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유롭게 자라나는 나무다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사회는 어디까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나
밀이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는 하는 바는 뚜렷하다.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답을 하려고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개인을 그냥 놔둬라, 이다.
밀은 이를 설명하면서 세 가지의 자유를 강조했다. 첫째가 생각하고 표현하는 자유, 둘째가 내 삶을 내가 꾸릴 자유, 세째는 모임을 만들 자유다. 이 결사의 자유를 사회 변화를 이끄는 동력이라고도 했다. 밀은 당연한 이야기를 어렵게 썼다.
옳지 않은 의견에 침묵을 강요해서는 안되는 이유
특히 표현의 자유에서,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침묵을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소수의 의견이 진실이거나 일부 진실일 수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고, 그 의견이 전적으로 틀린 것이라 하더라도 그 틀린 의견이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의견의 근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이들이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사회가 곧 개별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고, 이는 다양성에 기여하게 된다. 밀은 유럽이 세계 최고의 사회가 된 이유를 바로 이 다양성이라고 말한다.
142p
무엇이 유럽 국가들을 정체된 인류의 부분이 아닌 진보하는 부분으로 만들어왔을까? 어떤 이는 우월한 탁월성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우월성이 있다면 그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유럽이 진보를 이룬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의 돋보이는 다양성, 즉 각국의 독특한 성격과 문화의 다양성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라
책이 나온 1859년의 영국은, 지금의 미국보다 더 잘나가는, 지구상 최강의 국가이자 최고의 국가였다. 하지만 지금의 눈으로 보면 그 사회는 시궁창이었다.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많은 사람이들이 도시로 와서 노동자가 되었으며, 그 노동 환경은 닭장에 비할 바도 못되었다. 국민 대부분이 노동자였지만, 투표권도 없어 정부에 자신의 권리를 말할 수도 없었다. 당시 영국에서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전체의 5%였다.
이런 사회에서 밀은,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자라고 표현하는 존재라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선택하는 삶의 자유를 강조했다. 자신이 선택한 삶이, 때론 틀릴지라도, 남들이 좋다고 하는 삶을 사는 것보다 궁극적으로 더 낫다고 말했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라고.
120p
인간 본성은 어떤 모형을 따라 만들어져 정해진 일을 정확히 수행하도록 설정된 기계가 아니다. 내적인 힘, 인간을 살아있는 존재로 만드는 그런 힘을 따라 모든 방향으로 스스로 성장해 뻗어가는 나무와 같다.
38p
자유라는 이름으로 불려 마땅한 자유는, 타인의 자유를 박탈하지 않는 한, 타인의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자신의 방식대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자유를 의미한다. 각 개인이야말로 자신의 신체, 정신, 영혼의 건강을 가장 잘 수호할 적임자다. 서로가 각자의 방식대로 허용할 때, 인류는 서로의 고통을 주고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할 때, 다른 이들을 우리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아가게끔 강제할 때보다 훨씬 더 큰 이익을 누린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
밀은 공리주의자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그 공리주의. 공리주의는 인간이 쾌락(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고, 이 사회에 그 쾌락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사회라고 보았다. 하지만 밀은 조금 달랐다. 그 쾌락에도 차이가 있다고. 물질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이 더 크고 숭고하다고.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이때 나온 말이다.
나는 육체적, 물질적 쾌락도 좋아해서 정신적 쾌락이 더 높은 쾌락이라는 밀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밀의 시대보다 더 획일적이다. 똑같은 교육을 받고 똑같이 생긴 집에 살며 똑같은 콘텐츠를 소비한다. 약간 뾰족하면 가차없이 잘리거나 없는 취급을 당한다. 게다가 요즘 나온 알고리즘이라는 AI덕에 도파민 뿜뿜의 쇼츠를 보며 쾌락을 느낀다. 그러던 사이에 모두가 같은 사고를 하는 인간이 되어버린다.
밀이 주장한 '개별성'은 그래서 지금 시대에 더 강조된다. 스스로 사고하여 자신의 생각의 키우는 것, 그래서 모든 사람이 가야한다고 말하는 길을 가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사는 것은 더 어려워졌다.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배부른 돼지가 되는 것도 어렵지만,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더욱 어렵다. 그렇기에 더 가치가 있고, 더 나은 쾌락이 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 동영상도 함께 찾아봤다. 이지영 강사의 영상은 자유론과 관련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지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줘서 좋았고, 유시민 작가의 영상은 쉽고 재미있고 깊게 설명해 주었다. 유작가의 강의가 오히려 책보다 더 나았다.
