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가 되는 비법서 :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무한>
2003년에 닉 보스트롬이 <당신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는가>라는 논문을 냈다. 이 논문은 '인류 문명이 발달하다보면 언젠가는 컴퓨터로 인간의 의식을 재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라는 전제를 제시했다. 물론 현재는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밀리초당 10의 17승 정도의 연산이 가능한 컴퓨터가 나오면 인간의 뇌를 재현할 수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이 전제를 받아들일 경우 아래 세 가지 명제 중에서는 하나는 분명히 참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1. 인류는 의식 재현 수준의 기술력에 도달하기 전에 멸망할 것이다.
2. 기술력에는 도달하지만, 의식을 재현해내는 대규모 시뮬레이션을 진행하지 않을 것이다.
3. 기술력에 도달하고 시뮬레이션을 만든다.
일단 2번은 거짓이다. 인간이 시뮬레이션을 만들 수 있다면, 내가 주인공인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만들지 않을 수 있을까. 인간은 무조건 만든다. 그리고 지금이 시뮬레이션이 아니라면 우리는 멸종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시뮬레이션이 더 낫다. 따라서 우리는 거의 확실하게 컴퓨터 시뮬레이션 안에 있다.
우리가 시뮬레이션에 살고 있다는 증거는 차고 넘친다. 특히 양자역학이 나오고 나서는 더욱 그렇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양자는 관찰하면 입자고 안보면 파동이다. 파동 상태인데 내가 보면 입자로 바뀐다. 그러니까 현실은 우리가 보는 순간이 렌더링이 되는 시뮬레이션이다. 실제 게임에서도 그렇지 않은가. 안보면 NPC는 움직이지 않는데, 시야에 들어오면 움직이기 시작한다. 현재 과학은 빛보다 빠르게 정보를 전달할 수 없는데, 이것 또한 시뮬레이션을 만든 넘이 한계를 걸어놓은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이 만든 컴퓨터 시뮬레이션 안에 살고 있으며, 지금 이 시뮬레이션이 하나의 우주다. 시뮬레이션은 하나만 만든 게 아닐테니, 우주의 갯수도 무한하다.
당신은 이번 생을 여행하며 무엇을 마음에 담았는가? 무엇을 사랑하였는가? 가족, 연인, 친구들, 내가 돌보던 작은 생명들, 초여름의 하늘, 밤새 소복이 쌓인 눈, 따뜻한 포옹, 한낮의 아이스티, 비 오는 날의 흙 비린내, 털장갑, 하굣길의 노을, 갓 나온 빵, 남국의 바다, 오전의 도서관, 소풍날의 돗자리, 주말의 여유.
당신 생의 마지막 날, 이 삶에서 떠나야 하는 바로 그 시간에, 당신은 무엇을 떠올릴 것인가? 무엇이 즐거웠다고, 무엇을 사랑했다고 말할 것인가? (251쪽)
1.
이 책은 우리의 의식에 대해 다룬다. 의식이란 무엇이고, 죽음 이후에 의식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그 의식이 지금 나의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이에 대한 저자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의 의식 가장 깊은 곳에 다다르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 깨달음이란 텅 비어 있음, 고요함, 평온함이다. 내면의 심연에 닿으면 고요와 평온을 얻을 수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우리는 현실 세계를 살아가야 하기에. 그래서 우리는 여행자임을 기억하고 지금 여행하고 있는 이 시간과 공간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라.... 라고 저자는 말한다.
2.
처음 채사장의 책과 강연을 들었을 때 충격적이었다.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했고, 논란의 문제를 명확하게 했다. 그리하여 나를 둘러싼 이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쉽게 설명했다. 이 세계에 대해 대략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가장 잘 설명해주는 작가였다. 그가 쓴 책은 다 읽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지대넓얕의 완결편이 깨달음에 대한 책이라니.
3.
달마는 소림사의 치우동굴에서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말도 하지 않으며 오직 벽만 바라보며 수행했다. 달마가 오직 벽만 바라보며 수련을 한 이유는 밖으로 향하는 모든 둘레를 차단하여 내면의 심연에 닿을려고 그랬다. 9년 간의 수행 끝에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채사장은 달마의 수행 과정을 단계 단계마다 글로 풀어냈다. 달마가 기록을 남겼어도 이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채사장 너는 달마가 되었느냐.
4.
깨달음을 얻기 위한 과정에 새겨 들을 구절이 꽤 있다. 삶의 기준을 단순하고 소박한 생에 두고 정비하면 내면에 더 쉽게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이 정비라는 것은 물질적인 정비도 있지만,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정비해야 된다고 했다. 내면에 닿아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세상을 여행자처럼 살라고 했다. 비 오는 날에는 비가 오는 것을 사랑하고 맑은 날엔 날이 맑음을 사랑하며, 젊어서는 젊음의 열정을 사랑하고 노년에 이르서서는 평온에 이르렀음을 사랑하는 사람이 여행자다.
5.
의식은 보는 자와 보는 자가 보는 세계라 했다. 다른 말로 주체와 대상 혹은 자아와 세계이다. 보는 자인 내가 가장 깨어있는 시간은 아침 출근 운전대를 잡은 20분이다. 이 시간에 보는 자는 보는 자가 보는 세계를 가장 명확하게 본다. 자아와 세계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보고 규정을 내린다. 나는 이래야지, 그리고 오늘 이거 이거는 꼭 해야지, 이거는 잘못했으니 잘못했다고 이야기해야지, 오늘 이랬으니 내일은 이래야지 등. 이걸 온전히 하면 나는 충만해진다.
6.
내가 기분이 좋으면 세상은 아름답다. 내가 힘들고 고통스러우면 세상은 추하다. 작가가 말하는 보는 자와 보는 자가 보는 세계는 분리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가장 큰 단서다. 보는 자가 보는 세계는 보는 자가 만들낸 것이다. 비록 우리가 꿈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만든 세계도 통제하지 못하지만.
7.
어제 아침에 도반들과 함께 뒷동산에 올랐다. 바람은 매서웠으나 상쾌했다. 다리는 떨렸으나 정신은 맑았다. 정상에서 보는 산과 도시와 사람들은 아름다웠다. 그것이 하나의 시뮬레이션이라 해도 상관없다. 신이 만든 것이든, 내 후손이 만든 것이든, 나는 바른 정신과 맑은 육체로 그것을 즐기면 된다. 신이 만든 세상을 즐기는 것은 내가 만든 세계다. 그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나의 세계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NPC가 아님을 증명한다. 내가 사는 세계가 현실이든 시뮬레이션이든 모든 것은 결국 내 안에서 이루어진다. 작가가 궁극적으로 하고자 하는 말은 이것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8.
그러고 보니 요즘 채사장이 안보인다. 매체에서 그를 볼 수 없다. 혹시나 하고 검색해보니 이 책을 내고 여러 북콘서트에 나온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완전히 동굴에 들어간 건 아니었네. 다행이다. 예전처럼 자주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좋겠다.
9.
채사장은 달마에 이르는 길을 썼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달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