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로맨티스트 : 이원규의 조봉암 평전, 잃어버린 진보의 꿈
시대의 로맨티스트 : 이원규의 조봉암 평전, 잃어버린 진보의 꿈
허영만의 <오 한강>이라는 만화가 있습니다. 그래도 만화 좀 봤다고, 만화에 대해서 좀 안다고 자부하는데, 나에게 영향을 크게 끼친 만화 세 손꾸락 안에 들어가는, 4권 뿐이 안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엄청난 만화입니다. 만화는 87년도부터 연재가 되었고, 제가 읽은 건 90년대 초반쯤이라 생각됩니다. 이 책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여기에 꼭 적으리라 맘 먹고 있습니다.
암튼, 죽산 조봉암 선생을 알게 된 처음의 책이 바로 이 <오 한강>입니다. 이 글을 적으려고 잠깐 책을 찾아 봤는데, 조봉암 선생은 <오 한강>에서 상당한 비중으로 나오는 군요.... 강토 아들 녀석의 이름을, 밝은 석晳자, "석주"라고 지어준 그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합니다. 우리 큰 아들 이름도 석晳자를 써서 김 석이라고 지으려고 했다는.....ㅎㅎ
이 글을 쓰려고, 먼지 앉은 책을 다시 한번 정독했다. 근 10년만에 읽지만 역시!!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 책을 구하려고 여기 저기 뛰어다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산이에게 권해주고 싶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다. 고등학교쯤 들어가면 꼭 보게 할 셈이다. 마무리가 너무 서둘러 끝내버려서 아주 아쉽지만, 내게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거의 처음으로 실감나게 느끼게 해준 책이다.
이 책에서 죽산 선생은 아주 비중있게 나온다. 마지막 가시는 장면도.....
"나는 비록 법 앞에 죽음의 몸이 되었다고 해도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은 스스로 의심할 수 없다는 걸 밝힙니다. 과거의 우리 동지들은 현실의 포로가 되지 말고 우리의 이념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2011년 대법원은 죽산 선생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립니다. 무려 52년만에요!!! 생각하는 바가, 이루고자 하는 바가 다르다고 사람을 사형을 시켰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평등하게 잘 살고, 평화적으로 통일을 이루자..... 죽산 선생이 말하고자 했던 바입니다. 머 이게 죽을 일이냐!! 이승마니... 이 나쁜 시키!!! 그리고 그 복원에도 반백년이 걸렸습니다. 그나마 이제서라도 복원이 되어 다행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따님도 이제는 팔순이 넘어셨는데......
이제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떳떳하게 볼 수 있겠구나.... 무죄 판결을 받고 난 뒤의 죽산 선생의 따님이신 조호정 여사.
강화도 촌구석의 면 급사인 조봉암이 어떻게 독립운동의 거두가 되고, 이승만을 위협할 만큼의 정치인이 되고, 시대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는 역사의 인물이 되었을까요..... 시작은 3.1운동입니다. 이 일로 인해 옥살이를 하고, 뜻 있는 친구를 만나고, 그 친구들의 권유로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고, 또 더 많은 큰 인물들을 만나고, 그래서 자신도 점점 큰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 시대의 대부분의 지식인이 그러하듯, 처음에는 아나키스트로, 그리고 공산주의에 빠져듭니다. 그 체제가 우리나라가 따라야 하는 가장 좋은 체제로 보았던 것입니다. 1924년에는 조선 공산당을 만듭니다. 그 때 박헌영과 김단야 등과도 절친이 됩니다. 해방 이후에는 전향을 하게 됩니다. 공산당 측에서는 변절자라고 놀리고.... 젊은 시절, 독립을 위해 같이 싸웠던 동료로 부터 비난 받게 되는 그 시절이 가장 힘든 시절이었을 겁니다. <오 한강>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산에 오르는 길은 여러가지다. 가파른 길, 힘든 길, 평탄한 길..... 산에 오르기 위해 여러가지 길을 찾았었다. 처음 그 산의 이름은 독립이었고, 오르다 보니 통일로 산 이름이 바뀌었다.
