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유대, 서로에게 기대고 기댐을 받는 것 : 최은영 <쇼코의 미소>
# 1.
할아버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냥 한두 시간만이라도 텔레비전을 끄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평생 좋은 소리 한 번 하는 법 없이 무뚝뚝하기만 했는데 그게 고작 부끄러움 때문이었다니.
죽음에 이르러서야 겨우 부끄러움을 죽여가며 나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걸 사내답지 않다고 여기며 깔보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이었다. 가끔씩 그런 통제에도 불구하고 비어져나왔던 사랑의 흔적들이 있었다. (p.47 단편 <쇼코의 미소> 중에서)
# 2.
아줌마라고 해서 엄마의 모든 면이 아름답게 보였을까. 엄마의 약한 면은 보지 못했을까. 아줌마는 엄마의 인간적인 약점을 모두 다 알아보고도 있는 그대로의 엄마에게 곁을 줬다. 아줌마가 준 마음의 한조각을 엄마는 얼마나 소중하게 돌보았을까. 그것이 엄마의 잘못도 아닌 일로 부서져버렸을 때 엄마가 느꼈던 절망은 얼마나 깊은 것이었을까.
내가 아는 한, 엄마는 그 이후로도 마음을 나눌 친구를 쉽게 사귀지 못했었다. 그리웠을 것이다. 말로는 그때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엄마를 엄마 자신으로 사랑해준 응웬 아줌마를 엄마는 오래 그리워했을 것이다. (p.91 단편 <씬짜오, 씬짜오> 중에서)
# 3.
우리는 싸움을 제외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서로를 견뎠다. 감정을 분출하고 서로에게 욕을 해서 그 반동을 확인하고자 하는 의지도 없었다. 싸움도 일말의 애정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았고 그도 나를 미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받지 않았다. 그도 그러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나쁘게 대하는 법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가장 나쁜 건 서로에게 나쁘게 대하지도 못하는 그 무지 안에 있었다. (p129. 단편 <한지와 영주> 중에서)
# 4.
선배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진심을 말할 때, 선배의 목소리는 언제나 조금씩 떨렸다. 선배는 말할 때 감정이 배어나오는 나약한 습관을 고치고 싶다고 말했었다. 마음이 약해질 때 목소리가 떨리는 버릇,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하는 성격, 느리게 걷고 느리게 먹고 느리게 읽는 기질, 둔한 운동 신경, 사람들의 말과 행동에서 백 가지 의미를 찾아내 되새김질하는 예민함 같은 것들을 선배는 부끄러워했다. 그런 약점들을 이겨내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선배가 생각했던 자신의 장점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선배가 스스로 약점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사랑했고, 무엇보다도 그것들 덕분에 자주 웃었다. (p.201 단편 <먼 곳에서 온 노래> 중에서)
# 5.
여자는 부모와 남편의 죽음을 겪으며 자신의 일부가 죽어버리는 경험을 했다. 마음속에서 죽어 없어진 그 부분은 죽은 사람들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한동안은 제대로 숨을 쉴 수도,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오래도록 울고 나니 그들이 없는 삶과 그들이 여자에게 남겨놓고 간 세상이 남았다. 그 모든 것들이 여자에게는 소중했다.
여자는 여자 안에 여전히 살아 있는 그들에게 보다 좋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고, 전보다 나아진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다. 슬픔으로 깨끗해진 마음에 곱고 아름다운 것들만 비춰 보여주고 싶었다. (p.239 단편 <미카엘라> 중에서)
