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이야기

몽골 로드에서 할랄 스트리트까지 :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1>

개락당 대표 2025. 6. 30. 15:38

 

 

 

1.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이병한의 <유라시아 견문>

 

책의 시작은 유길준의 <서유견문>이다. 저자는 '유라시아 견문'을 준비하면서 여러 책을 읽었는데 유길준의 책에 대해서는 각별하게 지면을 할애해서 소개하고 싶다고 썼다. 그 이유는 <서유견문>이 조선을 개혁하자는 제안서였기 때문이다. 

 

32p

막상 책을 펼치니 빠져들었다. 만만치 않았다. 간단치가 않았다. 과연 어설프게 아는 것은 모르는 것만 못한 법이다. 그가 궁리하는 개화開化의 개념과 방법이 발군이었다. 어떻게 조선의 근대를 자주적으로 이룰 것인가를 깊이 궁리하고 써내려간 국정개혁 제안서였다. 전혀 낯설지만은 않았다. 조선 사대부의 시무책을 잇고 있었다. 정치, 경제, 법률, 교육, 문화 등 다방면의 개혁안을 제시했던 연행록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저자는 현재를 서구적 근대의 종언이라 하며, 유길준이 살았던 개화의 시대와 비교했다. 지금은 또다른 중요한 개화기이며 유라시아야 말로 그 희망이라고 적었다. 유길준이 조선의 새 앞날을 <서유견문>에 담았듯, 저자도 지금 우리의 미래를 이 책에 담아 <유라시아 견문>이라고 제목을 지었다.

 

 

유길준은 조선 최초의 일본 유학생이며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기도 하다. 일본 유학시절엔 후쿠자와 유키치의 후원을 받았다. 보빙사(미국에 대한 보답으로 사절을 파견한다는 의미)의 일원으로 미국을 방문했고, 거기 눌러 앉아 유학했다. <서유견문>의 형님뻘 되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은 일본에서 몇 백만 부가 팔렸는데 비해 <서유견문>은 아무도 읽지 않았으며 그만큼 개화에 대해 조선이 무지했다는 글을 어느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유길준은 조선의 개화에 진심이었다. 사진은 1883년 보빙사 일행이며 뒷쪽 왼쪽에서 세 번째가 유길준이다. 사진 출처 : 위키백과

 

 

2. 우크라이나의 그릇된 판단이 전쟁을 불러왔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식량 보급원이다. 체르노젬이라 불리는 비옥한 흑토 덕에 천혜의 곡창지대를 가졌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을 갖는 것은 미국의 몬샌토와 듀퐁이다. 나쁜 놈들은 미국과 미국 기업인데 엉뚱하게 러시아가 비난받고 있다고 저자는 꼬집었다.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는 미국 언론과 선동 때문이라고 했다. 

 

74p

2014년 크림 반도의 러시아 합병은 그곳 주민들의 '민주적인' 의사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착시가 상당히 널리 펴져 있다. 그만큼 서방은 선전선동에 능란하다. 아무런 물증을 제시하지 않고도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다. 이 또한 결코 낯선 풍경만은 아니다. 거짓 정보를 흘려 이라크를 침략하고 석유지대를 탈취했던 예전의 악습과 상통한다.

 

미국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반소, 반공의 이데올로기를 심었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적대적 관계를 맺게 만들었다고 저자는 말했다. 그리하여 미국이 꾀하는 것은 유럽, 러시아, 중국을 나누고 쪼개는 것이라 했다. 정리하자면 현재의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의 꾐에 빠져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우크라이나의 잘못이 크다는 말이다. 동의한다. 

 

 

비옥한 땅과 미인들의 나라 우크라이나. 정치만 잘하면 행복한 나라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는데.... 얼른 전쟁이 끝나고 일상을 회복하길 간절히 바란다. 사진은 수도 키이우에 있는 독립 광장. 사진 출처 : https://kr.trip.com/travel-guide/attraction/ukraine-100226/tourist-attractions/type-all-of-historic-sites-70-132/

 

 

3. 1955년 반둥 회의를 기억하라

 

반둥 회의는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개최된 아시아 - 아프리카 회의를 말한다. 아시아 23개국과 아프리카의 6개국이 참가했다. (우리나라는 전쟁이 끝난지 겨우 2년 밖에 되지 않아 초청받지 못했다.) 저자는 중국의 저우언라이와 인도의 네루가 합의한 평화공존 5원칙이 대동세계를 염원하는 현재에도 유효한 위대한 유산이라 했다.

