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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그는 여행이 생활이고 나는 생활이 여행이다 : 유성용 <여행생활자>

by Keaton Kim 2017. 11. 27.

 

 

 

그는 여행이 생활이고 나는 생활이 여행이다 : 유성용 <여행생활자>

 

 

 

꿈을 꾸었다. 낯선 곳에 나는 서 있었다. 그러나 내 기억 한 켠에 머물러 있는 그 어디쯤이다. 그 곳은 요르단의 와디럼 사막이었고, 아부다비 시내 거리의 여인들이 있는 뒷골목이기도 했다. 호주의 앨리스스프링스 아보리지널이 사는 어느 곳이었고, 난징의 현무호 공원 어디쯤이기도 했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 그저 주위를 바라만 보고 있다. 나는 길을 잃었다.

 

 

 

해가 미처 뜨기 전에 일터로 나간다. 추위를 견디며 일을 한다. 해가 지고 조용해지면 일을 마치고 나의 숙소로 돌아온다. 정신없이 살고 있지만 나는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낯설기만 하다. 내가 어디쯤 왔는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득하다.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지만, 나는 여전히 길을 잃었다. 꿈과 현실의 내가 무람없이 들락거린다.

 

 

 

 

 

 

그러니까 세상의 중심이라고 믿어지는 카일라시는 세상의 끝에 가서야 만날 수 있었고, 그 자리에서 세상의 중심과 끝의 구별은 잠시 아득해져 버린 채, 그만 이름 모를 어느 낯선 혹성이 되어버린 듯했다. 거대한 우주이 정적이 그 바위산 아래 까마득하게 박혀 있었다. (p.88)

 

 

 

아직은 어두운 새벽녘이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가 문득 입을 열어 나에게 물어왔다. "그대는 살면서 문제가 생기거나, 고난 속에 처하면 무엇을 하십니까?" 그의 질문에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잘 기억할 수 없다. 다만 나의 대답에 이은 그의 짧은 말이 뚜렷이 기억날 뿐이다. "나는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곤 합니다." (p.98)

 

 

 

굳고 단단한, 극진한 기원일수록 오래도록 암송하고 되뇌어도 그 속내를 읽어내기는 더 힘이 드는 법이다. 내가 무언가를 내 몸의 저 먼 실핏줄까지 혹은 땀구멍 하나하나까지 그리고 바라고 있다는 것은 내 이해력으로 쉽게 해독될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고의 영역을 넘어서 몸으로 기원하는 기술, 그것이 바로 내게는 자주 되뇌고, 암송해서, 잊지 않는 일이다.

 

직장에서 퇴근하고, 술 마시고 그저 잠자리에 누워 잠들기 전까지 이따금 떠올려 보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도 여러 번 잊지 않고 자신의 기원을 자신이 느낄 수 있을 만큼 제 곁에 가까이 불러오는 일. 그것은 분명 효과가 있다. (p.169)

 

 

 

묵티나트에 오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제 잃어버린 길들의 한 자락을 따라 올라왔을 것이다. 해질녘 어둠 속에서도 길들은 아직 환하게 빛나고 있다. 이곳은 그렇게 정점이다. 그래서 더 나아갈 곳도 없어 보인다. 일몰은 세상 어디보다 아름답지만 나는 다만 공허하고 허망했다.

 

내 몸뚱이는 얼음바람에 내버려져 있었다. 피곤하다. 온종일 쉬지 않고 움직였던 다리는 너털거렸고 몸에는 심하게 한기가 밀려왔다. 어둠에 밀려 숙소를 잡았지만, 숙소에 난방시설이 있을 리 없다. 주방에서 받아온 뜨거운 물 한 병을 안고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얼굴까지 침낭 속에 넣고 무덤 같은 어둠 속에 누워 있자나, 눈물이 죽 흐른다. 기억 속에서 끊어진 길들을 다시 이어 도달해도 이곳엔 아무것도 없다. 어둠 속에서 누워 있는 것이 누구냐. 내 기억의 환영만 같다. (p.244)

 

 

 

봄볕 눈부신 훈자의 어느 오후다. 사방 어디를 걸어도 좋다. 농부들은 꽃 속에서 밭을 갈고, 빨래들은 꽃바람에 마른다. 민들레 나물을 무쳐야겠어. 나는 주머니칼을 들고 나와, 꽃그늘 속에 쪼그리고 앉아 민들레를 캔다. 이 마을 처자들이 한참을 기웃거리더니 이걸 캐서 뭐 할 거냐고 묻는다. 저녁에 반찬 해 먹을 거라고 했더니 그걸 어찌 먹냐고, 저희들끼리 웃고 난리가 났다. 한참 민들레를 캐다가 돌아보니 이곳 처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클로버 잎을 따고 있다. 토끼풀 따서 도대체 뭐 할거냐고 물었더니, 먹는단다. 그걸? 나도 한참을 웃는다.

