제나 유머를 잃지 않고 긍정적이다. 그의 여행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매료되는 까닭이다. 나도 그렇다. 제네바는 정말 영혼이 없는 도신지, 쾰른은 음울한지, 소피아가 그토록 매력적인지, 빌 아자씨의 글이 구란지 아닌지 확인하러 가고 싶어진다.
친하게 지내는 한 살 많은 동네 형이 있는데, '스시다다미'라는 초밥집 사장이다. 얼마 전부터 오토바이를 몰고 유라시아를 횡단해 보겠다는 황당무계한 소리를 해대서, 아, 네~~ 그렇게 하시지요~~ 하며 영혼없는 대꾸를 해줬다. 근데 시간이 지날 수록 진짜 갈 기세다. 주섬주섬 뭘 준비하는가 싶더니 5학년짜리 아들래미 지훈이를 데리고 뒷산에 칡 캐러 가듯 그렇게 가버렸다. 'All bikers are Brothers' 라는 딱지 하나 붙이고.
http://www.gimha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692
김해신문에 절찬리 연재 중이다. 궁금하신 분들은 클릭을....
6월 11일에 동해를 출발해서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정을 시작하여 하바롭스크, 치타, 바이칼 호수와 이르쿠츠크를 거쳐, 이 글을 수정하고 있는 오늘 7월 6일에는 몽골의 울란바토르와 알타이를 여행중이다. 이르쿠츠크와 울란바토르라니!! 말이 쉬워 그렇지, 거기가 어디 쉬운덴가. 어떤이의 평생의 소원인 그곳에서, 형과 그 아들은 잘 먹고 잘 놀고 있더라.
바이칼 호수 옆에서 텐트를 치고 호수 저편으로 지는 해를 바라본다. 크아~~~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사진은 형의 얼굴책에서 내려받았다.
몽골에서 만난 현지인들과 바로 친구가 되고, 그들의 생활을 엿보기도 하고 살짝 발을 담그기도 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여행의 진수라 아니할 수 없다.
지훈아. 이건 너의 인생샷이다!!
형은 그렇게 떠났고, 떠나지 못한 나는 새로운 곳에서 좌충우돌하는 형의 이야기를 보기 위해 생전 하지 않던 Face Book을 요즘은 매일 보고 또 본다. 형이라고 두려움과 망설임이 없었겠는가. 떠나기 전에 걸리는 게 한두가지였을까. 그럼에도 내 눈에는 뒷동산 가듯 쉽게 가는 것처럼 보였다. 절실함과 실행력의 문제다. 형이 존경스러워졌다. 그 실행력 하나 만으로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형은 이 여행을 제대로 즐기고 있다. 존경과 부러움과 온갖 찬사를 보내며 오늘도 형의 여행기를 읽는다. '언젠간 나도!'를 외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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