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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29

국방부 놈들아, 너희들은 이 책을 읽었느냐? : 방현석 <범도> 1. 김알렉산드라 알렉산드라는 우리와 얘기를 나누는 중간에 몇 차례나 걸려온 전화를 받고 유창한 러시아어와 중국어, 조선어로 지시를 내렸다. 그녀는 그때마나 우리에게 양해를 구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서는 진심이 묻어났다. 달라지지 않는 그녀의 태도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려주었다. 로씨아혁명의 지도자 레닌이 왜 그녀를 신뢰하고 칭송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2권 389쪽)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책에서는 김수라라고 홍범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하바롭스크에 들어선 극동 소비에트 인민정부의 외무장관으로 나온다. 소왕령(우수리스크)의 흰파 문창범과 하바롭스크의 붉은파 김알렉산드라가 홍범도에게 초대장을 보냈고, 홍범도는 알렉산드라를 택했다. 독일 첩자로 몰린 이동휘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기 직전 .. 2024. 10. 22.
태어나보니 안중근의 아들이라면.... : 김훈 <하얼빈> 김아려 (1878~1946) 아려, 이름이 참 예쁘다. 1894년 안중근과 결혼해서 딸 현생과 아들 분도, 준생을 두었다. 거사 직전 아들들을 데리고 하얼빈으로 갔고, 도착하자마자 남편이 이토를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제에 잡혀 갇히게 되고, 곡절 끝에 풀려나 도주하여 러시아 꼬르지포 인근 조선인 마을 목릉 팔면통에 정착했다. 1910년에 남편이 처형당하고, 그 이듬해인 1911년에 큰아들 분도가 일곱 살로 죽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상해에 들어서자 상해로 이주했다. 중일 전쟁 이후에 계속 중국에 남아 있었고,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상해에서 죽었다.  김아려의 심정을 듣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김아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어떤 기억이나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고 김훈 선생은 책에서 말했다.   .. 2024. 9. 24.
무림 최강자가 되기 위한 잎싹의 여정 : 황선미 김환영 <마당을 나온 암탉> 잎싹은 슬쩍 마당을 봤다. 늙은 개와 역시 늙은 수탉과 암탉, 날기를 포기한 오리 몇 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닭장에서 나가기만 하면 마당의 저들을 제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닭장이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여기서 탈출하기란 불가능했다. 닭장을 들락날락하던 주인을 유심히 관찰한 잎싹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죽은 닭이나 알을 낳지 못하는 닭은 낡은 수레에 실려 나갔다. 잎싹의 머리는 번개같이 회전했다. 그날부터 잎싹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배가 고파서 미칠 것 같았지만, 닭장을 탈출할 수 있다면야. 단식 닷새째가 되니 모가지를 가눌 수 없게 되었다. 다리에 힘도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이거, 닭장을 나가기 전에 먼저 죽는 거 아냐?"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 2021. 8. 19.
나를 이루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 황정은 <연년세세> 바쁘다. 바쁘게 하루의 쳇바퀴가 돈다. 학교 수업, 과외 수업, 이틀 걸러 도자기도 구워야 되고, 의무적으로 읽어야 하는 책도 많다. 세금계산서, 견적서, 남품서 등 서류도 많고. 그렇게 바쁘게 돌아간다. 바쁘게 돌아간다는 핑계로 나를 이루는 세상에 대해 심드렁하다. 어머니는 진주의 상류층에서 스물 다섯에 시골 대가족에 시집을 와서 굴곡의 시간을 보내고 그 상처로 지금 치매를 얻었다.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간다. 자존심은 또 강해서 병원에는 결코 가지 않으시려고 한다. 어머니의 인생이 이렇게 마감하나 싶으면 그저 안스럽다. 그럼에도 자주 찾아보지 못한다. 바쁘다고. 동생이 암에 걸렸다. 수술과 항암치료를 병행했다. 머리는 빡빡 밀었다. 피부가 갈라지고 야위어 갔다.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 동생은 괜찮다며 .. 2021. 7. 4.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 정유정 <진이, 지니>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 정유정 보노보 영장목 서성이과에 속하는 유인원으로, 인간과 가장 유사한 DNA(98.7% 일치)를 가졌으며, 학계 일부에서는 현존하는 세 영장류(침팬지, 인간, 보노보)의 '원형'과 가장 닮은 꼴로 본다. 침팬지보다 체구가 작지만 공감 능력은 훨씬 뛰어나며, 온순하고 쾌활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적이고 다소 공격적이며 수컷 중심 사회를 이루는 침팬지와는 달리, 연대와 평화를 중요시하고 암컷 중심 사회를 이룬다. 무리 간의 성생활이 자유롭고, 성을 연대와 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특성을 갖는다. (p.6) 요렇게 생긴 넘이다. 보노보라는 동물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암컷 중심 사회를 이룬다고? 그래, 그게 맞다.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는 모계 사회가 부.. 2020. 10. 5.
