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을 거의 완전연소한 이들의 부고 : 최윤필의 가만한 당신
생을 거의 완전연소한 이들의 부고 : 최윤필의 가만한 당신
그들이 왜 끌렸는지 한두 마디로 설명하긴 힘들다. 굳이 말하자면, 차별과 억압과 무지와 위선에 맞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가치와 권리를 쟁취하고자 우리 대신 우리보다 앞서 싸워준 이들이라고 하겠다. 글을 깊이 읽은 내 친구는 그들을 "생을 거의 완전연소한" 이들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글보다 먼저 사진 속 표정과 미소와 주름살들을 먼저 '영접'하곤 했다고 말했다. 나는 낯선 그들에게 알게 모르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책머리글 중에서)
가만한 :
[형용사]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차분한
예문 : 아내는 나에게 소리 없이 가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말?)
한국일보 기자인 저자가, 숭고한 가치를 위해 헌신했지만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외국인 35명의 부고 기사를 책으로 묶었습니다. 그리고 제목을 <가만한 당신>으로 붙였습니다.
<가만한 당신>의 사전적인 뜻은 위와 같습니다. 제목이 무척 훌륭합니다.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고 차분한 이들의 이야기라 책에 나온 사람들은 한번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드러나진 않았지만 알았더라면 더 좋을 사람들, 가만한 당신이지만 삶을 완전연소한 사람들, 진짜 세상을 이끌고 바꾸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저자는 조근조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1. 콩고의 마마 : 레베카 마시카 카추바
전쟁 속에서 끌어안은 인간의 존엄
2. 삶이라는 행운 : 홀브룩 콜트
의사이자 환자로서 혈우병을 치료하다
3. 작은 거인 : 스텔라 영
장애 편견과 고통 앞에서 춤추다
4. 비행하는 인간 : 딘 포트
육체의 해방을 꿈꾼 익스트리머
5. 모성이라는 환상 : 바버라 아온드
어머니는 아이를 미워하고 사랑한다
6. 자살연구자 : 노먼 파버로
죽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예방한다
7. 사랑의 합법성 : 니키 콰스니
동성혼의 법제화를 위하여
8. 사회를 치료하는 경제학 : 우자와 히로후미
안정된 진로를 벗어나 학문의 의미를 찾다
강간의 왕국 콩고에서 참혹한 전쟁으로 남편과 자식을 잃고 자신도 강간의 피해자였다. 그런 현실에 쓰러지지 않고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인들과 어린 아이를 거두고 돌보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마마 마시카라 불렀다. 우리나라 위안부 할머니들이 세계 전쟁 피해 여성을 도우려고 만든 나비 기금의 1호 수혜자이기도 하다.
사진 출처 : http://slowalk.tistory.com/1251
9. 잘려나간 장미 : 에푸아 도케누
여성 할례 금지 운동의 시작
10. 탐욕스러운 환경운동가 : 더글러스 톰킨스
노스페이스의 창업자, 국가에 공원을 기증하다
11 거인 같은 여성상 : 메리 도일 키프
전쟁으로 시작된 여성해방의 상징
12. 잊을 수 없는 기억 ; 로저 보이스졸리, 로버트 이블링
챌린저 참사의 비극을 밝히다
13. 자위 해방 ; 델 윌리엄스
여성 오르가즘으로 세계를 구하다
14. 색깔 없는 인권 : 존 마이클 도어
1960년대 흑인 인권 투쟁 현장을 누비며
15. 실수로 갇힌 인간 : 글렌 포드
무고한 삶을 오판할 때 벌어지는 일들
16. 생존자에서 조력자로 : 데니즈 마셜
폭력 피해 여성 구제를 위하여
나는 오르가즘을 경험한 여성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 살아왔다. 성적으로 억압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억압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억압당하지 않은 여성은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다. (p.129)
여성의 성적 해방이 세상을 훨씬 평화롭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 델 윌리엄스. 진정으로 옳은 말이다.
