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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by Keaton Kim 2020. 4. 11.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마흔세 살이란 이런 나이야. 반환점을 돌아서 얼마간 그 동안 그랬듯이 열심히 뛰어가다가 문득 깨닫는 거야. 이 길이 언젠가 한번 와본 길이라는 걸. 지금까지 온 만큼 다시 달려가야 이 모든 게 끝나리라는 걸. 그 사람도 그런 게 지겨워서 자살했을 거야. (p.68)

 

 

 

나는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봤다.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가 서 있는 세계이 끝까지 갔다가 거기서 더 가지 못하고 시인과 여자친구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척 행복했고, 또 무척 슬펐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그 거리에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남게 됐다. (p.87)

 

 

 

어이없게도 삶은 단 한 번만 이뤄질 뿐이며,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그 도서관에 있는 모든 책들은 말하고 있었다. 도서관에는 그처럼 많은 책이 있었으니, 그 중에는 단 한 권이라도 자기 같은 인생도 이 세상에 필요했다고 말해주는 책이 있을 것 같았다. (p.170)

 

 

 

사랑을 나눈 후 여자가 옷을 입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기도 하다. (p.187)

 

 

 

수많은 첫 문장들, 그 첫 문장들은 평생에 걸쳐서 고쳐지게 될 것이다. .....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첫 문장은 달라질 것이다. 그는 어둠 속 첫 문장들 속으로 걸어갔다. (p.228)

 

 

 

우리의 소원은 자고 싶은 만큼 충분히 늦잠을 자고, 얘기하고 싶은 만큼 충분히 얘기하고, 읽고 싶은 만큼 충분히 책을 읽고, 수영하고 싶은 만큼 충분히 수영하고, 취하고 싶은 만큼 충분히 취하고, 사랑하고 싶은 만큼 충분히 사랑하는 일이었다. (p.235)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p.316 작가의 말 중에서)

 

 

 

  

 

 

1.

사랑은 하는 순간에도 환상 속으로 걸어가는 거지만 끝나는 순간부터도 여전히 환상 속의 걸음마다. (Book끄-Book끄님의 글 중에서)

 

 

 

2.

표지 사진이 인상적이다. 하늘과 구름과 바람이 느껴지고 여인의 시선이 멈추는 초원의 저 편은 세계의 끝일 것 같다. 그럼 저 여인은 여자친구? 어딘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다(저렇게 생긴 전봇대는 우리 전봇대가 아니다). 저 언니가 서 있는 곳에 나도 가보고 싶다는 느낌마저 줄 정도다. 하지만 소설 속 세상의 끝은 동네 호수 건너편의 메타세쿼이아였다. 고작 호수 건너편이 세계의 끝이라니. 하지만 우리 두사람에겐 그럴수도 있다.

 

 

 

3.

<모두가 복된 새해>는 Damian Rice <Elephant>를 듣고 긁적인 문장에서 시작된 소설이라고 책의 말미에 쓰여 있다. 오랜만에 쌀 아저씨의 코끼리를 찾아 들었다. 발정난 남자의 고통스럽고 절박한 울부짖음, Cause I am lately Lonely~~~ 외롭다구, 씨이발~~~ (최진호 버전도 훌륭하다)

 

 

 

4.

이 아저씨는 김천 촌놈에 언젠가 읽은 소설에서 그는 빵집 아들이라고 했는데, 아, 감수성은 왜 이러냐. 카스테라를 많이 먹어서 그런가? 여자가 되려다 뭔가 잘못되어 남자가 된 것 같다. 글쓰는 사람은 어느 정도 감수성은 다 가지고 있지만 이 아저씨는 차원이 다르다. 그의 소설은 평범한 일상이어서 잔잔한 영화 같다. 그 속에 드러난 김연수의 감성은 연하고 부드럽다.

 

 

 

5.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기억은 온천치 못하다. 더러 왜곡되고 진실이 아닐 경우도 있다. 내가 거쳐온 시간과 내 기억 사이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기억이란 내 주관에 의해 아름답게 되기도 하고 더러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내가 살아온 삶을 내 기억은 온전히 보여주지 못한다. 삶의 흔적은 그래서 필요하다. 가능한 한 많이 남겨 놓아야 한다. 그 흔적을 통해 불완전한 기억을 바로 잡을 수 있게.  

 

 

 

6.

책을 읽으며 접은 페이지의 문장을 위에 옮겼다. 이런 단편 소설들을 아주 좋아했다. 읽고 나면 가슴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먹먹해지는 글들을. 근데 저렇게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장인데도 글이 가슴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행간의 여백은 흐릿하고 문장의 호흡도 엉망이다. 한 마디로 글이 헛돈다. 저 현실적이면서도 약간 몽환적인 사랑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내 감수성은 이제 늙은 건가. 나이 탓, 상황 탓을 해본다. 

 

 

 

7. 

내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 노력이 삶의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절망하지 말고, 이해하려고 끊임없이 애쓰는 일. 그래, 그게 삶이다. 김연수의 지난 책들을 다시 들추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