나도 읽었습니다. 한국 최초 맨부커상 수상작을.... : 한강 <채식주의자> 나도 읽었습니다. 한국 최초 맨부커상 수상작을.... : 한강 맨부커상 (Man Booker Prize Fiction) 영국에서 출판된 영어 소설을 대상으로 그 해 최고 소설을 가려내는 영국의 문학상. 2005년부터 맨부커 국제상 (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이 추가로 만들어졌다. 노벨 문학상, 프랑스 콩쿠르 문학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불린다. (남편이 보기에) 특별한 매력이 없는, 그렇다고 특별한 단점도 없는, 단지 브래지어 하기를 싫어하는 것이 남들과 다른 정도인 영혜는 어느날 갑자기 잘 먹던 고기를 아얘 먹지 않습니다. 먹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냉장고에 있던 모든 고기며 심지어 계란까지 내다 버립니다. 남편이 원인을 캐묻자, 영혜는 '꿈'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 2020. 9. 16.
냉담해지지 말고, 지치지 말고 :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냉담해지지 말고, 지치지 말고 : 김연수 예를 들어 어떤 꿈들인가? 우선은 시집을 한 권 내고 싶었지. 제목은 사슴이면 좋겠고. 그건 이뤄졌고. 그 다음은? 시골 학교 선생이 되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으면 싶었고. 촌동네 소반처럼 소박하네. 그리고? 착한 아내와 함께 두메에서 농사지으며 책이나 읽고 살았으면 하지. 또? 그게 다야. (p.223) 오래 전에 젊은 시절 시인 백석의 흑백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와, 진짜 잘 생겼네." 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 시는 또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를 읽고는 "이야, 야반도주를 이렇게 하자고 하면 따라가지 않을 여자가 있을까?" 하고 생각도 했더랬습니다. 시집을 내고, 시골 학교 선생이 되고, 착한 아내와 두메 산골에서 책 읽으며 살고 싶어했던 백석, .. 2020. 9. 13.
김동식의 소설보다 김동식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 김동식 <회색 인간> 김동식의 소설보다 김동식의 인생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 : 김동식 김동식 1985년 경기도 성남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주민등록증이 나왔을 때, 바닥 타일 기술을 배우기 위해 대구로 독립해 나왔다. 2006년에 서울로 올라와 성수동의 주물공장에서 10년 넘게 일했다. 2016년부터 온라인 커뮤니티 공포 게시판에 창작 글을 올리기 시작해, 3년 동안 500여 편이 넘는 단편소설을 집필했다. 2017년 12월 , , 를 동시 출간하며 데뷔하였고, 그 후 6권을 더 출간하여 총 9권의 소설집을 펴냈다.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소개글이다. 주물공장에서 공돌이를 하다 혜성같이 나타난 소설가. 김동식 작가는 예전에 의 김민섭 작가 강연에서 처음 들었다. 아주 특이한 이력을 가진, 아주 특이한 소설을.. 2020. 6. 23.
