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강렬하고 묵직하고 매혹적인 역사 소설 : 정찬 <발 없는 새>
90p
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이 새는 나는 것 이외는 알지 못해. 날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딱 한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바로 죽을 때지.
책의 화자(나)는 베이징 특파원입니다. 어느 날 본사의 부장에게서 전화가 와서 대뜸 영화 <패왕별희>를 보았냐고 묻습니다. '나'는 네 번 정도 보았다고 대답하며 왜 그러느냐고 하니, <패왕별희>에 나온 장궈룽(장국영)이 자살을 했다며 취재를 맏깁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합니다.
워이커씽은 베이징에서 만난 '나'의 친구로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노인입니다. 하지만 이 노인은 장궈룽, 첸카이거 뿐만 아니라 경극 <패왕별희>에서 우희를 연기한 대배우 메이란팡(매란방)와 친분이 있고, 문화 전반에 조예가 깊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워이커씽이 난징대학살과도 깊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이리스 장은 난징대학살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리려는 열의를 가진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이자 작가인데 워이커씽은 그를 적극적으로 돕습니다. 수 년 간의 노력 끝에 아이리스 장은 난징 학살을 다룬 논픽션 <The Rape of Nanking(난징의 강간)>을 펴냅니다. '나'도 이 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고모할머니가 난징대학살을 피해자였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이리스 장에게 인터뷰를 요청하여 그와 긴 대화를 나눕니다. 도대체 왜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요.
소설 속에는 실존 인물인 장궈룽, 첸카이거, 메이란팡, 아이리스 장, 최승희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허구의 인물인 워이커씽을 비롯하여 일본인 아오키, 그리고 '나'가 실존의 인물과 뒤섞입니다. 배경으로 등장하는 사건도 만만치 않습니다. 히로시마 원폭, 일본군 위안부, 홍위병들이 무법을 구사하던 문화대혁명, 그리고 난징대학살 등 역사에 굵직한 사건들이 허구의 배경과 얽혀 사실감이 폭발합니다.
책의 주요 배경은 난징대학살입니다. 하이라이트는 이 사건에 대하여 워이커씽과 아이리스 장이 나누는 대화입니다. 역사의 비극적 사건들은 그 피해자들의 이야기에서 보통은 끝납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라고 물으며 악의 근원에 도달하려 합니다.
워이커씽은 <금각사>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을 거론하며, 전쟁에서 일본 군인들이 죽음을 불사하는 건 죽어서 신의 지위로 올라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야스쿠니 신사는 전사자들을 추도하는 일반적인 공간이 아니라 죽어서 천황과 동등한 지위에 오른 전사자들을 추앙하는 공간이라고 말합니다. 난징에서 학살을 서슴없이 저지른 일본군의 만행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 폭력은 신적 존재에 대한 숭배로 포장되고, 죽어서는 신이 되는 과정입니다.
아이리스 장은 이 악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폭력을 행사한 일본인들을 영원한 어둠에서 끄집어 올려 구원하려고 합니다. 학살한 자들이 희생자들의 공간으로 나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한다면 구원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과는 별개로, 일본 우익 세력의 공격에 시달리다 두 살 난 아들을 세상에 남기고 스스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워이커씽이 난징대학살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밝혀집니다. 난징을 침략한 일본군이 여성을 범하여 낳은 아이가 워이커씽이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7살 때 목을 맵니다. 어린 워이커씽은 매달린 어머니의 시신을 내리고 그 옆에 눕습니다. 그가 독백처럼 내뱉는 아래의 말에서 아픈 역사가 개인에 묶은 매듭이 풀리는 듯 했습니다.
241p
당신에게는 내가 희생자로 보이오, 가해자로 보이오? 오랫동안 나는 희생자라고 생각했소. 보이지도 않는 아버지를 증오하는 이유가 충분했소. 하지만 언젠가부터 내가 가해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소. 내 존재 자체가 어머니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니. 그 고통의 절정이 어머니의 죽음이었소. 내가 어머니를 죽인 것이오. 그러니 가해자라고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지 않겠소. 나는 희생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요. 내 몽상이 여기에서 비롯되었음을 당신은 눈치챘을 것이오.
너무나 비극적인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개인의 실존을 찾으려 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간격을 메우다 메우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은 맨 위에서 언급한 '발 없는 새'입니다. 실존 인물인 장궈룽과 아이리스 장, 그리고 수많은 난징 학살의 희생자들, 허구의 인물인 워이커씽과 그의 어머니, 분희 언니 등이 오직 죽음으로서 쉴 수 있는 '발 없는 새'입니다.
'나'의 고모할머니가 난징을 끌려가 위안부의 삶을 견디며 떠올렸던 '고래' 이야기에서 눈 앞이 흐려졌습니다. 책을 다 읽고 멍해져서 한참을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가 있을 수 있지? 하며 오래 곱씹었습니다. 악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그 망할 짓을 한 일본군을 어둠에 차마 버려두지 못하고 구원하려 한 아이리스 장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가 들여다 본 벼랑 끝의 심연이 얼마나 깊었으면, 비극적인 현실과 실존 사이의 괴리가 얼마나 컸으면 두 살난 아들을 남기고 자살을 선택했을까요.
워이커씽은 아이리스 장이 바란 것은 두 가지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책이 역사가들을 자극해 연구와 토론을 확산시켜 난징학살이 나치의 유태인 학살처럼 역사의 올바른 평가를 받는 것과, 자신의 책이 많은 일본인들에게 읽혀 그들의 생각에 변화를 주는 것입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우리 할머니들에게 그들은 아직 사과하지 않았습니다. 30만 명이나 되는 중국 민간인들을 학살한 이 참혹한 만행에 대해서도 일본은 아직 사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니 사과하지 않고 있고, 당연하게 이에 대한 피해 보상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워이커씽과 아이리스 장이 그토록 갈구했던 구원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소설은 강렬하면서도 묵직합니다. 시대의 아픔을 이보다 더 실감나게 풀어나갈 수는 없습니다. 비극적인 역사적 사건이 개인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비극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실존을 찾을 수 있는지, 화해와 용서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관하여 알게 되었고,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매혹적인 역사 소설을 읽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쓴 작가에게 "고맙습니다"라고 혼자 읊조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리스 장의 책도 찬찬히 읽어볼 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