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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이야기

경계의 시간, 이름 짓기를 희망하다 : 허태준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by Keaton Kim 2021. 8. 18.

 

동네 책방 <생의 한가운데>에 저자의 초청 강의가 있었습니다. 책을 재미있게 읽은 터라 설레는 마음으로 책방에 갔습니다. 잘 생긴 청년이 와 있었습니다. 마스크 속의 얼굴이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대면으로 하는 북토크는 이제 겨우 두 번째라 많이 긴장된다며 수줍게 웃었습니다. 청년은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존재를 증명받을 수 있다. '대학생', '군인', '직장인', '사회초년생'이라는 말 안에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정도의 서사가 녹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일하는 청년, 대학생이 아닌 이십대, 군인이 아닌 군 복무자였던 나는,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넘어가지 못한 채 경계 위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p.6)

 

책의 부제는 <경계의 시간, 이름 없는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마이스트고를 졸업하고 현장실습생을 거쳐 산업기능요원, 즉 군 복무 대신 기업체에서 중소기업에서 근무한 한 청년의 성장 이야기입니다. 첫 장에서는 '현장실습생'이 겪는 혼란과 학창 시절의 추억을 그렸구요, 둘째 장에서는 군 복무 대신 근무한 산업체 현장에서 있었던 크고 작은 갈등을 썼습니다. 마지막 장에서는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우리 사회의 청년노동자의 현실이고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글을 쓰는 게 좋아서 문예창작과로 진로를 선택하고자 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기계공고에 갔고, 군 복무 대신 회사에 일하면서 고민하고 방황하고 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젊은 시절, 누구나 가지는 방황과 고민의 이야기인데 이 책이 어떻게 이리 재미있을까요. 

 

작가는 글쓰기가 매우 조심스러웠다고 고백했습니다. 청년노동자, 특히 군복무 대신 산업체에서 일하는 청년이 자신의 일과 감정에 대해서 쓴 최초의 글여서 그랬답니다. 그렇습니다. 젊은 날의 고민은 누구나 하지만, 산업체 청년노동자의 고민과 솔직한 감정은 처음이었습니다. 글이 재미있던 이유였습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의 부조리함, 억울함과 서러움을 토로하지만, 비난보다는 바라보는 쪽을 택합니다. 담담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냄으로서 오히려 글을 설득력이 있게 됩니다. 언뜻언뜻 보이는 작가의 따스한 모습에 마음이 푸근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이 글은 아름답고 훌륭한 수필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처럼 열아홉 살부터 일을 시작했을까. 어쩌면 그보다 더 빨리 돈을 벌어야 했을까. 왜 돈을 벌어야 했을까.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산업기능요원으로 편입했을까. 불안했을까. 서러웠을까. 퇴근 후에는 뭘 했을까. 공부를 했을까. 힘들진 않았을까. 뭘 좋아했을까. 가족은, 친구는, 애인은 있었을까. 그들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새벽 복도 끝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면, 당신은 안녕한지, 나는 정말로 물어보고 싶었다. (p.22)

 

하지만 가끔, '빨리 돈 벌어서 좋겠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해야 했다. 시간을 지식으로도, 경험으로도, 새로운 기회로도 온전히 치환하지 못한 우리에게 돈을 빼면 뭐가 남는 걸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얼마나 공허한 마음으로 20대 중반으로 접어드는 걸까. (p.77)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지? 학교에 있을 때는 그렇게나 해야 할 일들이 가득했는데, 어른이 되자마자 모든게 텅 비어버린 거야. 누구도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뭘 더 할 수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잖아. 마치 세상이 우리를 잊어버린 것만 같았지. 아니면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네. 너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끝났어. 이제 아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살아, 라고. (p.153)

 

 

 

 

한 개인의 생각과, 경험을 적은 지극히 개인적인 글임에도, 구체적이고 적나라한 노동현장의 기록보다 더 생생하고 울림이 있습니다. 아주 솔직한 개인의 고민과 현실을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고개가 끄떡여집니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노동의 현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데 이게 아주 효과적입니다.

 

작가는 자신이 처했던 현실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건 자신의 할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고민합니다. 작가가 내린 결론은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사회 곳곳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는, 하지만 결코 순탄하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와야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을 읽고 서로 공감하고 대화를 나누면 좀 더 나은 사회가 될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궁금해서 질문을 할까 했는데 작가가 말해주었습니다. 지금은 출판사에서 일을 한다고요. 이름 없는 시절에 대해 글을 썼지만, 이제는 경계의 시간에 이름을 짓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말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작가 뒤로 피어나는 아우라를 봤습니다. 

 

작가의 글은 나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했고, 지금 우리 아이들이 하고 있는 고민들도 생각케 했습니다. 대학을 가지 않는 쪽을 선택한 우리 아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이들에게 하는 이야기들이 대안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의례 선택해야 하는 길을 강요하고 있는게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일반학교와는 약간 다른 특성화고등학교를 나왔을 뿐인데 말이죠. 

 

작가는 지금도 방황하고 아파하며 고민한다고 했지만,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찾았습니다.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했습니다. 대견했고 위로받았습니다. 그리고 글도 참 맛깔나게 잘 씁니다. 솔직하면서 따스하고 날카로왔습니다. 단번에 작가의 팬이 되었습니다. 이 작가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