 

우리는 서로 민들레와 토끼풀을 바꾸어 먹어보다가 퉤퉤 뱉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지켜보던 나어린 것들이 까르르 웃는다. 이제 완연한 봄이다. 산에 들에 이름 모를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난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눈을 뜨려고 하면 슬쩍 웃음이 나온다. 행복해서 그렇다. 그렇다, 이건 분명 행복한 거다. 눈만 뜨면 보이는 눈부신 라카포시 설산과 드넓은 훈자 협곡, 그리고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살구꽃들 속에 내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p.329)

 

 

 

나는 왜 떠나는 자가 되었을까. 그리고 이제 와서 내 입으로 할 수 있는 몇 마디 말은, 상처란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나의 자리를 상처에서 비켜 다시 마련하는 일. 이 말을 의심하지 말라. 그 속에 혹은 그 밖에서 치열함을 묻지도. (p.389)

 

 

 

 

 

 

 

 

 

 

얼핏 돌린 채널에서 '차마고도'를 방영중이다. 몇 번을 봤지만 또 눈이 멈춘다. 티베트의 서쪽 끝 '구게 왕국'이다. 아무도 살지 않는 황량한 땅이다. 세상의 중심인 수미산(카일라시)가 있고 바로 아래는 네팔이며, 서쪽으로 가면 인도 카슈미르 지역의 레가 나오고 더 서쪽엔 파키스탄이다. 계속 가면 라호르에 닿고, 책에도 나오는 전설의 길 카이베르 패스가 시작되는 도시 페샤와르가 나온다. 이 길을 넘으면 아프가니스탄이다.

 

 

 

천장공로, 수미산, 마나스로바 호수, 훈자, 무스탕 가는 길, 조질라 패스, 라다크, 카스, 천로역정, 카라코람 하이웨이.... 이런 단어만 나오면 나는 긴장한며 눈을 번쩍 뜬다. 내가 발 딛고 사는 세상 저 너머의 동경과 미지의 세계다. 막상 찾아보면 오직 돌덩이와 거친 사막과 초원과 온통 감정 없는 잿빛 풍경인데 말이다. 한 번 가보지 않고는 평생 풀리지 않을 숙제다.

 

 

 

책을 읽고 저자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뭘 하는 냥반이길래 저 아무것도 아닌 곳에 기를 쓰고 가느냐 말이다. 그 곳에 대체 뭐가 있길래 그렇게 길에서 방황하냔 말이다. 이 냥반, 책만 유명할 줄 알았더만, 잘생김으로도 유명하단다. 아주 훈남이다. 어느 블로그는 여행작가 중에서 가장 잘 생겼다고 했다. 연세대학교 교육학과를 나와서 국어 선생님도 몇 해 했더랬다. 그런데 왜왜왜? 대체 왜?

 

 

 

그가 (한 때) 운영했던 맹물다방 블로그(http://maengmul.com/)에도 들어가 보고 미디어와 여러 인터뷰도 보았다. 인터넷에 나타난 유성용이 실제 유성용의 10%도 채 말해주지 않겠지만, 그는 그렇게 아무 것도 아닌 길에서 방황하며 아무 것도 아닌 그런 글을 쓰는 존재라고 느껴졌다.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것이다. (그런 그도 결혼을 하고, 최근에 이혼 수속 중이라는 글도 나왔다. 길 위에서는 가장 자유로운 영혼이지만, 세속에서는 가장 쓸모 없는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글도 있었다. 묘하게 공감되었다. 그러면 안되는데....)

 

 

 

그가 일상처럼 보낸 길 위에서의 삶이 어떨지는 잘 모른다. 나는 그처럼 될 수도 없고 그와 같은 처연하고 무참한 경험을 하기엔 이제 늦어버렸다. 하지만 책에서 보여지는 그도 역시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여행은 오로지 직접 여행을 떠난 사람의 몫이며, 책을 아무리 읽어도 그 경험을 가질 수 없다. 책을 보지 말고 차라리 여행을 떠나라." 는 그의 말은 백프로 공감한다. 그가 여행에서 느꼈던 감정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려면, 반드시 그렇다. 하지만 그와 같이 고단한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는 활자화된 그의 경험을 보고 위안을 받는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아 몸을 담그고 그의 글을 읽는다. 몸은 점점 몽롱해지고 아득해진다. 그 상태가 작가의 외롭고 쓸쓸한 문장과 더해지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그가 들른 파키스탄의 어느 골목인지, 아니면 내가 가 보았던 내 기억 속의 저 끄트머리 어디인가를 한 없이 해메고 있다. 그러다 문득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나는 여전히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며 에는 듯한 바람을 견뎌내고 있다.  

 

 

 

유성용은 여행중이고 나는 생활중이다. 그는 여행이 생활이고 나는 생활이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