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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가구 1주택의 대안은 공동체의 공간 : 야마모토 리켄, 나카 도시하루 <탈 주택> 아이들 셋 모두 집을 떠나 산다. 강이는 회사 사장님의 집 한 칸을 빌려 살고, 산이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 살며, 들이는 자취방을 월세로 구해 살고 있다. 언젠가 들이와 서울 데이트 때 "아빤 뭐했어요? 대기업을 20년이나 다니면서 서울에 집도 하나 없고." 이렇게 물었다. "그러게, 뭘 했을까. 심지어 집 짓는 회사를 다녔는데."  사실 좀 쪽팔렸다. 특히 딸내미 집은 좀 좋은 걸 구해주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했다. 막내가 사는 화곡동, 딸이 사는 보광동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올라간 언덕배기에 조그만 집들이 꽉꽉 들어찬 모양새다. 근사한 거리에 깔끔하고 모던한 집들이 그렇게 많은데.... 이런 아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자기들이 사는 집에 만족한다.  서촌이나 삼청동 어디쯤에 마당이.. 2025. 4. 9.
관식이와 애순이, 윤이상과 이수자 : 윤이상 <여보, 나의 마누라, 나의 애인> 엄마는 아빠가 절대적으로 내 편인 것 같지.아니야.엄마랑 나랑 붙잖아, 아빠 100% 엄마 편이야.내가 1번이면 엄마는 0번, 0번.아빠한테 엄마는 절대 반지라고 본다.건들면 죽어.    관식이에겐 애지중지 키운 딸 금명이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애순이다. 나이가 들어도 그 사실엔 변함이 없다. 그래, 그렇지, 그래야지. 딸이 아무리 예뻐도 마누라 다음이지. 하지만 현실 세계에선 다르다. 신혼 혹은 아이가 자랄 땐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이들이 다 커서도 아내가 0순위인 남편이 몇이나 될까.  넷플릭스 드라마는 잘 안보는 편인데, 요즘 를 안보면 사람들이랑 대화가 되질 않아 나도 봤다.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었다. 애순이와 관식이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나와 나의 아내, 우리 엄마와 아부지, 그리고 우리 .. 2025. 4. 8.
나는 이랑의 노래로 위로를 받는다 : 초록담쟁이 <그 날들이 참 좋았습니다> 삶과 잠과 언니와 나 언니난 언니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았어나와 다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 모습을언제까지라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내가 부끄러워하는 옷을 입고내가 부끄러워하는 소리로 웃고커다란 개와 커다란 차를 타고내가 어려워하는 길을 앞서 걸으며언니가 해주려 했을 말들이 난 궁금해쓰려 했을 일기와 주려고 했을 다음 생일 선물이 난 궁금해추려 했던 춤과 들으려 했던 음악읽으려던 책과 미처 열어보지 못한 중국에서 온 택배 언니사람들은 언니의 삶이 아깝다고들 말을 해10년, 20년 뒤였다면 모두 고개를 끄덕였을까언젠가 내 시간도 그리 귀하지 않은 때가 올까그때가 되면 무엇도 아까워하지 않고 우린 잠이 들까 삶과 잠과 언니와 언니의 자랑      들이야 무슨 노래 틀까?이랑이요. 이랑은 .. 2025. 4. 2.
환한 빛을 품은 새벽이 나에게도 찾아오려나 : 세오 마이코 <새벽의 모든> 생리증후군의 그녀 후지사와 생리는 병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사람이 많다. 생리를 이유로 쉬면, 같은 여자인데도 염치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PMS가 병의 범주 안에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고, 동정이나 걱정도 원치 않는다. 그래도 기분 문제는 절대 아니다. 몸이 도저히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공황장애의 그 야마조에 간혹 고독이 밀려오는 순간이 있다. 얘기하고 싶다. 생각은 그렇지만, 상대가 없다. 나는 이렇게 혼자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앞으로도 내내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 우울했다. 벌써 몇 번이나 경험했지만, 발작은 여전히 무섭다.    생리증후군을 앓고 있는 그녀, 한 달에 한 번 짜증과 분노를 제어하지 .. 2025. 4. 1.