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시궁창이라구 : 이응준 <국가의 사생활> 통일은 대박이 아니라 시궁창이라구 : 이응준 유럽을 여행할 때 주로 기차를 이용했다. DB라는 독일 기차앱과 SBB라는 스위스 기차앱을 사용했는데 출발지와 도착지를 입력하면 연결편이 자동으로 쭉 나온다. 예를 들면 스위스 몽트뢰 출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도착으로 찍으면 로잔, 베른, 프랑크푸르트에서 갈아타고 총 12시간 37분이 걸린다고 나온다. 무지 편하다. 가끔 기차가 연착해서 탈이지만. 이걸 이용하다가 혹시나 하고 도착지를 평양으로 입력해봤다. 그랬더니..... 우왓! 결과가 나온다. '베를린 ~ 바르샤바', '바르샤바 ~ 모스크바', '모스크바 ~ 우수리스크', '우수리스크 ~ 평양'으로 나온다. 순수하게 기차를 타는 시간만 98시간 걸린다고. 하, 신기하다. 이 앱 대단한 걸. 근데, 가능하구.. 2020. 6. 15.
우리가 빛의 속도로 읽을 수 없다면 :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읽을 수 없다면 : 김초엽 고백하건데 김초엽 작가는 이름도 생소했을 뿐더러 북콘서트에 가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김해시에 등록되어 있는 독서모임은 의무 참석이라는 협박?이 와서 신청했고, 그래서 책도 샀더랬습니다. 빛의 속도로 책을 읽고 빛의 속도로 자전거를 타고 율하도서관에 갔습니다. 스물댓 명이 참석했습니다. 근데 모두 여잡니다. 사람 모이는 자리는 원래 불편해서 잘 가지 않는데, 청중도 여자고 작가도 여자고, 남자라곤 사회를 보는 이와 시에서 나온 관계자처럼 보이는 사람 뿐입니다. 이거 어떡할겁니까. 갑자기 불편해졌습니다.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강의가 막 시작할 무렵에 나이가 좀 있으신 남자 청중이 한 분 들어오시더군요.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작가는.. 2020. 6. 13.
작가님. 이걸 대하소설로 만들어줘요 : 장강명 <한국이 싫어서> 작가님. 이걸 대하소설로 만들어줘요 : 장강명 이 책에 대한 장강명 작가의 인터뷰 요약 (채널 예스 인터뷰 기사에서 발췌) Q. 제목이 특이하다. 이렇게 지은 이유는 ? A. 보통은 제목만 봐서는 내용을 모르게 하자는 마음으로 짓는다. 근데 이 제목으로 해야겠다는 계기가 있었다. 안현수의 귀화 사건. 빅토르 안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이었다. 아, 국가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사람이 많구나, 그러면 그 이야기를 쓰자, 제목도 로 하자, 고 마음 먹었다. Q. 주인공을 20대 여성으로 설정한 배경은? A. 한국 사회가 젊은 여성을 2등 시민으로 취급한다고 생각한다. 젊은 여성들이 외국 생활을 동경하는 이유가 단지 '외국병'에 걸려서가 아니라 한국 사회가 이들을 공정하게 대하지 않아서라고 본다. 그래서 20.. 2020. 6. 1.
민생단 사건, 그 기막힌 사연 : 김연수 <밤은 노래한다> 민생단 사건, 그 기막힌 사연 : 김연수 민생단 사건 간도 지역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의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중국 공산당에게 살해된 사건. 일제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이 수립되자 한·중 민족을 분열시키고 항일유격대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일제는 민생단을 조직했다. 민생단의 스파이들이 항일세력 내에서 '간도 자치'를 내세우며 분열공작을 획책하자 항일유격대세력들은 스파이를 색출하기 위한 반민생단투쟁을 전개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위원회와 항일유격대의 지도직을 차지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민족배타주의에 빠져 한국인 항일투사의 대부분을 민생단으로 간주해버렸다. 그 결과 500여 명의 항일운동가들이 체포·살해되었으며, 많은 하부조직들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항일세력 내에 막대한 피해를 가져다준 반민생단.. 2020. 4. 23.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 김연수 마흔세 살이란 이런 나이야. 반환점을 돌아서 얼마간 그 동안 그랬듯이 열심히 뛰어가다가 문득 깨닫는 거야. 이 길이 언젠가 한번 와본 길이라는 걸. 지금까지 온 만큼 다시 달려가야 이 모든 게 끝나리라는 걸. 그 사람도 그런 게 지겨워서 자살했을 거야. (p.68)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봤다.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이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 거리에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됐다. (p.87) 어이없게도 삶은 단 한 번만 이뤄질 뿐이며,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2020. 4. 11.
