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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독립운동의 잊힌 인물을 찾아서 : 임경석 <독립운동 열전 02>

by 개락당 대표 2026. 1. 3.

 

 

 

1. 일제강점기 여성 혁명가의 으뜸, 박원희 (1898~1928)

 

24p

부부는 합법 공개 영역의 활동도 중시했다. 용정에 설립한 동양학원과 영고탑에 세운 대동학원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이 학교들은 서울파 공산 그룹이 사실상 주도하는 합법 교육기관이었다. 특히 동양학원은 급진적 학생운동의 진원지와 같은 역할을 했다. 1923년 5월에는 동양학원 학생회 주최로 강연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현대의 모순을 어이할까>, <현대와 종교>, <지상천국>이라는 제하의 강연을 맡았던 세 학생이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뒷날 이 경연회는 북간도 사회운동의 효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박원희는 김사국의 아내이자 혁명가였다. 김사국은 1920년대 우리나라 사회주의 운동의 양대 산맥이었던 서울파의 지도자로 화요회와 대립했다. 화요회의 주도로 1925년 조선공산당이 탄생할 때 김사국의 서울파는 배제되었다. 김사국은 만주와 러시아 등을 오가며 조선공산주의운동을 위해 젊음을 바쳤다.

 

박원희는 1924년 주세죽, 허정숙, 김필애 등과 함께 조선여성동우회를 만들었다.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여성단체다. 그들이 주장한 건 18세 이하의 조혼 금지, 청소년 8시간 이상 노동 금지, 산모의 무료 요양서 설립 등이었다. 병을 얻어 아쉽게도 30살에 생을 마감했다. 김사국 역시 병으로 1926년 사망했다. 김사국의 동생 김사민도 서울파의 지도자였지만 감옥에서 고문으로 병신이 되었다.

 

어떤 책에서 박원희가 일제강점기 여성 혁명가로 으뜸이라는 평가를 읽었다. 이 책에서 박원희의 분량은 아주 많지는 않다. 더 공부해 볼 요량이다. (김사국, 사민 형제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했다. 다른 글에서는 1920년대 사회주의자 넘버 원이라고 나온다. 두 형제의 재발견이다.)

 

1928년 1월에 거행된 박원희 장례식 행렬 (당시 동아일보 기재 사진) 사진 출처 : https://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106879

 

 

2. 스탈린 광기에 희생된 혁명가, 김단야 (1899~1938)

 

62p

나는 도쿄 조선인 유학생들의 선언문 사본을 입수하여 그것을 일일이 손으로 필사해서 많은 복본을 만든 후 그것들을 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나누어주고, 경성에 있는 모든 고등보통학교의 대표들로 구성된 지하 학생위원회의 조직자로 활동했다. 이 위원회는 3월 봉기를 준비하는 센터와 연락을 취하면서 시위에 학생 대중을 동원하고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위원회 멤버들은 자기들끼리 역할을 분담하여 선언서를 외국 영사관과 선교단에 전달했고, 나도 그것을 영국 영사 및 프랑스 선교사에게 직접 전해주었다. (김단야가 생애 말년에 쓴 혁명운동 참여 이력에 관한 글 중의 일부)

 

열아홉 살이 되던 1919년, 배재보통고등학교 3학년 김단야의 활동이다. 거듭 말하지만 열아홉 살이다. 3.1운동의 숨은 공로자라고 저자는 강조했다. 이후 실력과 인품, 열정과 담대함으로 조선공산당 최고위급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다. 여러 책에서 그의 활약이 언급되지만, 하이라이트는 조선희 선생의 소설 <세 여자>였다. 주세죽과의 절절했던 사랑도 자세하게 나온다. 

 

하지만 스탈린의 광기는 피하지 못했다. 그도 예견을 했다. 레닌이 죽고 1년이 지난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레닌이 살던 그런 나라이 그리웁다. 아, 언제나 과연 나의 앞에도 평탄한 길이 열릴 것인가."

