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이야기

관식이와 애순이, 윤이상과 이수자 : 윤이상 <여보, 나의 마누라, 나의 애인>

개락당 대표 2025. 4. 8. 21:01

 

엄마는 아빠가 절대적으로 내 편인 것 같지.

아니야.

엄마랑 나랑 붙잖아, 

아빠 100% 엄마 편이야.

내가 1번이면 엄마는 0번, 0번.

아빠한테 엄마는 절대 반지라고 본다.

건들면 죽어.

 

 

딸의 유학비를 위해 집을 정리하는 관식과 애순. 그래도 그들은 즐겁다. 사진 출처 : https://mobile.newsis.com/view/NISX20250324_0003109963#_PA

 

 

관식이에겐 애지중지 키운 딸 금명이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애순이다. 나이가 들어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래, 그렇지, 그래야지. 딸이 아무리 예뻐도 마누라 다음이지. 하지만 현실 세계에선 다르다. 신혼 혹은 아이가 자랄 땐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이 다 커서도 아내가 0순위인 남편이 몇이나 될까. 

 

넷플릭스 드라마는 잘 안보는 편인데, 요즘 <폭싹 속았수다>를 안보면 사람들이랑 대화가 되질 않아 나도 봤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었다. 애순이와 관식이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나와 나의 아내, 우리 엄마와 아부지, 그리고 우리 새끼들인 산, 들, 강이까지의 그 순간순간을 끄집어내게 했다.

 

돌이켜보면 나도 처음이었다. 애순이가 말하는 그 처음을 나도 겪었다. 자식도 부모도 모두 처음을 겪고, 이제 부모의 병듦과 죽어감, 그리고 아내와 자식들의 떠나감을 겪고 있다. 처음 맞이하는 떠나감이 아프고 서투르다. 지금부터는 든 사람보다 난 사람이 많은 생을 겪을 텐데, 그게 섧다.

 

관식이와 애순이의 일생을 들여다봤다. 그들은 통해 사랑의 중요성과 가족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봤다. 나의 아내가, 우리 엄마 아버지가, 나의 자식이 나에게 주는 기쁨을 돌이켜봤다. 삶에서 이걸 가장 우선 순위에 두는 것이 얼마가 가치가 있는 일인가를 일깨워주었다. 이것만 잘하면 훌륭한 삶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관식이와 애순이는 더할 나위 없이 최고의 인생을 산 것이다.  

 

서두가 길어지긴 했는데, 나이가 들어도 아내가 가장 소중한 이야기가 여기 또 있다. 작곡가 윤이상은 나이 40이 되던 1956년에 프랑스에 유학을 간다. 이 때부터 아내에게 편지를 쓴다. 이 편지는 독일로 옮겨 공부할 때도 계속 되었으며 1961년 아내 이수자가 독일로 와서 함께 살 때까지 이어진다. 그 편지를 갈무리하여 만든 책이 바로 이 책이다. 

 

 

 

 

1956년 6월 3일

 

여보! 내 사랑하는 당신에게 내 평생의 중대한 첫 여행의 하룻밤을 지낸 후 첫 번의 편지를 보내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 모르오. 어저께는 네 시 가까이 여의도를 떠나 맑고 아름다운 조국의 하늘을 비상하다가 동해로 접어들면서부터 시야에는 구름이 끼기 시작하더니 대마도도 보지 못하고 큐슈나 일본의 본토도 구름에 덮인 채였소. (13쪽)

 

1956년 7월 13일

 

나는 이렇게 꼬박꼬박 일주일에 한 번식 편지 거르지 않고 내는데 당신의 편지는 왜 오지 않소. 나를 이렇게 기다리게 하고. 지금은 10시 45분, 오늘은 자고 내일 더 써서 항공으로 날리리다. 내일 아침 당신의 편지가 날아오기를 고대하며. (20쪽)

 

1956년 9월 2일

 

훌륭한 문장은 절대로 과장하는 데 있지 않소. 마음의 알맹이를 그대로 생생하게 기록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남의 가슴을 찌른다오. 추상적인 문구의 되풀이는 오히려 흥미를 깨뜨리는 법이니까. (30쪽)

 

1957년 5월 1일

 

나는 어저께 헤이그의 이준 열사의 묘지에서 몇 시간을 지냈소. 이준 열사의 묘는 너무 초라했고. 3등 묘지에 시멘트로 조그맣게 세운 묘석, 그러나 누가 갖다 놨는지 꽃이 몇 포기가 아직 시들지 않고 있으며 묘석의 주위에는 이름 모를 노랑꽃들이 그의 조국애의 영원한 애수를 위로하듯 둘러싸고 있었소. 이 북구의 땅 공동묘지에서 이름 모를 죽은 풀과 머리 맞대고 나란히 누운 이 영세의 애국자의 고혼은 그의 비원이 이루지 못했음에 또한 그의 혼조차 돌아가지 못하고 이국의 하늘 아래 이슬을 받고 천추를 호흡하는 것이오. 