역사가 우릴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이민진 <파친코> 역사가 우릴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이민진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세 권의 책을 올렸습니다. 빌 게이츠의 아내 멀린다 게이츠의 , 머윈의 , 그리고 이민진의 입니다. "첫 문장부터 사람을 사로잡는 아주 매혹적인 책" 이라고 추천했습니다. 오호라. 이민진은 1970년, 함경도 원산 출신의 아버지와 부산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자신을 2개의 코리아, 즉 남북의 아이라고 불렀다는군요. 일곱 살이 되던 해 미국으로 이민 가 미국인으로 살고 있지만 영어 이름 대신 어릴 때부터의 한국 이름을 고수합니다.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 미국에서는 아주 가난했다고 합니다. '쥐가 나오는 방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습니다. 빠듯한 사정에도 .. 2020. 3. 5.
누구나 그저 조금씩 외로운 것뿐이야 : 윤대녕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누구나 그저 조금씩 외로운 것뿐이야 : 윤대녕 누구나 그저 조금씩 외로운 것뿐이야.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도 때로 불안할 때가 있는 것처럼. 이젠 스스로 불안을 잠재우는 수밖에 없어. 안타깝지만, 그건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일이야. # 윤대녕 내가 읽은 윤대녕의 첫 소설은 다. 제목이 거시기 해서 기억한다. 꽤 오래 전이라 내용은 머리 속에 남아있지 않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은근했다. 좌충우돌하는 서사는 없지만 몽환적이고 담담하면서 쓸쓸하고 아련한 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 , 등을 비롯한 여러 소설을 읽었다. 가장 최근에 읽은 것은 도시 난민의 사랑을 다룬 이다. 며칠 전 서점에서 우연히 이 책 를 발견했는데, 재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바로 집어들었다. 윤대녕 소설이니. # 존재의 시원 일상으로.. 2018. 11. 4.
너는 이 세상에 살아서는 안 될 놈이야 : 정유정 <종의 기원> 너는 이 세상에 살아서는 안 될 놈이야 : 정유정 집중할 일이 생기면 오히려 호흡이나 맥박의 속도가 뚝 떨어졌다. 얌전하거나 유순하거나 참을성이 많아서가 아니라, 흥분의 역치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는 유진의 심장이 뒤려면 특별한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혜원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겁이 났다. (p.259) '피 냄새가 잠을 깨웠다.'로 소설은 시작한다. 잠이 깬 유진은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을 하고, 침대, 이불, 배게가 온통 피로 물들여 있고 자신의 옷에도 선지처럼 응고된 핏물이 붙어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란다. 피 냄새는 발작 증세의 신호가 아니라 진짜 피였다. 도대체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핏줄기가 타고 흐른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보니 주방 .. 2018. 7. 15.