 

김단야가 한국학부장으로 근무하던 동방노력자대학 건물. 사진 출처 : 작가 칼럼.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4730.html

 

 

3. 무산 계급이자 민중 세력의 지도자, 홍범도 (1868~1943)

 

119p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홍범도 의병부대가 쇠락하게 된 이유가 양반 의병장의 독단 탓이었음이 명백했다. 의병 중에서도 가장 우수한 전투력을 보유했던 함경도 부대를 패퇴시킨 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한국의 양반 출신 의병장이엇다. 오히려 적군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홍범도는 참았다. 지도자 간의 분쟁은 민족해방운동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연추 주민들의 여론이 그에게 위한을 줬다. '이범윤 죽일 놈'이라고 욕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방현석 작가의 소설 <범도>에서도 이범윤과 홍범도가 아슬아슬한 관계이더만, 이 책에서 작가는 대놓고 이범윤을 탓한다. 이범윤은 대한제국 황제가 임명한 고위 공직자였다. 간도 관리사인 그는 홍범도 같은 평민 의병장은 마땅히 자신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범윤은 그렇다치고, 홍범도의 태도가 돋보인다. 절대 동포끼리는 싸우지 않았다.

 

아래 사진의 링크는 작가의 다른 글인데, 연해주에서 문창범을 비롯한 추풍4사의 원호들, 그리고 이범윤의 관리병들에게 홍범도가 공격을 받고 핍박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계급투쟁의 발현이라고 했다. 문창범으로 대표되는 지주와 부농층, 그리고 고위 관료인 이범윤 세력이 무산 계급이자 민중 세력인 홍범도를 억압했다고 썼다. 

 

1910년대 초 연해주 망명 시기의 홍범도. 사진 출처 : 작가 칼럼 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632.html

 

 

 4. 시베리아 3대 재사才士의 한 명, 박진순 (1898~1938)

 

150p

혁명운동의 동지들은 어떻게 보았을까? 사회주의운동사에 관한 폭넓은 회고담을 남긴 노년기 김철수의 증언에 따르면, "시베리아 3대 재사의 하나인데, 그 사람이 나보다 세 살 덜 먹었는디, 참 똑똑한 사람"이었다. 재사란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러시아 파르티잔스크 출신, 아버지는 이동휘와 친구, 파르티잔스크 조선인 학교에서 초등학교를 나오고 러시아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9세에 초등학교 교사 자격을 얻어 조선인 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 후 교직을 그만두고, 이동휘가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자 구명 운동에 힘썼다. 혁명은 젊은 박진순에게 충격이었으며, 그도 20살에 사회주의 혁명가가 되었다. 이 책에서는 한인사회당을 만들 때까지만 서술하고 있다. 

 

전로한족총회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 한명세, 김야꼬프, 문창범 등은 반소비에트 다수파였고, 볼셰비키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소수파였다. 다수파는 원호들이었고, 소수파는 여호(남을 여餘자를 쓴다. 연해주에 건너간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을 뜻하며 노동자였고 가난했다.)였으며 대략 7대 3으로 나뉘었다. 70퍼센트의 다수를 점한 원호 그룹은 러시아 임시정부 지지를 선언했다. 작가는 훗날 상해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의 갈등,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분쟁 또한 여기에 연원을 두고 있다고 썼다.

 

연해주 독립운동단체 중에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한 것이 한인사회당이다. 그 중에서 박진순의 활약은 눈부시다. 레닌과 겸상을 할 정도였으니. 그래서 레닌에게서 금화 200만 루블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 중 40만 루블을 받아냈다. (이후의 결과는 아시는 바와 같이 서로 물고 뜯고 난리가 났다.) 박진순도 스탈린의 광기를 피하지 못하고 1937년에 체포되어 그 이듬해 총살되었다. 

