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그리고 노란 나비의 꿈 : 윤미향 <25년간의 수요일>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 그리고 노란 나비의 꿈 : 윤미향 <25년간의 수요일>
"아빠, 주말에 서울 올라갈께요."
엥? 서울 온다고? 설마 아빠랑 놀아줄라고 오는 건 아니..... 춤을 배우고 있는 딸은 서울에서 원뽀인트 레쓴을 신청했는데, 서울 구경도 할 겸, 아빠랑 놀 겸 해서 토요일 일찍 올라온다는 겁니다. 하~~ 온전히 딸과 보낼 수 있는 1박2일이 생겼습니다. 전화를 받은 이후로 갑자기 바빠집니다. 동선을 짜야 하고 숙박도 정해야 하고, 뭘 먹을지도 정해야 합니다.
아, 근데 진짜 어딜 가지? 그렇지! 토요일이니 저녁부터는 광화문 촛불 집회에 가면 되겠고나! 집회에 딸과 둘이라니!! 야~~ 신난다!! 그럼 낮에는? 사실 가보고 싶은 곳이 있습니다. 딸이 올라온다고 했을 때 바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곳입니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입니다. 서울에 올라와서 진즉에 가 봤어야 할 곳이었으나 여태껏 미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강남 고속터미널에 내린 딸을 납치하듯 데리고 마포구 성산동으로 향했습니다.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은 마포의 성산동 주택가 언덕배기에 있다. 이 정도의 무게와 위치를 가진 건물이 있어야 될 자리는 결코 아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과 이야기기 담긴 이 박물관이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은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2년 일본 총리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집회가 처음 열렸다. 그렇다. 최장 기간 집회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그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바로 그 '수요집회'다. 수요집회를 주관했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는 2003년 박물관 건립 계획을 세운다.
주택가 언덕에서 코너를 돌면 검은 벽돌로 된 건물을 만난다. 담장도 건물 외벽도 모두 벽돌이다. 작은 규모지만 검은 벽돌의 외관에서 뿜어 내는 포스가 만만치 않다.
처음 이 건물의 위치는 서대문 독립공원이었다. 서울시가 공원 내 매점 터를 기부했다. 가난한 정대협은 아주 감사한 일이었다. 설계를 하고 심의를 받고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근데 뜬금없이 광복회, 순국선열유족회 등의 유공단체들이 반발했다. 독립공원은 순국 선열들의 현장인데, 피해자를 기리는 박물관과는 맞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써글!!! 그게 말이냐!! 몇년을 지지부진 시간을 보내다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이 자리로 오게 되었다. 어느 기업도 도와주지 않아, 수십만명 시민들의 손때가 묻은 모금으로 이 박물관은 지어졌다. 근데 여기 터를 사느라 지을 돈이 모자라 결국 기존 주택을 리모델링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다. 그리고 2012년 5월, 개관했다. 하나의 건물이 지어지기까지가 이토록 분노의 스토리다.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가서 안내를 받고 나면 이런 복도 출입구가 나온다. 외부로 다시 나와 지하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이다. 특이하지만 좀 분하다. 거창한 로비는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그래도 할머니들을 위한 박물관인데.... 건축가의 고뇌를 이 복도에서 단박에 알아차려 버렸다.
설계 공모에서 당선된 것은 장영철 전숙희 소장의 와이즈건축에서 출품한 '기억과 추모와 치유의 기록' 이라는 작품이었다. 그들은 기존 주택을 처음 본 순간 동시에 '이건 벽돌이다.' 라고 느꼈다고 한다. 하나의 작은 벽돌이 모여 큰 매스를 만든다. 이 건물이 생긴 스토리라인도 그렇다. '전시 공간을 과감히 2층으로 올리고 1층에 관람객과 박물관 관계자가 소통하도록 한 사랑방 같은 박물관' 이라는 심사의 평이다.
박물관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인 2층의 추모관이다. 웅크리고 슬프고 아픈 내부 세계와 무심하게만 흘러가는 외부 세계를 연결시키는 공간이다. 할머니들의 시간과 일상의 시간이 여기서 포개진다. 돌아가신 할머니들에게 꽃을 꽂아주는 딸이다.
여기서 울컥했다. 사진을 보니 또 울컥해질라고 그런다.