혁명가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의 찬란하고도 곡진한 일대기 : 조선희 <세 여자> 혁명가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의 찬란하고도 곡진한 일대기 : 조선희 우리 3인은 본래 동지로서 친구로서 단발하기로 작정하기는 이미 오랜 일이었습니다. 서로 깍기로 언약하고에 곧 머리를 풀고 긴 것만 추려서 집었습니다. 자르고 나니 머리숱이 퍽 많아 보였습니다. 3인 중에서 제일 먼저 자른 사람은 나였습니다. 머리를 잘리우는 그 자신은 쾌활한 용기를 내어가지고 아무렇지도 않았으나 손에 가위를 들고 남의 머리를 자르는 그때는 이제까지 잠재하였던 인습의 편영片影이 나타나며 몹시 참담하고 지혹至酷한 느낌을 아니 가질 수 없었습니다. 삽시간에 3인은 결발의 신여성으로부터 단발랑 송락머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다 깎은 뒤에 서로서로 변형된 동무의 얼굴을 쳐다보며 비장하고도 쾌활미가 있는 듯 웃어버렸습니다. 웬일인지 서로.. 2018. 2. 25.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 김훈 <공터에서>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 김훈 소총 가늠구멍 속에서, 잇달린 산들이 출렁거렸다. 바람이 산봉우리를 훑어서 고지마다 눈이 회오리쳤다. 바람은 눈보라를 몰아서 동해로 나아갔다. 천지간에 눈 비린내가 자욱했다. 달이 뜨자 골짜기의 어둠이 더 짙어졌고 눈 덮인 봉우리에 푸른빛이 스몄다. 팽팽한 밤하늘에서 별들이 추위에 영글어갔다. 밝은 별 흐린 별이 뒤섞여 와글그렸는데, 귀 기울이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 덮인 산맥은 인간과는 무관하게 출렁거렸으나 그 흐린 산맥이 인간을 향해 내뿜는 적개심을 초병들은 감지하고 있었다. (p.15) "마 상병, 팔 굵어졌네." 박상희의 입에서 흰 김이 새어 나왔다. 마차세는 박상희의 김을 들이마셨다. 김은 풋것의 냄새로 비렸다. 마차세는 밤 10시에 귀.. 2017. 10. 20.
공감의 유대, 서로에게 기대고 기댐을 받는 것 : 최은영 <쇼코의 미소> 공감의 유대, 서로에게 기대고 기댐을 받는 것 : 최은영 # 1. 할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냥 한두 시간만이라도 텔레비전을 끄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평생 좋은 소리 한 번 하는 법 없이 무뚝뚝하기만 했는데 그게 고작 부끄러움 때문이었다니. 죽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부끄러움을 죽여가며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걸 사내답지 않다고 여기며 깔보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가끔씩 그런 통제에도 불구하고 비어져나왔던 사랑의 흔적들이 있었다. (p.47 단편 중에서) # 2. 아줌마라고 해서 엄마의 모든 면이 아름답게 보였을까. 엄마의 약한 면은 보지 못했을까. 아줌마는 엄마의 인간적인 약점을 모두 다 알아보고도 있는 그대로의 엄마에게 .. 2017. 7. 30.
74년생 최영주에게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74년생 최영주에게 : 조남주 아내에게 며칠전에 한 권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소설이라면, 좀 특별한 주인공이 겪는 좀 더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일반적일텐데, 이 소설은 조금 이상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82년에 태어나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오고, 적성에 맞게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취업의 어려움을 약간 겪다 회사원이 되고, 그러다 결혼을 하고 예쁜 딸아이를 낳고 주부가 되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여성이야기입니다. 이 평범한 여자의 이름은 김지영입니다. 평범한 여성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인데, 이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김지영 씨가 우리나라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게 이토록 만만치 않은 일인줄은..... 근데 이 김지영 씨 이야기가 자꾸 내 머리 깊은 곳에 있는, .. 2017. 5. 25.
모든 주정뱅이들의 안녕을 위하여 :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모든 주정뱅이들의 안녕을 위하여 :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첫 단편 '봄 밤'부터 피를 말리고, 혼을 뺀다. 압도를 넘어 무아無我적 상태로 독자를 이끈다. 나란 존재를 완전히 잊는, 그리하여 이야기에 '익사'시켜 버리는 흡입력, 정교한 플롯과 독보적 문체, 깊이의 정체가 궁금하다. '봄 밤'의 주인공은 사지死地에 내몰린 남자와 여자다. 이 지옥에서, 이 폐허에서도 둘은 사랑에 빠진다. 권여선식 사랑은 부비고, 핥고, 자는 것을 넘어 '의지'에 이를 때 완성된다. 살 이유 없는 인생인데, 서로가 있어 살려 한다. 그랬더니 또 살만해진다. 바닥을 치고, 또 바닥을 치고, 더 이상 칠 바닥조차 없는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랑한 남녀의 이야기다. "그는 마흔세살에 영경을 만난 후로 취한 영경을 집까지 업어 .. 2016. 9. 25.
