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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

무림 최강자가 되기 위한 잎싹의 여정 : 황선미 김환영 <마당을 나온 암탉>

by Keaton Kim 2021. 8. 19.

 

 

 

잎싹은 슬쩍 마당을 봤다. 늙은 개와 역시 늙은 수탉과 암탉, 날기를 포기한 오리 몇 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닭장에서 나가기만 하면 마당의 저들을 제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닭장이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여기서 탈출하기란 불가능했다. 닭장을 들락날락하던 주인을 유심히 관찰한 잎싹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죽은 닭이나 알을 낳지 못하는 닭은 낡은 수레에 실려 나갔다. 잎싹의 머리는 번개같이 회전했다. 그날부터 잎싹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배가 고파서 미칠 것 같았지만, 닭장을 탈출할 수 있다면야. 

 

단식 닷새째가 되니 모가지를 가눌 수 없게 되었다. 다리에 힘도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이거, 닭장을 나가기 전에 먼저 죽는 거 아냐?"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잎싹은 입을 앙다물고 정신을 차렸다. 일주일째 되는 날, 자신의 몸이 공중으로 붕 뜨는 걸 느꼈다. 죽은 닭들과 함께 구덩이 속에 버려졌다. 정신을 가다듬었다.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점차 혼미해져갔다.

 

 

 

 

"희망을 버려선 안돼. 포기하면 그걸로 끝이야." 어디선가 희미하게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짓누르던 시체더미가 약간 헐거워졌음을 느꼈다. 온 힘을 끌어모아 작은 틈으로 모가지를 들이밀었다. 빗방울이 부리를 때리기 시작했다. 입을 크게 벌리고 내리는 빗물을 받아 마셨다. 시원하고 깨끗한 물이 몸 속으로 들어가니 날개와 다리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닭장에서 함께 지냈던 시체들을 조금씩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개짓으로 구덩이에서 나왔다. 하늘을 보았다. 온 얼굴에 빗물이 타고 흘러내렸다. 잎싹은 한동안 그렇게 탈출의 기쁨을 만끽했다.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까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였지? 멀리서 어렴풋한 안광이 보였다. 집중해서 보니 푸른색을 띈 청둥오리였다. 조심스레 다가갔다. "죽음의 구덩이를 뚫고 강호에 나온 걸 환영하네. 하지만 긴장을 늦추지마. 세계관 최강자가 늘 노리고 있으니까." 얼핏 들은 적이 있다. 닭장에 갖혀 있을 때 늙은 개와 수탉이 최강자 족제비에 대해서 하는 말을. 그땐 닭장에 있을 때라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는데, 이제 실전이 되었다. 청둥오리는 유유히 자리를 떴다. 비가 그치고 해가 나왔다. 멀리 마당을 보니 예전과 같은 모습이었지만, 자신이 갖혀 있을 때 보던 마당과 지금의 마당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우선은 체력을 회복해야 했다. 마당에 사는 무리들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보다는 최강자 족제비가 더 문제였다. 언제 어디서 덮칠지 몰랐다. 아직은 족제비와 맞다이는 무리였다. 잎싹은 닥치는대로 먹고 러닝으로 체력을 다졌다. 한 자리에서 두 번 이상 자지 않았다. 그렇게 체력을 회복하는 어느 날 밤,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잎싹은 바짝 엎드려 주위를 살폈다. 예상대로 희미한 물체들이 보였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청둥오리와 족제비였다. 청둥오리는 목숨을 걸고 싸웠으나 최강자는 빨랐다. 입싹이 청둥오리를 도우러 한달음에 달려갔으나 족제비는 벌써 날카로운 이빨로 청둥오리의 모가지를 물었다. 청둥오리는 다가오는 잎싹에게 "알, 알을 부탁해"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족제비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알, 알이라고?" 뭔가 짚이는 게 있어서 청둥오리의 보금자리 주위를 살폈다. 역시 알이 있었다. 잎싹은 알을 품었다. 며칠 후 알에서 오리가 나왔다. 잎싹은 '초록머리'라고 이름을 지었다. 잎싹은 초록머리가 걷기 시작하자 스파르타식으로 훈련했다. "너는 아버지가 없는 후레자식이다. 아버지의 복수는 너의 몫이다." 잎싹과 초록머리는 최강자 족제비 타도를 목표로 지옥의 수련을 이어갔다. 

