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이야기

불편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 홍승은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개락당 대표 2018. 5. 5. 22:04

 

 

 

불편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 홍승은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괴물 - 최영미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K의 충고를 깜박 잊고 En선생 옆에 앉았다가

Me Too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가 구겨졌다

 

 

몇 년 뒤,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

En이 내게 맥주잔이라도 던지면

새로 산 검정색 조끼가 더러워질까봐

코트자락 휘날리며 마포의 음식점을 나왔는데,

 

 

100권의 시집을 펴낸

"En은 수도꼭지야. 틀면 나오거든

그런데 그 물은 똥물이지 뭐니"

(우리끼리 있을 때) 그를 씹은 소설가 박 선생도

En의 몸집이 커져 괴물이 되자 입을 다물었다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이지도 모르는

불쌍한 대중들

 

 

노털상 후보로 En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En이 노털상을 받는 일이 정말 일어난다면,

이 나라를 떠나야지

이런 더러운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아

 

 

괴물을 키운 뒤에 어떻게

괴물을 잡아야 하나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집으로 널리 알려진 최영미 시인이 2017년에 발표한 괴물이란 시다. 흠칫했다. 저 시에 나오는 En이 정말 <만인보>의 고은인가. 노벨문학상을 탄다면 오직 고은뿐이라 했던 그 고은 말이다. 그리고 나서 터진 서지현 검사의 인터뷰로 우리나라 미투운동에 불이 붙었다. 달수형과 조재현, 김기덕 감독이 거명되고 이윤택의 쓰레기 같은 과거가 드러났으며 급기야 조민기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지경에 이른다. 가장 강력한 차기 대권 주자인 안희정이 그걸 잘못 놀려 정치인생이 끝장날 땐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평소 좋아하던 바둑 기사 김성룡은 또 어떠한가. 참 나쁜 사람들이고 쪽팔린다. 그게 그렇게 조절이 안되나. 정 참기 힘들면 쉽게 해결할 곳이 쌔고 쌨는데.... 멍청하거나 인간이 덜 되었거나 둘 중 하난데, 인물 면면을 보면 멍청하지도 않고 인간이 덜 되지도 않은 냥반들이다. 도대체 저 인간들이 어디서부터 삐뚤어졌나 헷갈리기 시작한다.

 

 

 

 

미투 운동은 2006년 미국의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가 미국내에서도 가장 약자인 소수인종 여성과 아동들이 자신의 피해 사실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독려해주고 피해자들끼리 서로의 경험을 공감하고 연대하며 용기를 내어 사회를 바꾸어 갈 수 있도록 창안한 것이다. 그러다가 2017년 하비 와인스틴이라는 헐리우드 영화제작자가 과거 30년 간 50명이 넘는 여자를 강제로 추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투 운동에 불이 붙었다.

 

이를 폭로한 배우 애슐리 쥬드와 페미니스트 팝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 우버 내 성희롱 사실을 밝히고 미투 캠페인을 촉발한 수전 파울러를 포함한, 성폭행 사실을 용감하게 밝힌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침묵을 깬 사람들'로 지칭하여 2017년 타임지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

 

 

 

 

미투 운동의 대부분 자신의 우월적 권력을 이용하여 상대 여성에게 강압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하는 권력형 성범죄가 대부분이다. 그 왜, '내 깡패 같은 애인'이라는 영화에 보면 취직에 목숨거는 정유미에게 함 주면 취직시켜 준다고 꼬시는 진짜 질 나쁜 시키가 나오는데, 실제 이런 넘들이 영화에만 나오지는 않는다. 나중에 이 사실은 안 박중훈이 이넘을 개 패듯 패준다. 이런 경우는 피해사실을 고발 못한다. 왜? 고발 즉시 불이익이 돌아오니까. 쪽팔리고. 성폭력 피해자에게 너도 잘못이 있다는 투의 울나라 사회적 편견 때문에 더욱 고발과 폭로는 어렵다.

 

사진 출처 : http://todaysveterinarybusiness.com/author/kolah/

 

 

 

 

드러난 것이 이 정도일진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은 어느 정도나 될까. 자신이 가진 조그만 권력을 이용해서 여자들을 어쩔 수 없는 궁지로 몰고 가는 그런 상황이 어찌 한두 건일까. 미투 운동은 더 불이 붙어야 된다. 울나라를 완전히 뒤집어 엎을 정도로 불이 붙어야 한다. 남자들, 반성해야 된다. 그리고 이거는 사람의 인성 문제다. 제 아무리 많이 배워도, 아니 많이 배운 놈들이 더 하다고, 사람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일쯤은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거 아닌가. 펜스 룰 운운하는 넘이야말로 발로 주 차서 공가야 되는 넘들이다.