에밀 뒤르켐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1. 우리나라 인구 10만 명 당 자살율은 얼마인가? (2023년 정부 통계 자료 기준) 그리스 : 3.9코스타리카 : 7.1오스트리아 : 11.0뉴질랜드 : 12.1미국 : 14.7일본 : 15.6울나라 : 27.3 (남자 38.3, 여자 16.5) 독보적 일등 2. 그래서 몇 명이나 자살하는데?  2023년 자살로 인한 사망자 수 : 13,978명매일 하루에 38명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 3. 10대 청소년 사망 원인 1위는 무엇일까? 1위 : 자살 46%2위 : 암 13%3위 : 교통사고 8% 참고 : 미국은? 1위 : 사고 36%2위 : 살인 21%3위 : 자살 18% 남에게 죽는 미국 청소년, 스스로 죽는 한국 청소년심지어 10대, 20대, 30대 사망원인 1위가 자살 4. 일하다가 죽는 사람.. 2025. 3. 28.
내 블로그가 떡상하는 알고리즘을 만들어줘 : 유발 하라리 <넥서스> 지난 주말 좀 멀리 있는 식당에 핸드폰을 두고 오는 바람에 꼬박 하루를 핸드폰 없이 생활하는 경험을 했다. 평소 잠자리에 들면 누워서 쇼츠를 본다. 뒤척거리며 보다 보면 한 시간은 훌쩍 지난다. 핸드폰이 없으니 불 끄고 바로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알람도 없이, 평소 핸드폰 알람을 맞춘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잠에서 깼다. 평소보다 개운한 느낌이 분명히 들었다. 책을 읽었다. 읽은 분량이 핸드폰이 옆에 있을 때와 비교해서 두 배 이상이었다. 독서의 집중력도 훨씬 좋았다. 산책을 했다. 평소에도 산책을 하지만, 보통은 귀에 이어폰을 꼽고 뭔가를 들으면서 산책을 한다. 핸드폰 없이 산책을 하니 하늘이며, 나무며, 꽃이며, 전봇대의 전선이며, 사람들의 모습 등이 훨씬 선명하게 보였다.  겨우 하루 동안.. 2025. 3. 24.
국외독립운동가 이야기 - 인도 멕시코 쿠바 미국 : 김동우 <뭉우리돌의 바다> 1.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활동지 : 인도 델리 레드 포트     델리 레드 포트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주인도 영국군 총사령부 주둔지로 사용된 곳이다.우리에겐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활동지로 의미가 크다. 인면은 인도와 버마를 뜻하고 전구는 전투 지역을 말한다. 이를 이어 붙이면 인도 버마 전투 지역에 파견된 공작대가 된다. 인도에 간 광복군, 좀 생소한 이야기이지 않나. 그들은 누구였고 어떻게 인도까지 가게 된 걸까. (30쪽) 생소한 이야기 맞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1943년 8월에 공작대 대장 한지성을 포함해 9명의 광복군이 해방될 때까지 인도에서 활약했다. 이들은 영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인도까지 보낸 까닭은 2차 세계대전의 참전국 지위를 확보하기.. 2025. 3. 19.
국외독립운동가 이야기 - 러시아 네덜란드 : 김동우 <뭉우리돌의 들녘> 1. 최재형 고택 : 러시아 우수리스크    이범윤은 최재형과의 첫 대면에서 고종이 하사한 마패를 내보이며 지위로 상대를 억누르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이런 장면은 이범윤의 성품을 대략 추측케 하는데, 처음부터 조선 황실의 피가 흐르는 자신과 최재형을 동격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불행하게도 이범윤과 최재형의 미묘한 신경전은 봉합될 기미 없이 악화일로를 겪게 된다. (75쪽) 연해주의 독립운동사에서 어딜 가나 나오는 사람이 있는데, '페치카'라 불리는 최재형이다. 페치카는 러시아어로 난로라는 말인데, 연해주의 거의 모든 한인과 독립운동 뒤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저격에 총을 구해준 이도 최재형이다. 이범윤은 러시아 공사인 이범진의 동생이며 당시 간도관리사였다. 소설 에서 .. 2025. 3. 18.
