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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

삭막한 현실, 그래도 희망은 사랑뿐 : 황석영의 해질 무렵

by Keaton Kim 2015. 12. 30.

 

 

삭막한 현실, 그래도 희망은 사랑뿐 : 황석영의 해질 무렵 

 

 

 

책은 작가의 말대로 '희미한 옛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달동네 어묵집 아들로 시작해서 질곡의 세월을 거쳐, 이제는 사람들에게 건축 강연을 할 정도로 성공한 60대 건축가 박민우와 그의 첫사랑 차순아와의 아련한 사랑이야기입니다. 한때는 그 사람에게 인생을 걸 정도로 사랑했지만, 첫사랑은 언제나 실패한다고 했던가요.... 그 실패한 첫사랑 이후로 40년 가까이 세월이 흘러 문득 그 첫사랑의 연락처가 손에 쥐어 집니다. 그리고는 서로의 지난날을 알아가는 그런 아련한 사랑이야기입니다.

 

 

 

책은 편의점 알바로 근근히 생활을 해나가며 연극이라는 꿈 하나에 매달리는 가난한 연극연출가 20대 정우희와 그 보다 더 빡신 알바로 생활전선을 이어가고 있는 김민우 일명 '검은 셔츠'와의 어설픈 사랑이야기입니다. 서로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아낌없이 나누기에는 이 치열하고 열악한 현실의 벽이 너무 높습니다.

 

 

 

책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이 살아가는 결코 쉽지 않은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유통기한이 지난 편의점 폐기 처분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곰팡이 냄새 가득한 반 지하방에서 꿈이라고 하기도 뭣한 연극이라는 줄을 겨우겨우 부여잡고 있습니다. 그것마저 놓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니까요.

 

 

 

책은 지난한 시간을 삼키며 이제는 60대가 된 박민우와 차순아가 걸어온 그 세월도 가감없이 보여줍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출세 지향의 길을 걸었고, 그래서 지금은 인정할 만큼의 부와 지위를 얻었지만, 뜯어보면 자식과 아내에게 버림받은 힘 없는 늙은이가 되어 버린 주인공과 첫사랑에 실패하고 결혼 생활도 그리 순탄치 못한, 그러나 결코 불행해 보이지 않았던 주인공 여자 친구의 삶이 담담하게 보여집니다.

 

 

 

 

 

 

개인의 회한과 사회의 회한은 함께 흔적을 남기지만,

겪을 때에는 그것이 원래 한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지난 세대의 과거는 업보가 되어 젊은 세대의 현재를 이루었다.

어려운 시절이 오면서 우리는 진작부터 되돌아보아야 했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일흔이 넘은 노작가는 '지금 대한민국의 각박한 풍경은 지난 세대가 만든 업보'라고 말합니다. 그 '지난 세대' 들의 시절은 어떠했을까요..... 가난했나요? 그랬다면 얼마나 가난했나요? 행복했나요? 꿈이 있었나요? 꿈이 있었기에 지금보다 좀 더 행복했나요?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자 하는 열정은 지금보다 더 했나요? 지금 대한민국의 이런 각박한 풍경을 만들지 않을 기회는 있긴 있었나요?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주인공 박민우의 선배 건축가로 나오는 이가 있습니다. 읽자마자 그 건축가가 '정기용' 선생인 줄 단박에 알았습니다. 기적의 도서관을 설계하고, 돈도 명예도 안되는 시골의 공공건축에 자신의 전성기를 바쳤던, 동대문의 재건축을 온몸으로 반대했던, 너무나 순수하고 올곧아서 오히려 바보 같았던 그 건축가 '정기용' 선생입니다. 

 

 

 

박민우가 말합니다. "온 세상의 고향이 다 사라졌어요"

정기용 선생이 답합니다. "그거 다 느이들이 없애버렸잖아"

 

 

 

사회의 환경을 바꾸고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좀 더 나은 환경으로 바꾸는 것이 결국은 고향을 없애는 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기성세대와 그 시절의 치열했던 열정과, 그 때와는 다른 치열함을 사는 지금 우리 세대의 모습을 작가는 보여줍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그 시절의 열정으로 인해, 지금의 결과가 그리 잘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정기용 선생의 입을 통해서 말이죠.

 

 

 

좀 사랑해주지 그랬어

 

 

 

살아간다는 것의 아무 의미없슴을 알아버린 김민우는 결국 자살로 쓸슬한 결말을 맺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엄마 차순아가 아들의 여자친구인 정우희에게 하는 말입니다. 사실 저도 하고 싶었던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현실만큼이나 먹먹한 소설이지만, 사랑하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그렇더라도 더 열심히 사랑을 해야 되지 않겠나 라는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