사진 출처 : https://www.hankookilbo.com/v_print.aspx?id=54dc87f2cb474b69a721b37099b6578b
17. 순간을 사는 존재 : 제럴드 라루
이단자라는 오명 속에서 존엄사 합법화에 나서다
18. 젠더 혁명 : 로절린 벅샌덜
관습에 맞선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19. 벤치의 익살꾼 : 에버렛 라마 브리지스
즐기는 사람이 이기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20. 군대 민주화 운동 : 앤드루 딘 스태프
부당한 명령과 처우 개선, 반전 운동에 힘써
21. 도둑맞은 행복 : 도리스 필킹턴 가리마라
수용소에서 1600킬로미터를 걸어 가족 품으로
22. 등불을 켜는 자 : 로버트 루시
경찰 내부고발자로 산다는 것
23. 미국의 감시자 : 델머 버그
스페인내전 참전 병사가 본 세계 정치
24. 죽을 권리 : 데비 퍼디
궁극의 자유를 찾아서
호주에는 국가 사과의 날이 있다. 호주 정부가 과거 원주민들에게 범했던 야만적인 일들을 사과하고 이를 잊지 않겠다는 취지이다. 원주민 작가 도리스 필킹턴 가리마라는 자신의 상처를 극적으로 증언함으로서 호주의 국가적 양심이 의미 있는 한 걸음을 내딛게 했다. <토끼 울타리>의 저자이자 백인 수용시설을 탈출하여 장장 1000마일을 걸어 가족 품으로 돌아온 <토끼 울타리>의 실제 주인공 몰리 켈리의 장녀다.
사진 출처 : http://www.hankookilbo.com/m/v/84647be544e0462596b3032c55eeeaf6
25. 진실 없는 사실 : 윌리엄 그린
특종에 취한 언론을 낱낱이 까발리다
26. 자유의 풀잎 : 마이클 존 케네디
마리화나 합법화를 위한 잡지를 발행하다
27. 표현의 자유 : 앨버트 모리스 벤디크
미국 수정헌법 제1조의 변호사
28. 따뜻한 심장의 과학자 : 요세프 랑에
HIV 환자는 실험 대상이 아닌 파트너
29. 일상의 투쟁 : 파테마 메르니시
이슬람 페미니즘의 터전을 마련하다
30. 폭동이 아닌 봉기 : 앨빈 브론스타인
수형자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한다
31. 분노의 소리 : 하요 마이어
아우슈비츠 생존자로서 나치즘과 시오니즘 비판
32. 감시받지 않을 권리 : 카스파 보든
보편 인권으로서의 프라이버시
33. 무기로 쌓아올린 평화 : 루스 레거 시버드
세계적인 군비 경쟁을 폭로하다
34. 진실을 말하는 뼈 : 클리이드 콜린스 스노
유골 분석으로 법인류학을 실현하다
35. 선택과 권리 : 엘리자베스 리비 윌슨
삶에 대한 결정권은 본인에게 있어야 한다
최윤필
1967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이성애자 사내아이로 태어나 진주고등학교를 거쳐 1985년 학력고사로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 방위병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1992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여컨대 나는 국적, 지역, 성, 젠더, 학력 차별의 양지에 살았다.
편집부, 사회부, 경제부, 문화부, 기획취재부 등을 거텨 지금은 <한국일보> 선임기자로 일하며, 매주 약 원고지 60매 분량의 글을 쓴다. 누릴 것 다 누리고 이렇다 하게 한 일도 없다는 자각에 머뭇거려질 때가 많지만, 그건 시민으로서나 기자로서 치명적인 문제지만, 나는 노력중이다. (책 표지에 실린 저자 소개글이 왠지 끌린다.)
사진 출처 : 출판사 마음산책 홈페이지
그들이 바꾸고자 했던 것은 우리가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 위한 조건들이었습니다. 페미니즘, 장애인의 인권, 존엄사에 대한 권리, 환경 문제, 인종 차별, 언론의 자유,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자유 등....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그리고 자신과 같은 이들을 위해,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해 자신의 생을 완전연소하였습니다.
오늘 그들을 읽지만 내일이면 그들의 이름은 기억속에서 사라져 갈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35명의 인물들을 일일이 적어봤습니다. 다음에 그 이름들을 다시 한번 펼쳐보려고. 그럼에도 잊혀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오늘 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