어쩌면 너무 앞서 나갔는지 모릅니다. 이승만의 광기와 타락이 절정에 달했을 시절에, 점진적인 평화통일을 주장하고,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했으니.... 그런 선생의 의지와 이념은 선생이 죽음을 피하지 않고 그것또한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고 받아들여, 순교함으로서 더욱 돋보이고 강조됩니다. 죽산 조봉암 선생은, 그래서 읽는 나에게는 시대의 로맨티스트였습니다.
선생은 김이옥이라는 동네에서 젤 신분이 높고 젤 이쁜 처녀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여자의 오빠의 반대로 헤어집니다. 그 후 공산당 일을 할 때 만난 동지 김조이 여사와 사랑하게 되고 결혼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김조이 여사가 러시아에 휴학간 시절, 폐병에 걸려 내일을 기약하지 못하는 첫사랑 김이옥이 찾아옵니다. 그의 위신과 명성, 그리고 혁명을 버리고 한 여자의 사랑을 택합니다.
그 후 김이옥이 죽고 다시 김조이 여사와 합치고 살다가, 비서인 윤봉림의 구애를 받아들이고, 정치의 거물이 되어서는 어느 요정 송마담의 사랑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여자에 대해 관대한 시절이였고, 또 삐딱하게 보면 바람둥이이만, 오히려 인간에 대한 순수성이 더 돋보여서 좋았고 그런 정열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더 로맨티스트로 보이는지도.....
1939년 7년간의 수감 생활 끝에 석방된 조봉암은 첫 아내인 김조이 여사와 다시 합치고 처가인 창원을 방문했다. 뒷줄 오른쪽이 김조이와 조봉암 부부, 뒷줄 왼쪽 끝이 처남 김영순 선생이고 앞줄의 검은 옷을 입은 소녀가 김이옥 사이에서 태어난 큰 딸 조호정이다. 김조이 여사는 아들 규호 및 임정, 의정씨를 낳았다.
김조이(1904~1950?)는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에서 유학 생활 중 3.1운동을 맞이했으며 이후 죽산을 만나 조선공산당의 열혈 운동원이 된다. 모스크바 동방노동자 공산대학에서 2년간 공부한 뒤 국내로 들어와 1925년 '경성녀자청년동맹'을 결성하여 여성해방 운동과 독립운동을 주도하며, 당시 <신여성>의 편집장인 허정숙, 박헌영의 부인 주세죽과 함께 경성의 여성 운동을 이끄는 중심 인물로 부상한다. 그 해 12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터지자 조봉암과 함께 만주로 피신한다. 1932년 국제공산당의 명령으로 국내에 들어와 함흥을 중심으로 '조선노동좌익'을 재결성하는 작업에 나섰고 그 이유로 1934년 체포되어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죽산과 다시 살림을 차려 남편을 내조했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김일성이 김조이를 처형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나무위키에 나온다)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인 김조이는 그렇게 비운의 역사 속에 묻혀져 있다 2008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사진 출처 : http://m.blog.daum.net/keiti/16529521
농림부 장관으로 토지개혁을 주도하고, 진보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에게 맞장 뜰만큼 (그래서 결국 이승만에게 죽임을 당하지만) 큰 인물이지만, 저에게는 독립운동가 조봉암이 훨씬 더 가치있게 다가왔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몽양 여운형 선생이나, 박헌영, 김단야, 김원봉 같은 인물들은 누구 못지 않은 독립운동가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 사상때문에 역사에서는 평가가 높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긴 아직도 종북좌파라는 말이 너무나도 널리 쓰이는 현재 지금입니다. 언제쯤 그 분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까요....그런 점들이 너무 아쉽습니다.
600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이틀만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위인 전기라 생각해서 재미없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어느 드라마 못지 않게 재미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