 

107p

2055년, 반둥 회의 100주년을 상상해본다. 아시아 - 아프리카의 주요 국가들도 건국 100주년을 통과했을 시점이다. 무릇 창업 이래 삼대는 지나야 새 국가의 전성기가 열린다. 그때 인도네시아는 중국과 인도를 잇는 아시아의 대국으로, 21세기판 'G7이 되어 있을 공산이 크다. 세계 4대 인구대국이자, 세계 3대 민주국가이며,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고, 아세안의 대표 국가이다. 무엇보다 '반둥'이라고 하는 시대정신과 상징자본을 담지하고 있는 소프트파워 강국이다. '적도의 대국' 인도네시아의 향로를 조망해볼 필요가 있겠다. 

 

30년 후 인도네시아가 아시아의 주역이 된다는 저자의 예언은 사실상 저자의 바램이 아닐까. 하지만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남아시아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는 저자 덕분에 나도 그 나라들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책을 통해 반둥회의를 처음 알게 되었다. 몇 개의 기사를 검색해서 읽었다. 70년 전에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라들이 모여 편나누기 하지 말자고 외쳤다. 냉전 시대가 끝난 지금도 어느 한쪽 편에 서라고 국제 사회는 강요하고 있다. 저자가 이 회의를 왜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지 알겠다. 사진은 당시 반둥 회의가 열렸던 장소이며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사진 출처 :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42887

 

 

4. 일대일로의 핵심, 파키스탄 과다르 항

 

일대일로는 중국이 서부로 진출하기 위해 제시한 국가 전략이다. 일대는 시안에서 시작해서 신장 위구루 자치구,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이란,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육상의 실크로드이고, 일로는 베이징에서 시작해서 말레이시아, 미얀마, 태국을 거쳐 인도, 파키스탄을 지나 아프리카를 찍고 유럽으로 들어가는 해상 실크로드이다. 

 

저자는 중국 신장에서 파키스탄의 과다르 항까지 도로, 철도, 송유관, 광케이블 등의 라인으로 연결하는 계획을 살피며, 일대일로에서 상당히 중요한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133p

경제회랑의 건설의 백미는 과다르 항이다. 과다르 항에 이르기 위해 3,000킬로미터의 연결망을 만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전략적 가치가 크다. 일단 과다르 - 신장의 송유관은 아프리카와 중동의 가스와 석유를 중국에 공급하는 바다의 지름길이 된다. 중국으로서는 믈라카 해협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는 현 상황을 해소할 수 있다. 비용은 절반으로, 시간은 3분의 1로 줄어든다. 철도와 도로 또한 중국과 중동을 잇는 내륙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중앙아시아를 잇는 축이기도 하다. 30억 인구의 시장 통합에 파키스탄이 핵심적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중국과 파키스탄이 협력하여 서로 성장을 돕는 관계가 되어 2030년대가 되면 중국과 파키스탄이 함께 번영할 것이라 했다. 아시아가 함께 번영한다면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과다르 항의 전경. 과다르는 파키스탄의 도시로 인도양에 접해있는 항구다. 중국은 일대일로의 기치 아래 많은 주변국들을 돕고 있지만, 중국의 계획대로 잘 되어가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과다르도 여기서 나오는 부의 많은 부분을 중국이 가져가고 있어서 "중국은 물러가라"는 외침이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는 기사가 꽤 보인다. 사진 출처 :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23/0003739270?sid=104

 

 

5. 실학자들의 나라, 싱가포르

 

싱가포르는 오랫동안 영국의 통치 하에 있었고, 2차 세계대전 당시는 일본이 점령했다. 전쟁이 끝나고 말레이시아 연방이 되었다가 1965년 독립한 나라다. 독립 이후 리콴유가 초대 총리로 시작해서 30년을 넘게 나라를 다스렸으며 그 아들 리셴룽이 20년 간 집권했다. 하지만 저자는 독재국가가 아니라고 했다(지금의 싱가포르를 보면 저자의 말이 맞는 듯 하다). 저자는 싱가포르의 특징으로 관료를 들었다. 최고의 엘리트를 만들고 그 엘리트가 관료가 되어 싱가포르를 발전시키는 것, 이것이 지금의 싱가포르를 있게 만든 핵심이라고. 

 

297p

키소어 마부바니 선생이 주장하는 것은 공공교통망의 향상에 그치지 않았다. 요는 행복지수를 높이자는 것이다. 더 이상 경제성장이 국가의 목표가 아닌 것이다. 행복 증진이야말로 국책의 으뜸이다. '행복의 나라로!'가 구호가 된다. 부국과 강병이라는 20세기형 전국시대의 생존술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성장에서 성숙으로, 발전에서 행복으로, 정치/경제에서 문화/생태로. 그래서 소국이라는 점이 도리어 장점이 된다. '소국주의'의 실험장이다. 

 

실학자들의 나라, 싱가포르. 멋진 제목이다. 오직 자국의 실리를 추구하는 것, 싱가포르와 어울린다. 

