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 : 김훈 <공터에서>
소총 가늠구멍 속에서, 잇달린 산들이 출렁거렸다. 바람이 산봉우리를 훑어서 고지마다 눈이 회오리쳤다. 바람은 눈보라를 몰아서 동해로 나아갔다. 천지간에 눈 비린내가 자욱했다. 달이 뜨자 골짜기의 어둠이 더 짙어졌고 눈 덮인 봉우리에 푸른빛이 스몄다. 팽팽한 밤하늘에서 별들이 추위에 영글어갔다. 밝은 별 흐린 별이 뒤섞여 와글그렸는데, 귀 기울이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눈 덮인 산맥은 인간과는 무관하게 출렁거렸으나 그 흐린 산맥이 인간을 향해 내뿜는 적개심을 초병들은 감지하고 있었다. (p.15)
"마 상병, 팔 굵어졌네." 박상희의 입에서 흰 김이 새어 나왔다. 마차세는 박상희의 김을 들이마셨다. 김은 풋것의 냄새로 비렸다. 마차세는 밤 10시에 귀가했다. 아버지 마동수는 빈방에서 죽어 있었다. (p.40)
임신의 기별은 몸속 깊은 곳에서 움트는 이물감이나 어지럼증 같았다. 기별은 멀고 희미했는데, 점차 다가와서 몸 안에 자리 잡았다. 낯선 것이 다가오고 또 자라서 몸 안에 가득 퍼져가는 과정을 박상희는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몸속의 어두운 바다에 새벽의 첫 빛이 번지는 것처럼 단전 아래에서 먼동이 텄다.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 놀러 갔던 동해의 아침 바다는 어둠이 물러서는 시간과 공간 안으로 수평선 쪽에서 솟아오르는 빛의 입자들이 퍼졌고, 새로운 시간은 살아 있는 살끼리 서로 부비듯이 다가왔다. 박상희는 스며서 가득 차는 빛들을 떠올렸다. 임신은 몸의 새벽을 열었다. 가끔씩 안개 같은 것이 목구멍을 넘어왔다. (p.270)
박상희는 이 가엾은 남편과 살아갈 날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살아온 날들의 시간과 거기에 쌓은 하중을 모두 짊어지고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시간의 벌판을 건너가야 할 것이었다. 벌판은 저쪽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p.185)
젖은 옷을 옷걸이에 꿰어서 빨래줄에 거니까 옷이 사람처럼 느껴졌다. 옷을 향해서 '상희야....' 라고 부를 뻔했다. 마차세는 옷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일상의 작은 것들을 모으로 쌓아서, 막막한 날들을 건너갈 수 있을 것인지를 마차세는 생각했는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싶었다. (p192)
그의 글은 여전히 건조했다. 가늠구멍 속의 추운 겨울밤 풍경을 덤덤하게 묘사했으나 문장은 시렸다. 마동수의 죽음에 대한 묘사는 너무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이어서 잔인했다. 임신에 대한 문장은 아련했으나 세심하고 공감했다. 일상에 대한 문장은 막막했고 두렵기까지 하다.
이번에도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없이 스러져간 인물들을 다시 소환했다. 그들은 여전히 삶의 무게로 신음했고, 머뭇거렸으며, 남루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살아낸다. 김훈은 건조하게 그들의 슬픔과 고통, 절망과 연민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장이 주는 울림은 깊고 컸다.
책을 읽으며 주인공 마차세가 혹시나 김훈이 아닐까 의심했다. 예감은 맞았다. "이 작은 소설은 내 마음의 깊은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기억과 인상의 파편들을 엮은 글이다." 라고 <작가의 말>에서 고백했다. 어쩌면 작가의 삶 자체도 쉬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건조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파편들은, 이제는 지금과는 결별해야 할 것들이다. 아니 결별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런 인물과 풍경과 역사를 애써 꺼집어 낸 작가가 고맙다. 김훈이 아니면 이제는 꺼내기도 쉽지 않은 것들이며 꺼낸다고 해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에는 미욱한 것들이다.
소설 속에, 남산경찰서에서 매 맞고 나온 사내들이 경찰서 뒷골목의 해장국 집에서 국밥을 퍼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독립운동가 정화암의 회고록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에 나오는 몇 줄의 문장에 근거했다고 나온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이른 새벽에 경찰서를 나오니 여름인데도 찬 기운이 엄습하고 긴장이 풀리자 피로가 한꺼번에 겹쳐 왔다. 시장기를 면하려고 이문설렁탕집을 찾아 들어갔다. 종로에서 매 맞고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회사 코앞에 있어서 자주 가던 이문설렁탕이 그 이문설렁탕인 줄 이제 알았다.
제목이 왜 <공터에서>일까?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라 했다. 그 달아날 수 없는 곳에서 그래도 살아야 한다면, 남루하고 초라했던 옛것에서 다시 새로운 희망을 공터에서 만들라는 말이 아닐까? 왠지 그렇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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