# 6.
수술을 한다고 해도 별 가망이 없으리라고 의사는 조심스레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마음이 무너졌을 말이었지만 말자는 오히려 편안했다. 더이상의 수술도, 항암 치료도 싫었다. 무엇을 위해 생을 연장해야 하는지 이유도 알 수 없었고 어떤 미련도 없었다. 차라리 잘됐지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살아 있는 것도 두렵다는 점에서는 죽음과 진배없었다. (p.264 단편 <비밀> 중에서)
정서적 공감을 통한 유대의 형성은 이 책에 실린 거의 모든 소설들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때로 그것은 <한지와 영주>에서처럼 중심인물들 사이에서 부정적이거나 혹은 공감 형성의 정점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이런 예외적인 경우에서조차도 서사의 초점은 여진히 사람들 사이의 공감과 유대에 놓여 있다. 그러니까 그 정점에 도달하지 못한 경우는 있을 수 있으나 그런 초점이 만들어지지 않은 서사는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그래서 좀 심하게 말한다면, 최은영의 세계에서 단 하나의 가치 있는 것이 바로 그 공감의 유대라 해도 좋은 것이다. 기쁨이건 슬픔이건 간에, 마음을 나눈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 서로에게 기대고 기댐을 받는 것, 최은영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그것뿐이라 해도 크게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p.278 해설 <순하고 맑은 서사의 힘> 중에서)
그렇군요.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읽고 그저 아련하고 어렴풋하고 민망하고 먹먹하고 그랬는데, 그게 '공감과 유대'라는 단어로 압축이 되는군요. 쇼코와 할아버지, 한지와 영주, 엄마와 응웬 아줌마, 미진과 소은, 여자와 찜질방의 할머니.... 뭔가 마디가 풀리는 느낌입니다. 사실 이런 소설은 어렵습니다. 읽고 난 후의 나의 감정이 무엇인지 똑 부러지지 않습니다. 감정의 선을 건드릴락 말락한 플룻도 그렇구요. 다 읽고 난 후 후련한 맛 같은 것도 없습니다. 한주 선생에게 물으니 그게 요즘 단편 소설의 대세라고 하는 군요.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 그건 타고난 걸까요?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걸까요? 책을 읽고 주인공의 감성에 공감하는 능력은 어떨까요? 양파의 껍질을 까듯 그렇게 자꾸 까다 보면 가능하다고도 합니다만, 한창 감수성이 발달할 시기에 남중 남고와 공대를 나온 경상도 남자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일입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쇼코의 할아버지처럼 감정을 속으로 삮이는 것이 여전히 더 익숙하고, 그러는 편이 아직은 조직 사회에 살아남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나도 이런 섬세한 감정선에 기대고 기댐을 받고 싶다. 여성 호르몬이 많이 나오면 가능할까?
그럼에도, 눈에서 눈물이 쏙 날 정도의 감동은 아니지만 제법 제 마음의 어느 곳을 건드렸던 문장들을 서두에 한 번 적어 봤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에게, 그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 그 상황에서 던지는 주인공의 말 한마디에 나는 어렴풋하니 공감합니다. 여자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성에, 아픔을 겪은 사람들의 슬픈 감성에,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움추리는 사람들의 여린 감성에, 비루한 일상에서 단단한 삶을 이어가는 건강한 감성에..... 나는 공감합니다.
등단 이후, 오래 짝사랑해온 사람과 연애하는 심정으로 글을 썼다. 한 문장, 한 단락,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그 자체로 행복할 수 있었다. 몇 시간이고 책상에 앉아 고작 몇 줄을 쓰는 그 지지부진한 시간이 나를 살아 있는 사람으로 살게 했다. 몰두해서 글을 쓸 때만 치유되는 부분이 있었다.
십대와 이십대의 나는 나에게 너무 모진 인간이었다. 내가 나라는 이유만으로 미워하고 부당하게 대했던 것에 대해 그때의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그애에게 맛있는 음식도 해주고 어깨도 주물러주고 모든 것이 괜찮아지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따뜻하고 밝은 곳에 데려가서 그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다. 그렇게 겁이 많은데도 용기를 내줘서, 여기까지 함께 와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p.292 <작가의 말> 중에서)
그리고 작가의 이 말에도 공감합니다. 이 문장으로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단박에 알아차려 버렸습니다. 머리속에 맴돌던 작가의 문장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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