 

 

싱가포르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저 빌딩을 쌍용건설이 지었다는 것 뿐이다. 그 나라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알려고도 안했다. 책을 통해 싱가포르를 조금이라도 알게 되어 좋았다. 사진 출처 : https://www.etri.re.kr/webzine/20230421/sub05.html

 

 

6.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 카슈가르

 

저자는 중국의 신장에 대해 꽤 많은 페이지를 들여 썼다. 중국 6분의 1의 크기에 중국 최북단에 있고, 지형 또한 산맥과 사막으로 험한 곳이다. 하지만 이곳은 일대일로의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하고, 유라시아 서부 개발의 핵심 지역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국이 제대로 발전할 수 있는 열쇠는 신장이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는 느낌이 책을 읽으면서 강하게 들었다). 중요한 도시로 우루무치, 투루판, 그리고 카슈가르(중국명 카스)를 들었다.

 

459p

카슈가르의 역사 또한 '일一'과 '다多'의 복합적 관계망 속에서만 온전한 서술이 가능하다. 민족사나 국가사로는 도저히 담아낼 길이 없다. 중국사만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투르키스탄만의 역사도 아니다. 중화문명사로도 충분치 않고, 이슬람 세계사만으로도 족하지 않다. 오래전부터 줄곧 다문명 사회였다. 인도 문명, 이슬람 문명, 중화문명에 유럽 문명도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돌궐어와 위구르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한자와 러시아어와 영어로 남겨진 이곳의 문헌들이 다중적 역사, 다성적 역사의 가능성과 필연성을 합창으로 웅변한다 천지동서남북학, 즉 유라시아학이 아니고서는 카슈가르를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카슈가르는 신장의 맨 서쪽에 있다. 카슈가르에서 조금만 더 서쪽으로 가면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이 나오고, 아래로는 그 유명한 K2가 떡하니 버티고 있고, K2 너머에는 인도의 카슈미르 땅이다. 지리적으로 동서양의 문명과 남북의 문명이 모두 만나는 매혹적인 도시다. 저자의 글을 통해 그 매력에 흠뻑 빠졌다. 모든 문명이 섞인 카슈가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면서도 저자는 공존을 강조하고 강조했다.

 

 

카슈가르에 있는 아팍 호자의 영묘. 아팍 호자는 위구르의 종교 지도자이자 동투르키스탄을 다스렸던 강력한 군주였다. 사진 출처 : 위키백과

 

 

이럴 줄 알았다. 역사서에 가까운 여행기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얘 역사서다. 그것도 근현대사다. 책에서 다루는 나라는 태국, 중국, 우크라이나, 인도와 러시아 약간,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몽골, 라오스, 이란, 캄보디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그리고 중국이다. 저자는 따뜻한 시선과 희망을 담은 손길로 그가 본 것과 생각한 것, 여행을 하면서 나눈 대화를 책에 담았다. 

 

위에 인상적인 몇 개의 화제를 적었지만, 그 외에도 이채로운 내용들이 가득하다. 구이저우 성 룽창 양명정사에서 만난 유학자 장칭이 민주정치의 최대 병폐가 민의의 독재에 있다며, 왕도정치의 정치권력 원천은 천도天道(보편적 원리), 지도地道(역사와 문화), 그리고 인도人道(민의)에서 나온다는 주장도 흥미로왔다. 다니엘 벨이라는 학자가, 이장에서 주석까지 임명으로 선출하는 중국의 방식을 옹호하며 선거로 뽑는 서양의 방식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참신했다. 

 

여태 배우고 들은 건 역시 서구 중심이었다. 그래서 아시아를 중심으로 놓고 세계를 보는 저자의 스탠스가 낯설면서도 신선하다. 일대일로도 그렇다. 나쁘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문어발로 주변국들을 집어 삼키려는 이미지가 머리 속에 있었는데, 책에 나오는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대일로는 주변의 여러 아시아 나라들과 함께 유라시아 드림을 이루려는 중국의 큰 꿈이었다. 이렇게 매력적으로 묘사한 중국과 중국의 정책은 새롭게 보였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들도 풋풋하게 다가왔다. 이랬다고? 우리와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 걸. 외려 우리보다 나은 점들도 많았다. 심지어 러시아조차도 나쁜 말은 하나도 없었다. 중국과 러시아를 높게 평가하는 태도에 대해 처음에는 이게 맞나 싶다가 책을 다 읽을 때 쯤엔 어쩌면 내가 기존 언론과 미디어에 잠식되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저자가 꿈꾸는 유라시아 드림은, 유라시아가 어깨동무하고 함께 번영을 누리자는 것이다. 한중일이 사이좋게 지내고, 아시아 경제권이 뭉치고, 이슬람과 불교와 힌두교가 서로 존중하는 아시아,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엄청난 두께 때문에 일단 1권만 읽어보자고 집어들었지만, 이제 2권과 3권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