 

 

 

 

잎싹은 초록머리와 훈련을 하면서 삶의 목표가 더 명확해져갔다. 세계관 최강자의 타도. 자신의 힘으로 하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 해도 초록머리와 함께 팀을 이루면 애꾸눈 족제비를 넘어서는 건 결코 꿈이 아니었다. 초록머리도 자신의 뜻대로 쑥쑥 자라주었다. 잎싹과 초록머리의 공력이 어느 정도 쌓여서 이 정도면 족제비와 맞상대도 가능하겠다고 여길 때 쯤이었다. "훈련을 하면서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아버지의 일은 아버지의 일입니다. 대를 이어 복수를 하겠다는 발상은 무협지에나 나오는 겁니다. 저는 저의 삶을 살겠습니다." 초록머리의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잎싹은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지만 돌이켜보면 수련 도중에 초록머리가 무리가 있는 호수 저 쪽을 바라보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다. 무리에 섞여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초록머리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며칠 고민 끝에 초록머리를 보내주기로 결심했다. "그래, 가거라. 니 삶은 니가 결정하는 거지." 그렇게 초록머리는 떠나갔다. 이제 잎싹은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혼자 된다는 건 힘들지만, 그래도 잘한 결정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초록머리가 가고 혼자 남은 잎싹은 씁쓸한 감정을 잊기 위해 더욱 수련에 매진했다. 닭장을 탈출하여 마당의 무리들을 쓸어버리고 최강자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도 혼자였다. 그리고 지옥의 구덩이에서 자신을 구해준 청둥오리에 대한 복수도 자신의 몫이었다. 그건 초록머리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었다. "그래, 초록머리의 삶은 초록머리의 삶, 내 삶은 내 삶이다. 이제 마무리를 짓자" 그렇게 결심하고 애꾸눈 족제비를 찾아갔다.

 

드디어 만났다. 상대는 이 세계의 최강자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온 빌런이었다. "나를 쓰러뜨리기 위해 무공을 연마한다는 얘기는 들었다. 오너라." 족제비는 당당하게 잎싹을 맞았다. 하지만 잎싹은 자신 앞에 선 족제비가 예전에 청둥오리를 단번에 제압한 그 족제비와는 달라보였다. 어딘지 모르게 힘이 없었고 강자의 결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찬찬히 살펴보니 한쪽 구석에 족제비 새끼들이 있었다. 상황을 단번에 파악했다. 상대는 최강자 빌런이 아니라 이제 막 새끼를 낳은 엄마였다. 잎싹이 물었다. "그러냐?" 족제비는 말이 없었다. 잎싹은 팽팽했던 몸사위가 풀어지는 걸 느꼈다. 천천히 뒤돌아섰다.

 

 

 

 

잎싹은 허탈했다. 여태 자신의 목표는 무림의 최강자였다. 최고의 빌런과 맞짱을 뜰 정도의 내공을 갖추었지만 목표를 잃어버렸다. 이제와서 마당에 사는 저 무리들을 쓸어버리는 건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했다. 저쪽 산 너머 큰 호수에 수달이라는 또다른 최강자가 있다는 풍문을 들었지만, 이런 도장깨기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신에게 물었다. 그 때 문득 깨달았다. 최고가 되기 위해 지옥같은 닭장을 탈출하고 청둥오리의 자식과 함께 수련했던 그 시간들이야말로 진정한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호숫가에 부는 바람이 시원했다. 잎싹은 하늘을 보았다. 자신이 어느때보다 자유로와졌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