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치 이야기

기억해야 할 사람들, 잊지 말아야 할 사건들 : 김효순의 조국이 버린 사람들

by 개락당 대표 2016. 7. 3.

 

 

 

기억해야 할 사람들, 잊지 말아야 할 사건들 : 김효순의 조국이 버린 사람들

 

 

 

학원 간첩단 침투 사건 (11.22 사건)

 

: 1975년 11월 22일 발생한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

 

 

 

중앙정보부는 당시 "모국 유학생 북괴 간첩이 한국 사회의 자유화와 민주와에 편승해 대학가의 학생 데모를 배후 조종해 사회 불안을 조성하고 이른바 결정적 시기에 국가변란을 꾀했다' 라고 밝혔다. 재일동포 유학생 17명을 포함하여 그들과 친했던 서울대, 부산대, 고려대 학생들이 반공법 위반, 간첩 방조최 등으로 함께 체포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검찰은 재일동포 유학생 17명 중 5명에게 사형을, 12명에게 무기징역에서 10년을 구형했고, 대법원은 4명에게 사형을 확정하고 11명에게 무기징역에서 5년을 선고했다.

 

 

 

2010년 7월 김동휘씨의 재심 청구를 시작으로 '11.22 사건' 피해자가 잇달아 재심을 청구했고, 2015년 11월 대법원은 사형수였던 이철씨의 무죄를 확정했다. 이로서 피해자 15명 중 8명(김동휘 김원중 김종태 강종건 강종헌 조득훈 이동석 이철)이 간첩으로 조작되었다는 누명을 벗게 되었다.

 

 

 

이 사건 이외에 재일동포가 우리나라에 유학와서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된 이는 100여 명에 이르고 그 중 30명이 재심을 신청했다. 무죄 확정 판결을 받은 사람은 21명이다. 여전히 많은 재일동포 피해자들은 한국을 두려워하고 한국 법을 믿지 못한다. 돌아가서 죽은 사람도 많고, 이름을 바꾸고 숨어버린 사람들도 있다.

 

 

인용 및 참조 기사

 

http://m.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4941,

 

http://www.newseyegeoje.com/article.php?aid=14514482188073026

 

http://blog.naver.com/merjay1/220586283091

 

 

 

 

당시 수사 책임자였던 중정 대공수사부 부장 김.기.춘. 우리가 알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비서실장 김기춘과 동일 인물이다. 국회의원 시절이던 2005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인권 침해를 하는 수사를 한 적이 없다. 내가 그랬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 내가 다룬 사건은 과거사 진상규명 대상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재심에서 속속 무죄 판결이 난 이후에도 "법원이 한 일일 뿐, 나는 아니다." 라고 답했다.

 

사진 출처 : 위의 두번째 기사

 

 

 

시대의 아픔에 동참 후회하지 않는다.

 

 

 

1970년대, 많은 재일동포 청년들이 고국으로 유학을 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일본에서 자라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던 이들입니다. 그 고민 끝에 좀 더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기 위해, 그리고 조국을 알기 위해서 한국으로 옵니다. 그 시절의 한국은 군부 독재 정권이라 상당히 위험했음에도 불구하구요. 그렇게 조국을 만나러 왔다가 고난을 당합니다.

 

 

 

재일동포 유학생 김원중은 11.22 사건의 구속자 중의 한명입니다. 구속 당시 서울대 사회대학원 경제학과 1학년이었습니다. 우리말을 좀 더 잘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나라를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유학왔다 간첩으로 몰려 모진 고문과 함께 7년 2개월의 감방 생활을 하고 나옵니다. 모국을 찾았다가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느냐 라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유학 간다고 결심했을 때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은 인식했다. 너무 쉽게 생각한 점은 있지만 터무니없는 운명을 짊어지게 된 것은 아니었다. 모국에 있는 동 세대의 젊은이가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던 현실에서 내가 허송 세월을 보냈다거나 괜히 모국에 가서 인생을 망쳤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모국 유학을 간 것을 후회한 적은 없다. (p.78)

