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디아스포라의 읊조림과 가르침 : 서경식의 시대를 건너는 법
무겁게 흐르는 검은 강물에
네 칸의 짧은 그림자 제 모습 비추며
오늘도 달려간다 케이세이센
키 작은 철교 아래, 그 아래로
서럽게 묻힌 슬픔 외로이 잠든다
강 건너 저 편에서 불어오는 바람
그리운 냄새를 실어서 오네
에헤이요~~ 에헤에이요~~~
케이세이센 타고 나 이제 돌아가리
여기도 또 내 고향
케이세이센 京成線 이라는 노래의 가사입니다. 도쿄 나리타 공항과 도쿄 시내를 잇는 전철의 이름인데요, 공항에서 이 케이세이센을 타고 오다 보면 아라카와 라는 강이 나오는데, 이 강의 아래가 관동 대지진이 났을 때 많은 조선인이 학살당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 노래를 부른 이정미라는 가수의 고향이기도 하구요.....
첨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울었습니다. 쪽팔리게.....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쉽게 무너뜨리는 이 가수는 소위 자이니치在日 라고 불리는 재일교포 가수입니다. 한국인이면서 한국인이 아니기도 한..... 사랑이 아빠 추성훈도, 저번 아시안 컵에서 결승전에서 드라마틱한 결승골을 넣은 축구 선수 이충성도 모두 디아스포라 - 고국을 떠나 흩어진 사람들 입니다.
요기를 누르시면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1971년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통령 선거가 있기 한달 전, 대규모 간첩사건이 터집니다. 재일동포 형제 간첩단 사건인데요.... 일본에서 태어나 한국으로 유학온 서승, 서준식 형제가 그 주인공입니다. 서울대 재학 중이던 그들은 분단된 조국의 반쪽에도 가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일주일 북을 다녀왔습니다. 그 댓가는 무려 19년과 17년의 깜방 생활.....
형이 스물 다섯, 동생인 서준식은 스물 두살의 이야기입니다. 간첩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억울한 청년들이 인생의 가장 황금 시기를 옥살이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잡혀 들어간 후의 이야기야 말 할 것도 없겠죠. 형인 서승은 고문에 거짓 자백을 할까봐 난로를 끌어 안고 자살 기도까지 했는데... 서준식은 최초의 비전향 장기수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꼭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자식이 재판을 받던 날, 부모는 서울까지 방청하러 갔다. 거기서 아버지가 목도한 것은 심한 화상으로 얼굴에 붕대를 둘둘 감은 아들의 모습이었다. 말없이 교토의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가 방바닥에 퍼질러 앉아 다다미를 치며 호곡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 P 305 재일조선인 내 아버지의 초상 중에서
이 책의 저자는 위의 저 두사람의 막내 동생입니다. 지금은 일본의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 아픈 가족사와 더불어, 일본에서 귀화하지 않은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로도 쉽지 않았을텐데,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깊은 사고를 가진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한 디아스포라로서 저자가 가진 생각을 우리에 고백함으로써, 잔잔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한국군은 반공의식에 불타 진심으로 싸우고 진심으로 죽였다"
낡은 책 속 증언과 베트남 농민의 싸늘한 시선에 가슴속 통증이 도졌다.
그들이 사죄를 요구한다면 한국은 일본의 과오를 답습할 것인가?
- P 95 베트남 전쟁은 끝났는가 중에서
미셸 크레이피, 에이알 시반 두 감독의 <루트 181>이 야마가타 국제 타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것을 진심으로 반기는 한편 동시에 이런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인들과 마찬가지로 분단과 이산을 경험애온 우리는 이 작품에 버금가는 수준 높은 다큐멘터리 작품을 과연 갖고 있을까? 유감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 P 83 망령이라도 되어 싸우리라 중에서
만년의 윤이상 선생은 고향 바다에 조용히 낚싯줄을 드리우고 마음속에 끝없이 흐르는 음악에 지그시 귀를 기울이며 살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민족분단의 가혹한 현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선생 자신도 마지막까지 타협하지 않고 객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 P 176 통영, 그 앞바다 중에서
김구는 조심스럽게 말해 '실패자'이고 <백범일지>는 '패배자의 이야기'다. 바로 그 점이 나로서는 흥미롭고, 그런 인물을 존경하는 조국 사람들은 '승자의 이야기'만 좋아하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인정할 만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P 246
언젠가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베트남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해야 하고, 내가 만난 또 다른 디아스포라인 팔레스타인들은 우리가 배웠듯 좋은 친구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나쁜 놈'이 전혀 아닐 뿐더러 오히려 그들이 훨씬 더 선량한 사람들이며 우리가 관심을 더 기울어야 하며, 윤이상 선생의 자서전 <상처 입은 용>을 읽고 그 분의 생애도 흥미가 생겼고, 백범일지도 다시 한번 보고 이봉창 선생과의 만남도 유심히 봐야겠고..... 이 책은 여러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하고 또 다른 생각거리를 줍니다. 이런게 책을 읽는 맛이겠지요.
억울하고 아픈 시대를 살았던 형제의 슬픈 가족사를 알게 되었고, 또 그런 아픔을 극복하고 사물과 사람을 깊이있게 보고, 본질을 파악하는 교양과 지혜를 가진 서경석 교수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옮긴이의 후기에 나와 있듯, 어쩌면 이런 디아스포라적 상황이야말로 저자에겐 오히려 창조와 자기확장의 절호의 발판, 무한이 열린 가능성의 장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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