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우릴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이민진 <파친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세 권의 책을 올렸습니다. 빌 게이츠의 아내 멀린다 게이츠의 <오름의 순간>, 머윈의 <시리우스의 그림자>, 그리고 이민진의 <파친코>입니다. "첫 문장부터 사람을 사로잡는 아주 매혹적인 책" 이라고 추천했습니다. 오호라.
이민진은 1970년, 함경도 원산 출신의 아버지와 부산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자신을 2개의 코리아, 즉 남북의 아이라고 불렀다는군요. 일곱 살이 되던 해 미국으로 이민 가 미국인으로 살고 있지만 영어 이름 대신 어릴 때부터의 한국 이름을 고수합니다.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 미국에서는 아주 가난했다고 합니다. '쥐가 나오는 방 한 칸짜리 아파트'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습니다. 빠듯한 사정에도 부모님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와 자신의 노력으로 예일대 역사학과에 들어가게 되고, 처음엔 변호사로 그리고 작가로 활동합니다.
1989년 예일대 3학년 시절, 이민진은 미국인 선교사의 강연으로 재일동포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비극적인 역사도요. 역사학을 전공한 저자는 여기에 아주 관심이 많았고 일본에서 살아가는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여러 초안을 쓰지만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다 2007년 남편이 일본으로 발령이 나서 함께 가게 됩니다.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 수십 명과 인터뷰를 합니다. 조선인들은 역사의 희생자이지만 개개인의 역사 또한 복잡하고 광활했습니다.
옛 원고를 버리고 다시 책을 씁니다. 책이 출판될 때까지 쓰고 또 쓰고 수정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완성합니다. 초고를 쓴지 30년 만입니다. 이 책으로 여러 상을 받았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손으로 한국의 역사를 세계에 알리는 작가가 되었습니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입니다.
역사가 우릴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책표지가 책을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마법처럼 이야기 속으로 읽는 이들을 끌어들이는 소설의 첫 문장입니다. <내 이름은 빨강>과 <설국>의 첫 문장에 버금갈 만합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시대가 휩쓸리고 가족이 망가져도 일상의 아름다움과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어려운 시대지만 한 개인의 삶은 반짝반짝 빛납니다.
가난한 집의 막내딸 양진은 돈을 받고 언청이에 절름발이인 훈이와 결혼한다. “여자의 인생은 고생길”이라는 말을 반복하면서도 그러한 인생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양진은 남편 훈이와 함께 하숙집을 운영해나가며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그녀는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면서 유일한 자식이자 정상인으로 태어난 딸 선자를 묵묵히 키워나간다.
부모의 살뜰한 보살핌과 사랑을 받고 자란 선자는 안타깝게도 엄마 나이 또래의 생선 중매상 한수에게 빠져 결국에는 한수가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모른 채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만다. 불행의 나락에 빠진 선자는 목사 이삭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구원을 받게 되고, 둘은 새로운 인생을 위해 이삭의 형 요셉 부부가 사는 일본의 오사카로 향한다.
일본에서 한수의 핏줄인 첫째 노아와 이삭의 핏줄인 둘째 모자수를 낳은 선자는 친정엄마인 양진처럼 여자로서의 인생은 잊어버린 채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삶을 고생스럽게 살아간다.
다음 책에 나와 있는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삶이 나오고 그 시절에 일본으로 건너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쟁 막바지의 일본 상황도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땅에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 또 아이를 낳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쭉 일본에서 자란 사람. 하지만 뿌리가 조선인인 탓에 그 아이들의 운명도 가혹합니다. 책에서 모자수가 일본인 친구 하루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재일동포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사입니다.
이 나라는 변하지 않아. 나 같은 조선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서인들도 달라진 게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p.2권 220)
심심해서 minjinlee.com에 들어가봤더마 이 사진보다 매력적으로 나온, 환히 웃고 있는 사진들이 많았다. 한복 입은 표지 그림이 예뻐서 이 사진을 옮겨왔다.
일본에서 살던 시절, 파친코는 어떤 분위긴가 싶어서 쭈삣하게 가 보았습니다. 단조롭고 시끄러운 기계 음악 소리와 쇠구슬의 촤르르르 하는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이내 포기했습니다. 책에서 '아내가 남편 대신 아이들과 함께 잠드는 사랑 없는 집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게임장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하, 그렇군요. 바로 이해했습니다ㅎㅎ.
파친코는 어쩌면 그들의 삶과 꼭 닮았습니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희망의 여지가 남아있는 게임,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기대는 삶 말이죠.
일본에 사는 귀화하지 않은 조선인들을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일본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외국인 등록증을 들고 다닙니다. 예전에 일본에서 일 하면서 그런 이들을 몇몇 만났더랬습니다. 자이니치라는 말만 들으면 심장이 콩닥콩닥해지고 자꾸 눈길이 갑니다. <우토로마을>에 관한 다큐멘터리, 조선인 학교를 영화화한 <우리학교> 등을 접할 때 그렇습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영원한 디아스포라입니다. 격투가 추성훈, 축구 선수 이충성, 가수 이정미, 서경식 교수가 그렇습니다. 찬란하게 빛나면서도 슬픈 디아스포라.
한국 사람이 영어로 쓴 소설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했습니다. 근데 마치 처음부터 한국어로 쓴 것처럼 전혀 어색하지 않고 술술 읽혔습니다. 이미정이라는 분이 옮겼습니다.
오랜만에 우리 아픈 역사에 관한 대하소설을 읽었습니다. 재미있었고, 슬펐고, 먹먹했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시대가 어떠하든지 개인의 삶은 지속됩니다. 어떤 이의 삶은 단 몇 줄로 표현이 되고, 또 어떤 이의 삶은 굴곡 그 자체라 활자로는 다 표현이 되지 않기도 합니다(나의 인생은 과연 몇 줄로 설명될까요?). 그런 이들의 인생을 엿보았습니다.
'역사가 우릴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 없다.' 소설의 첫 문장이 다시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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