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씨가 독방에 갔다 내 그럴 줄 알았다 : 강만길 <20세기 우리 역사>
계엄령 발표 이후 온 나라의 관심은 대통령 탄핵이었다. 결국 오늘 대통령은 체포되었다. 이제 대통령은 햇볕을 보는 일이 없을 것이다. 곧 구속이 되고, 파면이 되고, 감옥에 갈 것이다.
돌이켜보면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 국회의원들이 그렇게 빨리 계엄 해제를 하지 않았다면, 시민들이 국회로 모이지 않았다면, 양심 있는 군인이 없었다면, 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런 멍청한 인간들로부터 위협 받을 정도로 얇았던가? 아니면 이렇게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들의 힘이 대단한가? 물론 후자긴 하지만 그래도 반성할 여지는 충분하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우리 시민들이 힘겹게 쌓아올린 이 민주주의를 무자비하게 밀어버릴 시도를 했던 주도자를 철저하게 심판해야 한다. 다시는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흐지부지 되어선 결코 안된다. 두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이다.
나라가 빨리 안정되었으면 좋겠다. 얼른 파면되고, 새 대통령도 뽑고, 그래서 지금 나라 다스린다고 장관 차관 기타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인간 같지 않은 넘들 싹 물갈이하고, 그러면 국민들이 서로 싸우는 일도 줄고, 그래서 나라살림, 내 살림살이도 나아졌으면 좋겠다.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책에 눈길이 갔다. 읽었으니 거기 있었을텐데. 스윽 하고 보는데, 김해의 독립운동가 강영갑 선생을 공부하면서 나온 적색농조사건에 대해 자세히 나와있었다. 적색 노동조합운동과 더불어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한 노동자 농민 운동이었다. 기득권이 일본인들이었으니 반일운동기도 했다.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9년에 처음 발행되으니 오래된 책이나 그 내용은 주옥 그 자체다. 일제강점기에서부터 문민정권까지의 우리 현대사다.
1. 일본은 근대화로 부국강병을 했는데 우리는 왜 못했나?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 우리는 지도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쇄국정책을 해서 그리되었다가 정답일텐데, 강만길 교수는 거기에 더하여 정조가 갑자기 죽음으로서 진보 사상가였던 실학자들이 대부분 숙청을 당했고, 이후 세도정권으로 진보 세력이 씨가 말라서 그렇다고 했다. 그래서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할 정도로 당시 지식인의 의식이 성장하지 않았다는 것도 주요 이유라고 했다. 음, 긴 흐름으로 보는 눈이 다르시다.
2. 일제강점기, 우리는 왜 더 먹고 살기 힘들었나?
당시 국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한 이유는 땅 뺏을라고 그랬다. 그래서 일본 지주들이 늘어났다. 1916년 자작농과 자소작농이 61%, 소작농이 37%, 지주 2%에서 1932년은 자작농과 자소작농이 43%, 소작농은 54%, 지주 4%였다. 농업부르즈와지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중간층은 감소하고 지주와 소작농은 늘었다. 당연히 농민들은 점점 어려워졌다.
3. 조선공산당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일환이다?
여러 책에서 1920년 이후의 국내 항일 운동은 거의 공산당이 했다는 사실을 배웠다. 조선공산당이 분열한 이유도 코민테른이 공산당 한 곳에만 자금을 줘서 그런 것도 배웠다. 이 책에서도 분명하게 공산당운동이 독립운동이라고 했다. 조선공산당의 한계로 '12월 테제' 즉 인테리 중심에서 노동자 농민 중심으로 당을 재조직하라는 내용도 나온다. 이 12월 테제의 결과가 적색노동조합과 적색농민조합운동이다. 하지만 4차 당 해체 이후 일본의 집요한 공산당 탄압으로 해방 후에야 조선공산당은 재건된다.
4. 1930년대 가장 큰 민족해방운동은?
정답은 적색 노동조합운동과 적색 농민조합운동이다. 김해의 강영갑 선생이 농민들을 모으고 계몽하고 농민조직을 확대하고, 그리하여 소작쟁의를 지도한 것도 모두 이 운동의 일환이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이들은 모두 사회주의자였다. 당시 지식인은 거의 사회주의자였다고 보면 된다.
5. 해방 후 통일민족국가 수립은 왜 실패했나?