나도 틀릴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을 인정해라
책을 읽으면서 2016년 '성매매 처벌법'의 헌법재판소 판결이 생각났다. 성판매 여성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나의 이익을 위해 자유 의지에 따라 상대방과 성행위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내 몸 사용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고 외쳤다. 나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헌법재판소는 "응, 안돼."라고 판결했다. 성을 자본으로 교환하는 행위는 아직 우리 사회가 용인할 수 없다고 판결의 이유를 밝혔다.
밀이라면 어떻게 판결했을까? 자유론의 수호자이니 당연히 허락하지 않았을까? 그렇다. 5장에 현실 적용에서 성매매는 개인의 일이니 국가가 간섭말라고 했다. 밀은 어지간한 경우는 개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런 내용을 변형하여, 일부 보수 단체들이 자유를 자기들 맘대로 해석하여 자기들의 논리가 옳다는 근거로 사용하기도 했다.
밀의 주장에 크게 고개를 끄덕인 건 두 가지다. 첫째는 상대의 의견에 침묵을 강요하지 마라, 상대가 옳을 수도 있다, 너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라, 상대가 옳을 수 있듯 너도 틀릴 수 있다, 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리하여 개인의 개별성을 살려 너의 삶을 살아라, 그러면 사회에 다양성이 생겨 전체적으로도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밀에 따르면, 주어진 라인으로 가지 않고 삐뚤빼뚤 가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에 와서 보면 책 전반에서 말하는 밀의 이야기는 너무도 당연하다. 심지어 헌법에도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밀은 당연한 말을 쓴 게 아니다. 책이 나온 백오십 년도 더 전에는 당연하지 않은 말이었을 거다.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과 인간의 개별성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고, 이후 치열한 논쟁과 저항과 투쟁으로 이제는 당연한 말이 되었다.
이 책은 김해 인문책방 '생의 한가운데'에서 진행하는 '골목 독서' 모임에서 읽었다. 총무님께서 추천하신 책이었는데, 혼자라면 읽을 엄두도 내지 않을 책이었다. 서양의 근대 고전에도 눈길을 돌리게 해줘서 고맙다. 19세기 백가쟁명의 유럽 사상가들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 더 궁금해졌다.
덧붙이는 글 : 간디학교 이야기
소수의 의견에 대해 무시하지 않고 그 의견을 최대한 담으려는 의사결정 구조를 가진 조직을 알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대안학교인 간디고등학교다. 이 학교의 학생과 이해관계자들은 소수의 의견도 수용하려고 최선의 노력을 한다. 이런 의사 결정은 민주주의의 결정판이라 불릴 만 하다. 도출된 결론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도출의 과정도 중요시한다.
하지만 이런 의사결정구조는 결과를 도출하기까지의 과정이 아주 느리고 그래서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특히나 의사를 결정해서 진행해야 되는 사안이고, 내가 그 진행자라면 그 과정은 거의 죽음이라고 할 만큼 더디고 어렵다. 더우기 나는 효율성의 교육을 받았으며 그것을 극대화하는 기업에서 20년을 일한 사람이 아닌가. 그런 나에게 간디의 의사결정과정은 본받아야 하면서도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과정이었다.
이런 의사결정과정에 익숙해진 학생들이 사회에 나와 효율성을 중시하는 조직과 만나면 어떤 일이 생길까? 모두의 짐작대로 간디학교 졸업생들은 이런 사회를 회피한다. 아주 일부의 학생들이 사회에 적응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현재 평범하고 당연시 되는 기존 주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다. 바꿔 말하면 아직 우리 사회가 간디학생들을 품을 만큼 품이 넓지 못하다. 돌아돌아 그들은 자신과 비슷한 교육을 받은 이들과 어울리고, 간디 학교와 비슷한 의사결정구조를 가진 조직으로 들어간다.
돌이켜보면 아이를 간디학교에 보낸다는 건, 대안 교육을 접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다. 학교를 졸업하면 그들은 주류 사회에 들어가지 않고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자신의 길을 찾아 좌충우돌한다. 이건 필연적이다. 그러니 간디학교에 간다는 것은 그 아이의 삶의 방식까지 정해버리는 대단히 큰 결정이다. 아이를 학교에 보낼 땐 미처 이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간디학교의 졸업생은 사회의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큰 자신이다. 다양성이야말로 나라를 진보케 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밀의 말처럼 간디학교의 아이들과 그 졸업생들은 우리 사회를 진보하게 만든다. 나는 이런 우리 아이들이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