저녁이 되면 다들 집으로 돌아올 겁니다 : 윤대녕의 피에로들의 집 저녁이 되면 다들 집으로 돌아올 겁니다 : 윤대녕의 피에로들의 집 수년 전부터 나는 도시 난민을 소재로 한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가족 공동체의 해체를 비롯해 삶의 기반을 상실한 채 실제적 난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타인과의 유대과 붕괴되면서 심각하게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존재들이다. 나는 이 훼손된 존재들을 통해 새로운 유사 가족의 형태와 그 연대의 가능성을 모색해보고 싶었다. 이는 삶의 생태 복원이라는 나의 문학적 지향과도 맞물리는 것이었다. - P 247. 작가의 말 중에서 윤대녕 아저씨의 소설은 예전부터 좋아해서 즐겨 읽었습니다. 대설주의보, 은어낚시통신, 도자기 박물관, 남쪽 계단을 보라.... 등. 즐겨 읽긴 했지만, 여태 내용이나 줄거.. 2016. 3. 28.
만그이가 머라고 했길래?? :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만그이가 머라고 했길래?? :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돌아가신 울 할매가 우리집을 짓고 이탠가 후에 그 집에서 울 아부지를 낳았습니다. 물론 그 집에서 저도 태어났습니다. 아직 울 엄니 뱃속에 있을 때, 여느 시골이 그렇듯 의사선생님이 왕진을 왔었는데, 엄니 자궁의 따뜻함에서 나오기 싫어하는 저를 억지로 꺼내려고 의사가 참 힘들어 했다는 말씀을 아직도 하십니다. 전기가 들어왔으면 좀 수월하게 나왔을텐데 하시면서.... 그런 시골이었지만, 그래도 50호가 넘는 큰 동네였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는 대학생 형들이 농활이다 머다 해서 자주 왔었습니다. 그 형들이 가끔은 축구공도 주고 가고 했더랬습니다. 연도 날리고, 미꾸라지도 잡아 팔고, 칙 캐러 다니고.... 그 중에서도 꽤 재미있는.. 2016. 1. 31.
삭막한 현실, 그래도 희망은 사랑뿐 : 황석영의 해질 무렵 삭막한 현실, 그래도 희망은 사랑뿐 : 황석영의 해질 무렵 책은 작가의 말대로 '희미한 옛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달동네 어묵집 아들로 시작해서 질곡의 세월을 거쳐, 이제는 사람들에게 건축 강연을 할 정도로 성공한 60대 건축가 박민우와 그의 첫사랑 차순아와의 아련한 사랑이야기입니다. 한때는 그 사람에게 인생을 걸 정도로 사랑했지만, 첫사랑은 언제나 실패한다고 했던가요.... 그 실패한 첫사랑 이후로 40년 가까이 세월이 흘러 문득 그 첫사랑의 연락처가 손에 쥐어 집니다. 그리고는 서로의 지난날을 알아가는 그런 아련한 사랑이야기입니다. 책은 편의점 알바로 근근히 생활을 해나가며 연극이라는 꿈 하나에 매달리는 가난한 연극연출가 20대 정우희와 그 보다 더 빡신 알바로 생활전선을 이어가고 있는 김민우 일.. 2015. 12. 30.
절망의 시대에 부끄럼 없이 산다는 것 : 안소영의 시인 동주 절망의 시대에 부끄럼 없이 산다는 것 : 안소영의 시인 동주 슬픈 족속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연희전문학교 솔숲 산책길에 내가 있습니다. 산책을 하는 윤동주를 만납니다. 동주를 따라 야트막한 고개도 넘고 초가지붕이 옹기종기 엎드린 마을도 만납니다. 동주는 학교를 벗어나 서강의 해 지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저물어 가는 햇살이 강물에 비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아련합니다. 동주를 따라 일본으로 갑니다. 6첩의 다다미가 깔린 하숙방입니다.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시린 냉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허리를 꼿꼿히 펴고 글을 쓰고 있는 동주가 있습니다. 전쟁과 죽음의 이 삭막한 시대에 시를 쓰는 것이 자기가.. 2015. 9. 30.