 

레닌과 겸상하던 시절의 박진순. 심지어 이때가 스물두 실이었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

 

 

5. 청순가련의 사회주의 투사, 주세죽 (1898~1953)

 

244p

2017년 들어 더욱 이채로운 일들이 일어났다. 주세죽을 소재로 한 장편 소설이 연이어 출간되더니 나란히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봄에 <코레예바의 눈물>을 쓴 손석춘 작가가 제2회 이태준문학상을 수상했다. 코레예바는 주세죽이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썼던 이름이다. 가을에도 수상작이 나왔다. 주세죽과 그녀의 두 벗의 삶을 문학적 상상력에 의거하여 형상화한 <세 여자>가 출간됐다. 이 책을 지은 조선희 작가는 요산김정한문학상 제34회 수상자로 선정됐다.

 

놀랍다. 오랫동안 망각 속에 잠겨 있던 인물이 이처럼 급격히 부상하다니 말이다. 돌이켜보면 이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이미 그녀는 문학작품의 소재가 된 바 있다. 1930년에 신문 연재 소설 형식으로 발표된 심훈의 장편소설 <동방의 애인>이 바로 그것이다. 주세죽을 모델로 한 문학작품으로는 아마 첫 자리를 점할 것이다. 

 

주세죽은 함흥 부잣집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공부하고 상해에서 유학했다. 박헌영과 결혼하고 공산당 활동으로 수 차례 투옥되었다. 남편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으로 탈출하여 모스크바에서 공부했다. 상해로 돌아왔으나 남편은 또 잡혀 조선으로 보내졌다. 주세죽은 김단야와 모스크바로 갔고 함께 살았다. 김단야가 처형된 이후 카자흐스탄으로 유형을 가서 5년을 복역했다.

 

박헌영과 주세죽의 모스크바 시절은 빛나는 황금기였다. 그 시절 둘은 코민테른으로부터 숙소와 생활비를 받으며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 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박헌형은 국제레닌대학을 다녔다. 국제레닌대학은 코민테른 비서부가 직영하는 최상급의 간부를 위한 학교로 조선인으로 이 대학에 다닌 사람은 모두 6명이라고 작가는 썼다. 그 6명이 누굴까. 저 정도의 학교를 나왔으면 분명 최고위급 지도였을텐데. (구글 검색과 제미나이와 쳇지피티도 별 신통치 않다. 박헌영 김단야는 알겠는데, 나머지는 알 수가 없다. 북한 정권으로 갔을까.)

 

박헌영과 김단야는 둘도 없는 동지이자 친구였다. 하지만 성격은 완전 반대였다. 박헌영이 침착하며 사려깊고 주도면밀한 반면 김단야는 서글서글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주세죽은 이 둘 모두의 연인이었다. 주세죽의 일생은 그 자체가 하나의 비극의 드라마다. 하지만 책에서는 사회주의 투사임을 더 강조했다. 

 

상하이 시절의 박헌영과 김단야. 그리고 그들의 연인 주세죽. 한 장의 사진에 모두 들어있다. 사진 출처 : 작가의 칼럼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36/0000042091

 

 

6. 3.1 운동기 여성의 투쟁과 수난의 상징, 김마리아 (1891~1944)

 

256p

김마리아는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지 못했다. 30분을 못 넘겼다. 의자에 앉았다가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다른 빈자리를 찾아 옮겨 앉았다. 때로는 자리에 앉았다가 서 있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회의장의 어느 누구도 그의 산만한 행동을 질책하지 않았다. 그러한 행동이 무엇 때문에 초래된 것인지를 다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질책을 커녕 연민과 동정의 시선으로 그를 대했다. 

 

김마리아는 1919년 2.8 도쿄유학생 독립선언에 참여한 후 선언문을 몰래 가지고 귀국하여 돌렸고(일부러 기모노를 입고 오비에 종이를 숨겼다고 한다.) 여학생 조직을 만들다 체포당해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 고문에 몸이 상해 평생 건강 문제로 고생을 했다. 출감 후에는 무장 투쟁을 염두에 둔 애국부인회를 재조직했다. 하지만 곧 체포되어 더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후 고문 후유증으로 병보석을 받았고 상하이로 탈출했다. 이후 미국 유학을 떠났다.

