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 이강, 역사 속에서 잊힌 이들 : 다니엘 튜더 <마지막 왕국>
고종의 첫째 아들은 이척입니다. 우리나라 마지막 왕인 순종입니다. 명성황후가 낳았습니다. 유일한 적출입니다. 둘째 아들은 의친왕 이강입니다. 순종과 세 살 터울입니다. 귀인 장씨가 낳았습니다. 세째 아들은 영친왕 이은입니다. 고종 나이 마흔 여섯 살 되던 해 귀비 엄씨가 낳았습니다. 작은 형인 이강과 스무 살 터울입니다. 황태자로 책봉되어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면 왕에 올랐을 겁니다. 막내는 덕혜옹주입니다. 고종이 예순 하나 되던 해 귀인 양씨가 낳았습니다. 영친왕과는 열 다섯 살, 의친왕과는 서른 다섯 살 터울입니다.
순종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고, 게다가 독살 미수사건도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도 제대로 된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영친왕은 조선인이라는 의식이 싹트기 전 일본에 볼모로 가서 일본 여자 마사코와 정략 결혼을 합니다. 덕혜옹주도 사춘기 시절부터 정신병을 앓았고, 나중에 쓰시마의 소 다케유키와 결혼하게 됩니다. 게다가 순종과 영친왕은 마마보이입니다. 순종은 적자고 엄마가 무려 명성황후입니다. 몸이 약해 언제나 엄마가 싸고 돕니다. 고종과 엄씨 모두 늦은 나이에 본 영친왕은 더합니다. 실질적인 궁의 실력자인 황귀비 엄씨는 영친왕을 애지중지합니다.
하지만 의친왕 이강은 그 환경이 달랐습니다. 태어나보니 엄마는 없었고, 명성황후의 질투와 감시를 받으며 자랐으며, 어디에서도 자기 편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 책은 비극적인 시대에 더 비극적인 출신을 가진, 그래서 비극적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의친왕 이강을 그렸습니다.
이강
나는 자주독립을 이룬 민주국가를 꿈꾸고 있습니다. 일본도 없고, '폐하'나 '전하'로 불리는 사람도 없는 그런 국가 말입니다!
고종
모든 나라는 다 이런식으로 끝나는 것인가. 그렇지, 나 같은 왕으로 끝나는 것이지.
수덕
나는 이 남자와 혼인을 한 게 아니다. 나는 나라와 결혼했다. 이 남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든 말든, 나는 그저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혜랑
영광입니다, 전하. 그런데 제게 거처를 마련해 주실 그 돈을, 대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 주실 수 있을까요.
원식
조선은 나를 밀어내고 죽어가는 채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조선의 모든 게 다 저를 화나게 합니다.
란사
남녀 구분 없이 모두에게 새로운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지금 조선은 꺼진 촛불 같지만, 우리가 다시 불을 붙일 겁니다. 우리의 목표는 '더 나은 조선'이에요.
이우
나는 의친왕의 아들, 조선의 이우입니다. 설사 이대로 이 땅을 떠나 백 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나는 조선의 이우입니다.
의친왕 이강, 잘 생기셨다. 고종 판박이인 순종과 영친왕과는 완전 다르다. 책에서 귀인 장씨는 키도 크고 피부도 하얘서 아라사 여인 같다고 했다. 엄마인 귀인 장씨의 얼굴을 알 순 없지만 이강은 엄마를 닮았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이었던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을 다 겪고 1955년에 돌아가셨다. 파란만장한 일생은 의친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강의 아들 이우. 이 정도면 조선 최고의 미남이 아닌가. 차은우랑 붙어도 밀리지 않을 듯. 일제 강점기의 조선 왕족들은 모두 강제로 일본인과 결혼시켰는데, 이우는 조선인과 결혼하려고 친일파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와 결혼했다. 금슬도 좋았다고.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10년을 일본군 장교로 여러 나라를 돌다 히로시마에서 원폭으로 사망했다. 히로시마에 있는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이우 공 전하 외 이만여 영위'라고 쓰여 있다.
책에서 큰 비중으로 나오는 김란사. 미국으로 가면서 입국신고서에 남편의 성을 따서 하란사 라고 썼고, 그래서 하란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에서 공부했고, 여기서 이강을 만난다. 유관순의 스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여성의 교육에 올인했다. 독립운동에도 깊게 관여했고, 의친왕 망명을 주도했다. 파리강화회의에 가던 중 베이징에서 독살당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 지도자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시는 우사 김규식 선생. 김구 이승만과 더불어 임시정부 우익 진영 삼인방이다. 미국 유학파에 여러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 버지니아의 로어노크 칼리지에서 이강을 만나 우정을 나눈다. 책에 원식으로 나오는 이의 모델이 궁금했고, 김규식 선생이 아닐까 추측했는데, 추측이 맞았다. 원식은 어릴 때 불우하게 자랐다고 나오는데, 실제 김규식 선생도 고아원을 전전했다고.
의친왕 이강이 책의 주인공인데, 내가 알고 있던 영웅적인 독립운동가, 왕족으로서의 품격 있는 모습은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게 제일 놀라웠습니다. 저자에게 "너무 팩트로만 쓰신 거 아녀요?"라고 따져 묻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이강과 교류하는 낸시나 원식이 훨씬 영웅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역사에 가까운 소설이라 믿게 된 것 같습니다. 읽으면서 내내 "강아, 좀더 열심히 살아야지."라고 응원을 하기도 했습니다.
강의 아내 수덕의 외로움과 곧음, 혜랑이 강과 함께 독립운동을 여러모로 도운 것도 일, 아들 이우가 조선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계기 등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종과 명성황후, 순종, 영친왕 등 당시 왕가 인물들의 여러 모습들을 입체적으로 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고 좋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의친왕에 대해 알아보려고 여러 기사를 뒤적거렸습니다. 그런데 의친왕의 자녀가 무려 12남 9녀라고 합니다. 이강 이 양반 살아있구먼. 책에서는 혜랑 바라기로 나왔는데요. 하긴 잘 생김으로 보자면 여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요. 그게 아니면 외로움을 다른 방식으로 풀었던가요. 심지어 이우에게는 형도 있었습니다. 이강의 장남은 이건입니다. 사진을 보니 역시 한 인물 합니다. 하지만 생김새와는 달리 모모야마 켄이치라는 완전한 일본인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제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 소설을 읽고 독자들이 '진짜' 의친왕 이강, '진짜' 김란사(낸시 하의 모델)에 대해 궁금증을 갖는 것입니다. 나아가 그들의 '진짜' 역사를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이 소설을 쓴 저의 주된 동기는 더 많은 사람이 부당한 역사 속에서 잊힌 이들을 기억하게, 그리고 알게 하는 것입니다. (608쪽 작가의 말 중에서)
네, 작가의 의도는 완전히 적중했습니다. 김란사에 대해 찾아보니 <덕혜옹주>를 쓴 권비영 작가가 쓴 책이 있습니다. 읽어볼 참입니다. 조선 최고 미남 이우의 일생도 궁금해졌구요. 이우와 박찬주가 나오는 소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과 그의 아들 황세손 이구에 대해서도 더 알고 싶어졌습니다. 읽기를 잘 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혼란했던 시기를 엿볼 수 있었고, 그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외롭고 힘들지만, 그래도 힘을 내어 살아가는 이강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외국인임에도 이렇게 좋은 우리 역사서를 써 주신 작가에게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