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이 세상에 살아서는 안 될 놈이야 : 정유정 <종의 기원>
집중할 일이 생기면 오히려 호흡이나 맥박의 속도가 뚝 떨어졌다. 얌전하거나 유순하거나 참을성이 많아서가 아니라, 흥분의 역치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높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이는 유진의 심장이 뒤려면 특별한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혜원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겁이 났다. (p.259)
'피 냄새가 잠을 깨웠다.'로 소설은 시작한다. 잠이 깬 유진은 비릿한 피냄새가 진동을 하고, 침대, 이불, 배게가 온통 피로 물들여 있고 자신의 옷에도 선지처럼 응고된 핏물이 붙어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란다. 피 냄새는 발작 증세의 신호가 아니라 진짜 피였다. 도대체 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핏줄기가 타고 흐른 계단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보니 주방 입구까지 핏물이 늪을 이루고 있고 그 가운데 여자가 있었다. 반듯하게 누운 여자, 종아리를 젓가락처럼 가지런히 뻗고 가슴 위에 양손을 모으고 긴 머리채를 얼굴에 덮어쓴 여자, 바로 어머니였다. 누가 이 밤에 들어왔단 말인가? 범인은 누구? 설마 내가?
정유정의 소설은 이번이 세번째입니다. 전작인 <28>과 <7년의 밤>의 흡입력은 굉장했습니다. 두근거려서 책을 쉽게 넘기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이 책 소개에 어두운 인간 본성을 그려냈다고 하는데, 그래서 어쩐지 어두운 소설일 것 같아 여태 미뤄두고 있다 우연히 읽었습니다. 헐~, 아이고~, 우짜노~ 이 나쁜 노무 시키~~ 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읽었습니다. 이런 이야기였어? 이런 결말이었어?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인류의 2~3퍼센트 가량이 사이코패스라고 한다. 소설의 주인공 유진은 그중에서도 상위 1퍼센트에 속하는, 정신의학자들 사이에선 '프레데터'라 부른다는 '순수 악인'이다. 비둘기의 세상에 태어난 매이자 피식자로 살아가도록 학습받고 억압받으며 성장한 포식자이기도 하다. (p.382)
1인칭 시점이라 유진이의 시선에서 모든 행위가 묘사되어서 책을 읽을 땐 별로 느끼질 못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얼마전 <버닝>이라는 영화에 나온 벤인가 하는 그 나쁜 시키가 떠오르는 군요. 소설 속 주인공 유진이와 하는 짓이 비슷합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 새로운 것을 찾는 넘들 말이죠. 이넘들 하는 짓거리가 무섭습니다. 유진이도 그렇구요. 도저히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는 종자들 같습니다. 처음엔 유진이의 입장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머 이런 시키가 다 있냐'로 변해가더군요.
주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 별종들은, 그러나 잊을 만하면 뉴스에 나오기도 하고 책과 영화, 혹은 테레비에서는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작가가 말했듯이 백명에 두세 명은 그렇게 태어난다고 합니다. 헐~ 그렇게나 많다고? 좀 오싹해옵니다. 그 두세 명은 모두 소설 속 유진이처럼 행동한다구요? 물론 그렇지는 않겠죠. 친밀한 관계를 통해, 교육과 학습을 통해 내부에 있는 그 괴물이 나오지 않도록 조절하겠지요. 유진이도 잘 조절했지 말입니다. 그 오뎅녀를 만나기 전까지는요.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진화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익히며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무슨 진화심리학자가 그랬댑니다. 살인을 통해 진화한 인간은, 그래서 유진이처럼 사이코패스가 아니더라도, 유전자에 어두운 본성을 누구나가 지니고 있댑니다. 마음 속에 괴물 한 마리쯤은 모두 다 키운다는 말입니다. 나도 가만히 들여다보니 조그만 녀석이 꽈리를 틀고 있네요. 가끔 이 녀석의 쓰벌거리는 감탄사를 들을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 괴물 녀석이 밖으로 나오지 않게 적절하게 통제해야 하는데 있습니다. 저자가 말하는 선과 악의 구분이 여기 있지 않나 생각되는군요.
이런 이야기는 읽기 힘들어~~ 하면서 다 읽어버렸네요. 역시나 정유정입니다. 살아남은 유진이가 대활약을 하는 종의 기원 속편을 내심 기대했습니다. 이럼 안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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