 

안창호는 김마리아 같은 여성이 열 명만 있었다면 한국은 독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책에는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인 김철수와의 관계가 자세하게 나온다. 둘은 가깝게 지냈고 주위에서 결혼을 권유했는데, 김마리아도 김철수도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김철수는 이미 기혼자였고, 만약 결혼을 하게 되면 김마리아는 기혼남의 첩 신분이 되는 것이고, 조선이 낳은 혁명 여걸을 모욕하는 일이라 생각하여 김철수는 거절했다. 김철수는 노인이 되어서도 김마리아의 사진을 품고 다녔다고 책에 나왔다.


1923년 파크대학교 졸업식에서의 김마리아. 사진 출처 : https://blog.naver.com/phjoo5504/220645007983

 

 

7. 소련에 의해 희생된 부부 혁명가, 박신우와 김규열

 

286p

P-37539 사건은 바로 '소련 국가폭력에 의한 조선공산당 서상파 망명자 그룹 탄압 사건'이었다. 소련 정치보위부는 피억압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한 혁명가들에게 '일본제국주의의 스파이'라는 모욕적인 범죄의 낙인을 찍었다. 체포 6개월 뒤 사건 관련자 가운데 김규열, 김영만, 김중한에게 총살형이 집행됐다. 1934년 5월 21일이었다. 다른 두 사람은 한두 등급 아래 처분을 받았다. 윤자영은 노동수용소 8년 징역형, 박신우는 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1927년, 사회주의 여성 세력과 민족주의 여성 세력이 손을 잡고 여성의 지위 향상과 항일 투쟁에 동참하자는 취지로 결성된 여성 운동 단체 근우회가 만들어졌다. 박신우는 근우회의 활동 계획 전반을 설계한 책사로 왕성한 활동을 했다. 김규열은 러시아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운동에 매진했다. 그리고 해박한 지식으로 최익한과 함께 당시 사회주의 양대 진영의 이론적 대표자로 활약했다.

 

그리고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근거지로 하며 조선공산당의 해외 부문 사업을 펼치고 있던 1933년, 소련의 비밀 경찰에 체포되어 김규열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박신우는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저자는 노동수용소 이후 박신우의 운명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하며 관심을 갖고 주시한다면 언젠가 드러날 때가 있을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박신우, 김규열 부부를 비롯하여 소련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은 곧 조선혁명에 헌신했던 사람들이며, 이들의 헌신을 지금처럼 계속 잊고 살아도 좋은가? 라고 반문했다. 작가의 견해에 깊이 공감한다. 

 

1922년~23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한 학생 명단. 네 번째가 박이니이사(박신우), 열여섯 번째가 김규열이다. 재학 중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다. 이런 자료는 어떻게 구했을까. 자료 출처 : 작가 칼럼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48565.html

 

 

김한, 김창숙, 조훈, 박종근, 박영발, 방준표, 이덕요, 송계월, 강용흘, 장재성, 장석천, 허성택, 최팔용, 홍도, 김중한. 책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거의 다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책 속에 나오는 인물들의 독립 활동 내용은 그야말로 드라마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사회주의자들이다. 우리나라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그래서 더 모르고 있던 사람들이다. 작가는 역사 속에서 잠자던 그들을 불러냈다. 그리고 그 뜨거운 생애에 빛을 밝혔다. 

 

책을 덮고 나면 책 속의 인물들은 기억에서 점차 멀어질 것이다. 그래도 다음에 그 이름을 만나면 반갑다며, 그게 아니더라도 전에 들었던 이름인데, 하고 다시 쳐다볼 것이다. 

역사의 차가운 그늘에 있던 수많은 영웅을 불러낸 작가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