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이야기

일상의 고단함, 밥벌이의 숭고함 :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개락당 대표 2015. 10. 12. 08:41

 

 

일상의 고단함, 밥벌이의 숭고함 :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무참하다 :

 

(모습이나 결과가) 보기에 몹시 끔찍하고 참혹하다. - 다음 국어사전

 

 

 

누군가의 어떤 책에서 김훈의 글을 무참하다고 했습니다. 저 역시 눈보라가 치는 어떤 아득한 평원을 걷고 있는 느낌을 그의 글에서 받습니다. 때론 시리고, 살을 베는 듯이 날카롭고, 어딘지 모르게 막막하고.....

 

 

그래서 그의 글을 한 호흡으로 읽기가 쉽지 않습니다. 한 문장을 몇번을 끊어서 읽어야 됩니다. 한 호흡으로 읽기에는 글의 서늘함에 내 살이 베일 것만 같습니다.

 

 

제목 때문에 좀 일상적이고 말랑말랑한 문장을 기대하였지만, 역시나 김훈입니다. '라면'이라는 일상을 대표하는 음식을 주제로 일상의 진지함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인이 박이도록 먹어온 라면에 대해 작가만의 맛나게 끓이는 법도 책에 공개합니다. 작가는 그 조리법을 쓰고자 긴 서두를 적었다고 합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조리법은 부록입니다. ㅎㅎ)

 

 

그리고 글은 작가의 아버지에 대해 서술합니다. 시대를 앞서가는 지식인이었지만, 밥벌이에는 한없이 무능한 아버지, 결코 미워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그의 아버지에 대해, 작가 특유의 메마르고 절절한 어조로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아들아, 사내의 삶은 쉽지 않다. 돈과 밥의 두려움을 마땅히 알라. 돈과 밥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지 말고 주접을 떨지 말라. 사내의 삶이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것이다. 어려운 말 하지 않겠다. 쉬운 말을 비틀어서 어렵게 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그걸로 밥을 다 먹는 자들도 있는데, 그 또한 밥에 관한 일인지라 하는 수 없다. 다만 연민스러울 뿐이다. 사내의 한 생애가 무엇인고 하니, 일언이폐지해서, 돈을 벌어오는 것이다. 알겠느냐? - P 178 돈 1 중에서

 

 

 

딸아이가 공부를 마치고 취직해서 첫 월급을 받았다. 딸아이는 나에게 핸드폰을 사주었고 용돈이라며 15만원을 주었다. 첫 월급으로 사온 핸드폰을 나에게 내밀 때, 딸아이는 노동과 임금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고, 그 자랑스러움 속에는 풋것의 쑥쓰러움이 겹쳐 있었다. 그때 나는, 이 진부한 삶의 끝없는 순환에 안도하였다.

 

그 아이는 나처럼 힘들게, 오직 노동의 대가로서만 밥을 먹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 P 139 목숨 1 중에서

 

 

 

책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밥벌이의 고단함과 숭고함에 대한 글입니다. 위의 첫번째 인용글은 아내가 보면 무지 좋아할 문장입니다. 어떡하면 직장을 때려치울 수 있을까 매일 고민하는 남자와 사는 울 마눌님께서 저 글을 읽는다면 아마도 김훈 팬클럽 회장도 자처할 겁니다. ㅎㅎㅎ

 

 

저를 비롯한 많은 범인들은 꾸역꾸역 이어지는 진부한 일상에 날마다 좌절합니다. 그리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는, 그러나 매일 한치도 다름없이 반복되는 이 일상이야말로 진지하고 경건한 것이라고 합니다. 밥벌이의 숭고함이라고 합니다. 웬만한 내공으로는 발상조차 쉽지 않습니다. 경건하고 진지하게 보낸 진부한 일상이 행복이 되는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되는 건, 단순히 나이만 먹는다고 될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그 외에 세월호에서 인양된 어느 여고생이 지니고 있던 6만원의 의미와, 여자 그리고 고향에 대한 작가의 소고, 마지막에는 김지하 시인이 출소할 때, 시인의 피붙이로서 멀찍이 바라볼 수 밖에 없었던 박경리 작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 글에서 참고 참았던 가슴 저 밑에서 올라오는 울컥함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김훈의 산문은 한국 산문의 힘이라고도 합니다. 저는 김훈의 산문이 처음입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많이 접해본 사람은 산문이라도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소설도 스토리보다는 문장에서 더 큰 감동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책도 김훈 특유의 아득하고도 서늘한 문장이 차가운 바람이 되어 가슴을 때립니다. 김훈의 책은 삶의 중심에서 안정적으로 사는 이보다 가장자리에서 위태위태하게 사는 사람에게 더 진하게 다가옵니다.

 

 

 

나는 나와 이 세계에 얽힌 모든 관계를 혐오한다.

나는 그 관계의 윤리성과 필연성을 불신한다.

 

 

언젠가 읽었던 그의 소설 '공무도하' 맨 뒷편의 실린, 아직도 저의 가슴 한켠에 있는 말입니다. 저 글을 읽고 나는 김훈을 다 이해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너무나 절실하게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작가 김훈은 그런 사람이고 그의 글이 메마르고 아득하고 시리고 날카롭고 절절한 이유입니다.

 

 

 

 

PS.

여자 사랑하기를 좋하하는 작가의 바람둥이 친구는 "연애란 오직 살을 부비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아, 저렇게 간단한 것을 몰라서 이토록 헤매었다는 말인가 싶었다. - P 276 몸 중에서

 

 

그렇습니다. 연애란 오직 살을 부비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