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주정뱅이들의 안녕을 위하여 :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첫 단편 '봄 밤'부터 피를 말리고, 혼을 뺀다. 압도를 넘어 무아無我적 상태로 독자를 이끈다. 나란 존재를 완전히 잊는, 그리하여 이야기에 '익사'시켜 버리는 흡입력, 정교한 플롯과 독보적 문체, 깊이의 정체가 궁금하다. '봄 밤'의 주인공은 사지死地에 내몰린 남자와 여자다. 이 지옥에서, 이 폐허에서도 둘은 사랑에 빠진다. 권여선식 사랑은 부비고, 핥고, 자는 것을 넘어 '의지'에 이를 때 완성된다. 살 이유 없는 인생인데, 서로가 있어 살려 한다. 그랬더니 또 살만해진다. 바닥을 치고, 또 바닥을 치고, 더 이상 칠 바닥조차 없는 세상 가장 낮은 자리에서 사랑한 남녀의 이야기다.
"그는 마흔세살에 영경을 만난 후로 취한 영경을 집까지 업어 오는 일 말고 영경에게 해준 것이 거의 없었다." (p.26)
수환의 말과 달리, 그는 영경의 생명이다. 죽어도 골백번은 죽었을 영경이 끝까지 산 것은 수환 덕분이다. 그럼에도, 수환은 영경에게 해 준 것이 없다 한다. 권여선은 '차이'의 문제를 아무렇지 않게 짓밟아 버린다. 아이를 빼앗기고, 이혼 당한 전직 여교사와 15년간 신용불량자로 살아온 공장노동자의 연애사에 그 어떤 '차이'도 개입시키지 않는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 날도 여자는 남자에게 톨스토이를 읽어주고, 줄은 함께 웃고 논다. 권여선에 따르면 사랑에 빠지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있는 그대로의 내가 '위안'이 될 수 있는 존재를 찾으면 된다. 상대의 상처와 결핍이 내 버린 구명에 기거이 들어가, 거기 꼭 맞는 크기로 살면 된다. '봄 밤'의 수환과 영경처럼 그렇게 사랑하면 된다.
<안녕 주정뱅이>에 실린 첫 단편 '봄 밤'은 근 10여년간 나온 한국 문학 중 가장 아름다운 연애 서사를 보여준다. 생의 지하에 갇힌 두 남녀가 서로에게 기대 살아남는 눈부신 생존기다.
위의 글은 저의 글쓰기 선생님이 쓰신 글입니다. 최고의 서평입니다. 이 서평 덕택으로 저도 책을 읽었습니다. 일단 책에서 받는 감동의 깊이가 완전히 다릅니다. 감수성의 차이일까요? 저는 그저 가난하고 병든 남자와 알콜중독 여자의 인생 밑바닥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사랑 정도였는데.... 그리고 읽은 감동을 표현해 내는 문장력 또한 대단합니다.
책에서 받은 감동을 훌륭하게 표현하는 것, 바로 멋진 서평의 절대 조건입니다. 꾸며낸 감동은 금방 들통이 나며, 아무리 격한 감동이라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해 낼 수 없다면 그 또한 그저 그런 서평이 될 겁니다. 위의 서평은 서평의 표준이면서도 책에 대한 호기심을 무지 불러일으킵니다. 자연스레 책으로 이끕니다. A++을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동이면서, 또 부럽습니다.
권여선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에는 7편의 단편이 들어 있습니다. 거의 매 편마다 주정뱅이가 나오고 주정뱅이 주위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나옵니다. 그 중 가난하고 병든 남자와 알콜 중독의 여자의 사랑을 그린 '봄 밤'에 나오는 주인공은 과연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이 작자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술을 안먹는 사람에 비해 좀 더 명랑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좀 더 고독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런 거와 전혀 거리가 먼, 술만 디립다 처 드시는, 그래서 항상 꽐라가 되는 작자들도 부지기수다. 말하자면 감정 싸이클의 최대점과 최소점이 아주 멀리 떨어진 거죠. 이런 이들은 대체로 인간적이기도 합니다. 군상들끼리 쉽게 친해집니다. 술의 힘을 빌리든 아니든, 타인에게 좀 더 솔직해지고, 타인의 아픔에 좀 더 공감하고, 타인의 잘못에 좀 더 너그럽습니다.
저자도 술에 대해 일가견이 있으신 분입니다. 30년을 주정뱅이로 살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저자가 책 속의 주정뱅이를 대하는 시선은 쓸쓸하기도 하지만 따뜻하기도 합니다. 치료를 권하거나 바른 생활맨으로 이끌지도 않습니다. 일상에 지치고 삶에 거꾸러진 주정뱅이에게 그저 조용한 위로를 건냅니다.
책은 서평으로 인해 기대가 너무 커져서인지, 큰 울림으로 다가오진 않았지만, 밑바닥 인생을 사는 주정뱅이 군상들의 기쁨과 슬픔, 쓸쓸함과 따스함, 좌절과 희망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힘든 하루, 오늘도 안녕하시길 바랍니다. 주정뱅이를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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