 

사진 출처 : http://www.medigatenews.com/news/2833096046

 

 

 

 

 

 

한 시인을 만났다. 그는 세월호의 슬픔에 누구보다 가슴 절절한 시구를 뱉어내는 사람이었다. 시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감동해서 그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처음 마주한 그는 다짜고짜 '어린' 내게 반말을 했고, 먹을 것 좀 사오라며 대뜸 카드를 내밀었다. 그 뒤로도 쭉 이어진 그의 무례한 말고 행동에 한 번 놀라고, 본 행사 때 진심어린 표정으로 슬프게 시를 읽는 모습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잠깐 동안 마주한 두 얼굴이 너무 이질적이어서 한동안 우두커니 멍채진 정신을 다잡아야 했다. 그 뒤로는 그 시인의 책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p.288)

 

 

 

저자의 경험을 쓴 위의 발췌문에서도 알 수 있듯, 젠더의 문제는 진보냐 보수냐의 문제는 아니다. 많이 배우고 덜 배우고의 문제도 아닌 것 같다. 개인의 성향으로 치부할 문제는 더욱 아니다. 한 사람이 자라면서 가정에서 보고 들은 것, 그의 친구와 친척들, 지인들 사이에서 보고 배운 것, 그가 매체에서 보고 읽은 것들이 망라되어 종합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뭔가 느슨해졌을 때 확 튀어나오는 그런 문제다.

 

 

 

그러니까, 남자들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다. 나이 어린 여자 알바에게 반말을 한다거나, 밥은 당연히 여자가 차려주어야 된다거나, 커피는 여자가 타야 맛있다거나, 허드렛일은 남자가 할 일이 아니라거나....  그게 당연하지 않다는 환경이 먼저 만들어져야 하는데, 아직은 갈길이 멀다.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번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나? 솔직히 말해서 밥은 울마눌보다 내가 더 많이 차리고, 집 청소며 빨래도 내가 더 많이 한다. 아내를 편안하게 해주겠다는 사랑의 마음이 아니라, 마눌이 안하니까 답답한 내가 한다. 아, 슬픈 현실. 부모 부재 시 딸에게 "오빠야랑 동생 밥 잘 챙겨라" 이런 말은 절대 안한다. 그래서 딸은 막내에게 지밥 차리는 걸 시키더라.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장손이라는 위치로 최악의 환경에서 자란 것 치고는 꽤 잘 자랐다ㅋ. 하지만 돌이켜보면 결혼 전까지만 해도 남자의 특권의 꽤 누렸다. 그땐 그게 뭔지를 잘 몰랐고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이 책에 대해 검색을 좀 해보니 여성분들의 찬사가 끊이질 않는다. 그 만큼 공감한다는 뜻이다. 저자인 홍승은씨와 동생 홍승희씨다. 찾아보니 이 분들 꽤 유명하시다. 자신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여성의 젠더와 페미니즘에 대해 부지런히 공부하고 강연하고 글을 쓴다. 춘천에 '인문학 까페 36.5'를 운영한다고 해서 찾아보니 어라, 포항으로 이사를 했다고. 아하, 포항의 달팽이 책방에 저자와 함께하는 글쓰기 워크샵이 있더만, 그런 이유였군. 둘다 예쁘시다. 앗, 근데 여자한테 예쁘다고 하면 안된다고 산이가 그랬는데....ㅎㅎ 왠지 조심스러워 진다.

 

사진 출처 : http://v.media.daum.net/v/20171106153622505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다. 단란하지 못했던 저자의 가족사가 불편했고, 자라면서 여자라는 이유로 불편함을 겪을 수 밖에 없어던 저자의 경험들이 불편했다. 별 것 아닌 것 같이 보이는 것에도 이의를 제기하는 저자의 민감함이 불편했고, 저자 주위의 저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못난 남자들이 불편했다. 불편한 이유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으나 딱 꼬집어 이거다 라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아마도 아직 내겐 생소한 일들이라 그런 걸까? 그렇다면 나도 여전히 남자라는 특권 속에서 익숙해져 버린게 아닌가 하는 일말의 반성도 해본다.

 

 

 

책 제목도 그렇듯 저자 홍승은은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물론 이 말은 차별로 고통받는 이들이 왜 불편한지, 왜 아픈지 말하고 또 말해서 그것을 드러내자는 걸 강조한 것이다. 여태 숨어서 곪아있던 것들을 기어이 세상으로 나오게 하여 함께 위로 받고 함께 치유하자는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고통을 당해본 적이 전혀 없는 나같이 이들에게 하는 말도 된다. '어때, 내 얘기를 들으니 당신도 좀 불편하지?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도 귀 기울여줘. 주위에 돌아보면 많이 있을꺼야' 라고. 나는 그렇게 들렸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글도 잘 못쓰고, 아직 페미니즘을 잘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서투르게나마 쓸 수 있는 건, 제가 살아오면서 목격한 너무 많은 불편함을 뱉어내는 게 세상이 진보하는 일의 시작이라고 믿기 때문이에요. 저는 항상 신문에서 목격한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이야기해왔지만, 정작 제 삶과 밀접하게 관련된 아픔은 말하지 못했습니다.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거라는 말을 머리로만 이해해왔네요. (p.259)

 

 

 

페미니즘은 잘 모른다. 나는 그저 남자와 여자가 잘 어울려 즐겁게 지냈으면 한다. 저자가 자신의 아주 비밀스럽스지만 아픈 상처를 꺼내 보인 것도, 그래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여러 폭력들은 담대하게 증언한 것도 결국은 다 같이 잘 지내 보자는 희망에서 나온게 아닐까. 많은 여성들이 저자를 지지한 것처럼 나도 홍승은을 응원한다. 그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응원하며 이 책이 많은 남성들을 불편하게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의 곁에 좋은 사람들 특히 좋은 남자들이 많이 생겨, 그의 상처가 치유되고 (비혼주의며 폴리아모리 라고 했지만)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그렇게 알콩달콩 살았으면 좋겠다. 저분들은 이미 잘 살고 있으니 당신이나 잘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