 

 

 

 

김원중은 호세이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공부했고, 간첩으로 몰려 재판중에도 경제학도로서 마르크스와 레닌을 존경한다고 진술했다. '반공'이 '국시'로 강요되던 시절에 국가보안법상 간첩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도중의 일이었다. 간이 얼마나 큰지 엑스레이를 한번 찍어봐야 될 판.... 유기형을 받은 재일동포 유학생 가운데 만기를 꼬박채우고 석방된 경우는 그가 유일하다고 한다. 2011년 4월 재심 신청을 했고, 2012년 3월 재판부는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사진 출처 : 위의 첫번째 기사

 

 

  

사형수의 삶, 강종헌과 이철

 

 

 

나는 결코 북한 간첩이 아니다. 민주화와 통일을 바라는 재일 한국인청년으로서 모국의 젊은이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소박한 심정에서 유학을 결심했다. 학우들을 고문에 의한 자백으로 간첩 사건에 말려들게 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는 반공선전이다. (p.293) - 1976년 6월 강종헌의 1심 재판의 결심 최종 진술 중에서

 

 

 

 

강종헌은 일본에서 대학 진로로 고민하던 중 고국에서의 전태일 분신 기사를 접했다. 자신과 비슷한 세대의 젊은이가 얼마나 고민이 많았으면 저렇게 생을 마감할까,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국 유학을 결심했고 서울대 의예과에 진학했다. 시대의 아픔을 같은 또래의 국내 젊은이와 나누고 싶은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학생운동의 모임에도 가입했다. 그것을 빌미로 간첩사건의 핵심 인물로 지목되어 11.22 사건의 2차 피해자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3년의 감옥 살이 끝이 1988년 가석방 되었다.

 

사진 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28564

 

 

 

 

1988년 10월 명동성당 본당에서 거행된 결혼식. 신랑은 간첩이라는 누명으로 사형을 받고 13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막 수인의 옷을 벗은 이철. 신부 역시  간첩 동조 혐의로 3년 6개월 동안 수인의 옷을 입었고 그 뒤 이철의 옥바라지를 한 민향숙이다. 그들의 결혼은 훨씬 일찍 이루어졌어야 하나, 간첩 사건의 주모자로 엮이면서 무려 십수년이 늦어졌다. 강종헌과 이철 모두 사형수들이라 어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사형 집행으로 짐작하고 식은 땀을 쏟았다. 책에는 그 사형수들의 삶이 아주 적나라하게 나온다. 1974년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받은 이철과는 동명이인이다.

 

사진 출처 :  http://db.kdemocracy.or.kr/isad/view/00703165

 

 

 

유학생 형제 간첩단 사건 (1971년) - 서승 서준식 형제

 

 

 

서승은 동생보다 1년 9개월 늦은 1990년 2월 28일 삼일절 특서로 가석방되었다. 그에 앞서 1988년 12월 21일 무기에서 20년으로 감형됐다. 끝까지 전향서 작성을 거부한 그는 19년에 걸친 수감생활을 사상전향공작과의 투쟁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사람의 생각을 강제로 바꾸고 힘으로 굴복시켜 인간성을 말살하려는 비인간적인 제도에 결코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p.286)

 

 

 

1971년, 북에 다녀왔다는 이유만으로 간첩으로 지목되어 형 서승은 사형, 동생 서준식은 15년의 중형을 받습니다. 소위 유학생 형제 간첩단 사건입니다. 서승은 도쿄교육대학 문학부로 나와 서울대 대학원 사회학과에, 서준식은 교토 가쓰라 고등학교를 나와 바로 한국에 와서 1968년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간첩으로 몰려 각각 19년과 17년의 감옥살이를 하고 나왔습니다.