나도 기꺼이 투명인간이 되겠다 : 성석제의 투명인간 나도 기꺼이 투명인간이 되겠다 : 성석제의 투명인간 개인의 역사에는 어떤 이야기가 들어갈까요? 시작은 일단 어떠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는 가가 중요합니다. 이거는 자기 맘대로 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개인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학창 시절, 친구를 만나고, 또 어떠한 일을 하는가도 중요하겠구요.... 또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시기를 거치며 생의 반려자를 만나는 것도 개인의 역사에서 하이라이트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중년이 되고, 그러다 보면 자기 인생을 어느 정도 완성하는 시기가 오고... 올까나??? 노년이 되고...... 그리고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물론 그 와중에 역사를 이루는 여러 에피소드들이 들어갈 겁니다. 그 자그마한 사건들이 모이고 모여 한 인간의.. 2015. 4. 22.
지금을 사는 유목민의 몽환적 사랑 : 박범신의 소소한 풍경 지금을 사는 유목민의 몽환적 사랑 : 박범신의 소소한 풍경 이 책을 왜 골랐는지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추측컨대, 작가의 전작 이 준 임팩트가 너무 강렬해서 아마도 후속작도 읽어 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한 소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소설은 정말 소설입니다. 있을 법 하지도 않을 뿐더러 소설을 읽다 보면 꿈속의 저편을 거닐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상상력 너머에 있는 아련하고 어렴풋한, 그러면서도 왠지 피부를 찌르는 이야기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깊은 우물에서 솟아올라온 작은 물방울들을 짜집기했더니 이 소설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고는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억압당하지 않고 쓸 수 있어 매 순간 당황스럽고 매 순간 행복했다고 고백합니다. 책 표지의 그림을 책을 읽기 전에는 전혀 눈에 들.. 2015. 3. 11.
백여년 전에도 살아 간다는 건 똑 같더라 : 황석영의 여울물 소리 백여년 전에도 살아 간다는 건 똑 같더라 : 황석영의 여울물 소리 때는 바야흐로 1789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으로 옮기려 할 그 무렵 쯤 되는 모양이다. 바다 건너 지구 반대쪽의 어느 나라에서 졸라 큰 가뭄과 흉년이 들었댄다. 안그래도, 나라에서, 지주가, 이것 저것 핑계로 다 떼가고, 왕과 귀족들은 저거만 잘 처묵고 잘 처살고.... 심지어 밀 이삭 줍는 거에도 세금을 메기고..... 띠발름들아!! 이래가지곤 몬 산다. 차라리 지기라!!! 하면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 나라의 큰 감옥을 때려 부쉈는데, 이걸 계기로 전 시민이 다 혁명을 외쳤다. 지주와 귀족을 죽이고 급기야 왕과 왕비도 접수한다. 이 시민들의 봉기는 단지 억울함을 토해내는 죽고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살고 .. 2015. 1. 23.
보다 혼란스러웠던 내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 : 이문열의 변경 보다 혼란스러웠던 내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 : 이문열의 변경 일본에 살 때, 무엇보다 부러운 것이 아름다운 시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기만 하면, (그것도 기차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기차가 안다니는 곳이 없습니다. 그것도 부럽습니다) 엽서에서나 나올 법한 시골을 볼 수 있습니다. - 도심도 무척이나 정돈되고 다양한 면을 보여줍니다 - 우리의 시골은 피폐하다는 느낌입니다. 골짝 골짝 들어선 공장을 보고 있자면 더욱 그러합니다. 압다뷔에서 근무할 때 만났던,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이집트 등의 노동자들, 그리고 우리보다 훨씬 못사는 나라의 여행길에서 만났던 순박하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잘 살고 보세~~ " 라고 아직까지 외치고 있는 울 나라의 방향성은 틀.. 2014.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