 

나는 그 묘석 앞에서 눈물지는 수 시간을, 모든 인생사의 헛됨을 다시금 느끼고,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무력함을 깨달을 때 한없이 외로움을 느꼈소. (73쪽)

 

1958년 2월 17일

 

여보! 나의 애인, 내가 당신의 사랑에 목말라 이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그때에는 당신의 품에 돌아갈 것이오. 나의 마누라 내가 당신의 평생의 반려자가 된 운명을 늘 감사히 생각하며 우주가 열 번, 백 번 바뀔 때까지 그 뒤 몇 백 번을 바뀌어도 당신의 남편 되기를 원하는 당신의 낭군이 뜨거운 뽀뽀와 축복을 보내오. (122쪽)

 

1958년 4월 26일

 

나는 당신을 생각할 때 저 먼 바다의 등대를 바라보는 것과 같소. 자나깨나 내 눈에 비치는 이 우뚝 솟은 등대의 불빛이 둘, 셋. 이것이 나의 고향이요, 나의 조국이요, 나의 예술이요, 나의 철학이오. (125쪽)

 

1958년 8월 17일

 

한국인들은 유럽에서 조국에 대한 자존심을 세울 길이 없다가 한국 작곡가의 작품이 그 많은 대중에게 감동을 주는 것을 보고 큰 자부심을 느꼈나 보오. 그들이 같은 동포로서의 즐거움에 넘쳐흐르는 걸 보며 나의 마음은 한없이 즐거웠소. 나는 오늘까지도 만나는 사람에게서 수없는 찬사의 말을 듣소. (147쪽)

 

1959년 9월 6일

 

나와 같이 옆에 앉았던 백남준 군은 '한국에서 태어난 작곡가가 세계적인 이 무대에서 음악의 본바탕의 작곡가들을 물리치고 당당히 승리했다. 뜨거운 민족애의 감동을 받는다.'고 했소. 조금도 시기하는 기색이 없는 것이 참 기특하게 생각되었소. (228쪽)

 

1960년 4월 22일

 

나는 19일 라디오에서 그 사건(419) 발생의 보도를 듣고 난 즉시 나의 상상을, 서울의 거리거리 피에 묻혀 뒹군 새빨간 청년 학생들을 생각하고 수없이 총알 앞에 쓰러지는 귀한 한국의 아들들의 국가애를 생각하며 펑펑 울었소. 조국의 명줄기는 축지 않고 살아 있으며 청년들의 가슴 속에는 아직도 정열이 남아 있었던가를 생각하고 고맙고 그들에게 미안하고, 흘리는 피가 아깝고 해서 나는 오랫동안 소리 내고 울었소. (266쪽)

 

1961년 8월 1일

 

이곳은 조금도 여름 같은 여름이 없이 가을을 맞으니 당신은 여름에 대해 조금도 공포증 갖지 말 것, 지금은 한국의 3월 말 같은 싸늘한 날씨이오. 당신이 여기 와도 한국의 4월 같은 일기도 맛보지 못하고 가을을 맞을 것이오. 8월동안에는 많이날이 나쁘겠다고 하고 9월 달에는조금 더웁겠다고 천기예보가 알리고 있지만.....

 

그럼 당신의 준비가 빨리 진행되기를 빌며,

안녕, 나의 예쁜 마누라. (314쪽)

 

 

윤이상 선생과 이수자 여사, 그리고 정, 우경 남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https://www.khan.co.kr/article/201806160600065

 

 

그저 편지만 따라가봤을 뿐인데 윤이상 선생이 어떻게 윤이상 선생이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선생이 가지고 있던 음악에 관한 생각과 노력, 그리고 조국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어떠했는지 구구절절히 그 편지에 나와있었다.

 

이수자 여사가 독일에 온 이후의 행적들에 대해서도 살펴봤다.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일, 독일 정부와 세계 음악가들의 대대적인 구명 노력, 독일로 귀화, 북한에서의 음악 활동, 그토록 그리워하던 조국에 결국 오지 못하고 타계, 문재인 정부의 유해 봉환 등, 글자 그대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애순이 있어서 관식이 되었듯, 윤이상 선생의 성공한 삶의 절대적인 지분이 이수자 여사에게 있었다. 5년 간의 유학생활 동안 선생을 지탱해준 태양이자 우주가 이수자 여사였다. 아내에 보내는 닭살 멘트의 글처럼 음악도 그렇게 사랑스럽지 않을까. 음악으로 성공한 것도 자랑스럽지만 이수자 여사에게 남편으로도 성공했다. 그게 더 멋지다. 

 

최고의 인생은 사는 것은 관식이와 애순이, 윤이상 선생과 이수자 여사에서 보듯 의외로 단순하다. 하지만 그게 어렵다. 그게 어려우니 이렇게 사람들이 열광하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