 

 

 

서준식은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선언하기도 했는데요, 개인의 생각까지 강제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소신과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것 자체가 병든 사회의 광기에 맞서는 자유로운 인간의 책임있는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그 책임있는 행동으로 법정에서 최종적으로 구형한 7년을 다 채우고 나서 전향을 거부하여 10년을 더 복역하게 됩니다. 자신의 소신과 양심을 위해 감옥에서의 10년과 바꾸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절정기인 10년을요.

 

 

 

서승은 1974년 국제 엠네스티가 선정한 그 해의 양심수였으며, 한국 정부가 석방시킨 최초의 '비전향 정치범'이기도 했습니다. 2011년 정년 퇴임을 맞이하여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오히려 19년의 감옥살이가 아니었더라면 교토에서 별볼일 없는 사람으로 살았을거라고 이야기합니다. 옥중에서 보낸 세월은 물론 아까웠지만 결코 무익하지 않았고 역사와 함께 한 시간이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1971년 10월 재판정에서 검찰의 구형을 듣고 있는 서승 서준식 형제. 서승은 악랄한 고문도 무서웠지만, 그 고문에 굴복하여 자신의 생각과 전혀 다른 자백할 것이 더 무서워 분신을 기도하게 되고 그 후휴증으로 참혹한 얼굴이 되었다. 책에는 어머니 오기순 여사의 이야기도 비중있게 나오는데, 일본에서 아이들이 '조센'이라는 말에 열등감을 가지지 않고 당당하게 조선인임을 말하도록 교육했으며, 두 아들을 옥바라지 하고자 혼자서 한글 공부를 했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어머니'라고 책에서는 호칭했다.

 

사진 출처 :  http://db.kdemocracy.or.kr/photo-archives/view/00757861

 

글 출처 및 인용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74580.html

 

 

 

 

 

 

 

 

책의 부재는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 사건의 기록'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많은 재일동포 유학생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일본인과 다름에 대해 차별받고 고민하고 자신의 나아갈 방향을 적극적으로 모색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시원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희망으로 고국에 오지만 정말 청천벽력같은 사건에 휘말리고 조국으로부터 고통과 버림을 받습니다. 그 시기에 자신들을 도와준 이들은 오히려 일본이었습니다.

 

 

 

책에서 언급한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들은 실제 빙산의 일각이라고 합니다. 나서지 못한 수많은 피해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역사속으로 사라져갑니다.

 

 

 

재일동포 유학생 사건의 피해자들은 구속 기소돼 장기간 감옥에 수감됐던 사람들에 그치지 않는다. 정보기관에 끌려가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채 풀려난 사람들, 수사관의 가혹행위와 회유를 이겨내지 못하고 누군가의 이름을 대야 했던 사람들, 검찰 쪽 증인으로 법정에 불려나와 조작사건의 피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해야 했던 사람들, 자신의 친구와 동료가 간첩으로 몰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도 못 본 체하며 침묵을 지켜야 했던 사람들, 이 모두가 피해자다. 이들이 입었던 정신적 상흔을 어루만져주고 위로해주어야 한다는 의식은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존재하지도 않았다. (p.427)

 

 

 

조국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보탬이 되고자 했던 청년들은, 오히려 그 조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으로 인해 과거의 기억을 다시 들추어내기조차 꺼려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선택에 대해 옳았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들에게 저지른 것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하고 보듬어야 할 때입니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한국과 일본 양쪽 모두에게 고통을 받은 받았기 때문입니다.

 

 

 

4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국가'라는 권력의 폭력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인의 생각을 강요하고 개인의 행동을 강제하는 거대한 광기는 재일동포 유학생들의 고통의 시대에서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시절의 사건과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소신있는 행동과 양심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결국은 기억을 둘러싼 싸움이다. 이 책에서 언급된 조작사건 피해자들이 당한 고통과 좌절과 흘러간 세월은 어떤 방식으로도 보상되지 않는다. 그런 비극이 되풀이되는 것을 보지 않으려면 진상을 밝히고 기억하는 작업을 잠시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p.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