한반도의 거취 문제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되었다. '한반도 너희들은 아직 여러가지로 힘이 없으니, 우리가 5년간 봐줄게. 그러고 나서 너희들의 나라를 세워라.' 라 최종 결정이었다. 당시 지식인 대부분은 좌익이었고, 좌익들의 생각은 우리가 대세니 신탁통치 5년 동안 잘 정리해서 사회주의 나라를 세우면 되겠다 싶어 이 결정을 찬성했다. 김구 중심의 임시정부 세력은 임시정부를 즉시 승인하고 임정이 바로 나라를 통치하도록 요구하면서 이 결정에 반대했다.
김구 선생님. 이러면 나라가 반쪽 난다구요. 그랬다. 우리가 하는 꼴을 보고 미국과 소련은 그럼 아래쪽은 반탁, 위쪽은 찬탁으로 나누면 되겠네 했다. 이때 이승만은 좋다 했다. 썩을 넘. 김구 선생은 나라가 반으로 쪼개지는 건 절대 안된다고 반대하며 김규식과 함께 김일성 김두봉을 만났으나 이미 늦었다.
당시 지도자들이 마음을 모아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따랐다면 분단 없이 통일된 정부가 수립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러면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도 없었겠지. 당시 많은 지식인과 국민들이 사회주의에 우호적인 것을 감안하면 통일된 정부는 좌익 정부가 되지 않았을까? 당시로서는 이게 최선의 결과이지 않을까.
6. 여운형 김규식을 높게 평가해야 할 이유는?
해방 이후 통일조국을 위한 지식인들의 노력은 분명히 있었다. 해방이 되자 여운형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임시정부와 합작의 노력을 기울였다. 잘 안됐다. 안되면 다시 해야지. 좌익 대표 여운형과 우익 대표 김규식이 좌우합작위원회를 만들어서 통일된 조국을 만들려고 했다. 김구 선생도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하다 나라가 쪼개질 것 같아 여기에 합류한다. 여운형과 김구는 암살되었고, 김규식은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여운형과 김규식의 이런 노력은 재대로 평가 받아 마땅하나 실제 그렇지 못하다. 김구 선생과 버금갈 정도, 아니 더 높게 평가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7. 일본이 가지고 있었던 땅과 재산은 다 어찌했나?
미군정과 이승만은 일본이 가지고 있던 '적산'을 다 귀속했다. 당연하다. 다 뺏어야지. 근데, 그걸 다 사유화했다. 대부분 일본인 소유자와 밀착했던 관리자의 소유, 그리고 친일세력에게 헐값으로 팔았다. 역사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승만은 나쁜 넘이다.
8. 6.25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이승만은 권력은 잡았지만, 좌익 세력은 물론이고 김구 김규식 등의 우익 세력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정통성이 일도 없었다. 좌익은 좌익대로 4.3 항쟁, 여수군란 등을 일으켰고, 우익도 우익대로 이승만에게 반기를 들었다. 한마디로 시궁창이었다. 하지만 북쪽은 제대로 된 나라였다. 친일 청산도 깨끗이 하고 농업 공업 생산이 급속도로 발전했다. 북에서 보기엔 지금 밀고 가면 금방 통일조국이 될 것 같았고 그게 사실이었다. 해방 공간을 목전에 두고 미국이 들어왔고, 전세는 완전 바뀌어 남쪽이 해방 공간을 목전에 두었으나 중국이 참전했다. 3년 동안 엄청난 상처만 남기고 원상 복귀. 결론은 한쪽이 무력으로 통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위의 큰 나라들이 그렇게 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9.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은 박정희 덕인가?
대기업 중심의 수출 지향 정책은 농촌을 파괴하였고 내수 공업을 약화시켰으며 중소기업을 희생시켰다. 천민자본주의가 일반화되었고, 정경유착의 악습이 누적되었다. 1990년대로 오면서 그 폐단과 허점이 한꺼번에 드러나 IMF가 왔다. 결코 박정희가 잘해서가 아니다. 일제 지배에 대항하면서 길러진 민족적 결속력과 투쟁력, 국민들의 사회 발전 의지, 근면함 등의 결과이다. 박정희 때문에 민주주의는 더 후퇴했다. 좀 더 천천히 발전하더라도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 민주주의를 병행하는 것이 더 바람직했다라고 교수님은 말씀하셨다.
어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역사 이야기다. 궁금하던 역사의 부분들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설명에 덧붙여 교수님의 생각도 곁들여셨다. 참 된 역사 교과서다. 이런 책으로 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친다면 얼마나 멋질까. 곧 그런 날이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