성긴 틈 사이로 무심한 일상이 흘러간다. 저기 바깥에 보이는 풍경은 언제나 같은 것인데, 안쪽에 보이는 할머니들의 세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나저나 건축은 역시 디테일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번뜩이는 아이디어였을까 아니면 수십차례의 회의 끝에 나온 결과일까? 건축가라는 인간들이 존경스러워지는 대목!!!
4만5천 장의 전벽돌, 3만 글자가 새겨진 기부자벽, 20년 간의 모금과 이 건물을 세우기 위한 9년간의 투쟁. 규모는 작지만 스토리와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은 건물이다. 아픈 기억을 추모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위로가 필요한 모든 이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치유의 공간이 되고자 한다.
헉! 뜰!! 뜰이라니~~~ 놀랍다. 마당으로 나오니 따뜻한 햇살이 반겨주었다. 한쪽 문앞에 걸터 앉아 아무 생각없이 한동안 따사로운 볕을 쬐었다.
"박물관 설계를 하면서 전쟁에 관련된 시설이나 다른 기념 공간들을 조사해 보니까 기억의 공간, 추모의 공간은 잘 되어 있는데 치유의 공간, 상처를 매만져주는 공간을 배치한 곳은 없더라고요. 그래서 반드시 밝고 좋은 공간을 넣고 싶었습니다. 마침 마당이 있으니 제격이었던 거죠" - 설계자의 말 인용,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에서 발췌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이야기 말고도 1층에는 지금 이 시간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세계 여성들의 모습들을 전시해 놓았다. 얼마전 읽었던 최윤필의 <가만한 당신>에 나왔던 콩고의 마마 레베카 마시카 카추바의 사진도 있었다. 할머니들의 나비 기금 1호 수혜자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야외에 지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 혹시나 싶어 내려가 봤는데, 이런 게 있었다. 놀랬다. 우리도 베트남에 가서 똑같이 했던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베트남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아~~ 그랬겠지. 우리가 일본에게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듯, 우리가 베트남에게 사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그 목적에 맞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고뇌한 흔적이 곳곳에 묻어났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가장 극적이고 효과적으로 건축 안에 담긴 의미를 표현했다. 건축물 안에 담긴 내용물과 그 내용물을 품고 있는 건축물이 가장 잘 어우러진 한편의 작품이다. 2012년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했다.
글 참고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sjnn&logNo=120198200862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bayst&logNo=10179982550
"들이야, 어땠어?" 라고 물으니 서대문 형무소에 갔던 느낌이랑 똑같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느낌이 어땠냐고 더 묻지 않았습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딸의 손을 꼭 잡고 주택가의 골목길을 빠져나왔습니다.
저는 해방되고서도 아주 긴 세월을 제 과거가 부끄러워서,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피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용기를 내어 모든 사실을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수요시위에서는 지금 한창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 아이들을 보면서 제게는 큰 숙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저 아이들만큼은 내가 겪은 것을 다시 겪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간절한 소망이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을 올바르게 밝혀야 합니다. 힘들지만, 제 경험을 통해서 일본이 어떤 일을 했고, 지금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여러분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P.167 : 유럽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이끌어낸 길원옥 할머니의 연설 중에서
<빼앗긴 순정> 강덕경 할머니 작품
박물관에 가면 할머니들의 여러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출처 : 책 p.145,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홈페이지에서 퍼옴
박물관 1층 데스크에서 자연스럽게 이 책을 샀습니다. 책의 제목은 바로 '수요집회'를 의미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92년에 시작된 수요집회는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책은 '위안부' 문제를 알기 쉽고 바르게 정리해 놓았습니다. '위안부'의 역사적 배경이 나오고, 위안부 피해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하여 어디 하나 절절하지 않은 것이 없는 다른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 그리고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우리가 해야 될 일에 이르기까지.....
위안부 할머니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기부하고, 오가는 시민들이 십시일반 기부하여 모인 '나비기금.' 이 기금은 지금도 전쟁으로 혹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학대받고 고통받는 전세계의 여성들을 위해 쓰여지고 있습니다. 할머니들의 위대한 정신이 세상을 향해 날개짓을 시작했습니다. 책에 나온 할머니들의 흑백사진이 이토록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우리의 딸들이 좀 더 나은 세상에서 살기를 희망합니다. 진정으로 그러길 바랍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그만 힘이라도 보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