인간의 이성은 인간의 본성을 뛰어넘을 수 없나? : 유시민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세상은 점점 더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 무역을 하면 기본적으로 좋은 물건을 싼 값에 얻을 수 있음에도 트럼프는 관세라는 채찍을 무기로 여러나라를 협박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게 나라를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자원을 뺏을라고 굴욕적인 조약을 강요하고 있다. 이에 유럽은 앞다투어 무기를 만드는데 더 많은 돈을 쓰겠다고 한다. 나라 간의 전쟁은 더 잔혹지고 있고, 더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아프리카는 이전보다 많은 쿠데타가 일어나서 백성들이 잘 살기는 더 어렵다. 중국의 독재는 더욱 심해지고 있으며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한때 기후 위기를 걱정해서 세계가 힘을 모아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으나 이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외친다. 미국은 이미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했으며 더 많은 석유를 캐려 하고 있다. 유럽도 에너지.. 2025. 3. 17.
너희가 노인력을 아느냐 : 아카세가와 겐페이 <노인력> 그런데 그걸(라이카 M6 카메라) 잃어버렸다고 했다. 뭐라고? 어디에서 잃어버렸는데? 이렇게 묻자 그걸 알면 안 잃어버렸을 거라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날 상황을 떠올려보면 술집이나 택시에서 잃어버린 듯 한데 술집이라면 다카나시 씨는 늘 가는 단골집이 있는데다가 사진 쪽에서는 유명하니 M6을 놓고 와도 잃어버릴 일은 없다. 그렇다면 역시 택시 아닐까. 노인력 덕분이다. 그럴 만했다. 이제 환갑도 지났으니 착착 진행된다. 기억은 꽤 날아갔고, 시력도 꽤 날아갔고, 다리와 허리도 꽤 날아갔으며, 수면 시간도 날아가 아침 일찍 눈이 떠지니 라이카 M6도 날아갔다. 그런데 너무 속상하다. 상당히 심각하다. 아니 노인력이 상당히 많이 강해졌다는 증거다."당신 실력이 꽤 늘었군." 이런 말을 듣는다면 기분이 나.. 2025. 3. 11.
사랑한다고 말하라 : 조너선 샤프란 모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그날 아빠가 빌딩에서 나한테 전화를 했단다.뭐라고요?아빠가 빌딩에서 전화를 걸었어.엄마 핸드폰으로요? 아빠가 뭐라고 했어요?거리에 있다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고 했어. 집으로 걸어가는 중이라고 그랬어.하지만 아니었죠.그래.엄마가 걱정할까 봐 거짓말을 한 거군요.맞아.하지만 아빠도 엄마가 안다는 걸 알고 있었죠.그래. 엄마가 다시 사랑을 해도 전 괜찮아요.다시 사랑을 하지는 않을 거야.엄마가 다시 사랑을 했으면 좋겠어요.절대로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을 거야.제가 걱정할까 봐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돼요.널 사랑한단다. (452쪽)    2001년 9월 11일, 나는 일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날은 휴일이었는데, 무슨 영화를 찍나 싶었다. 두 번째 비행기가 무역센터 빌딩에 부딪히는 장면은 실시간으로.. 2025. 3. 9.
드라미틱한 삶을 살아가는 탈북민 이야기 : 주성하 <북에서 온 이웃> 1961년 8월, 당시 19세의 동독 병사 한스 콘라트 슈만은 철조망을 뛰어넘어 서베를린으로 넘어왔습니다. 베를린 장벽 건설 3일째 되던 날이었습니다. 이 장면을 서독의 사진 작가가 찍었고, 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사진은 그 다음 날 신문 1면에 기재되었고, 분단 독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2011년 베를린 장벽 붕괴에 관한 문서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가 되었습니다. 서독으로 넘어온 슈만의 삶은 어땠을까요? 하루 아침에 영웅으로 취급을 받았고, 바이에른에 정착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습니다. 아우디 자동차 공장에서 오래 일을 했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그는 진정한 해방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후 그는 동독에 가서 가족을 만났으나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슈만.. 2025. 3. 1.
진영 보도연맹 학살 사건의 재구성 : 조갑상 <밤의 눈> 2024년 10월에 최대성 한림면장 추모사업 설명회가 열렸습니다. 보도연맹 학살이 일어났던 1950년 8월, 최대성 한림면장은 당시에 구금되어 있던 100여 명의 면민을 모두 석방하였습니다. 김해에서 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모두 272명이었는데, 최대성 면장의 이런 현명한 판단과 노력으로 한림 지역의 피해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국민보도연맹(보도연맹, 보련)은 좌익에 몸 담았다가 전향은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입니다. 이승만 정권이 빨갱이 전력이 있는 사람들을 쉽게 관리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많았고, 일반인들도 있었습니다. 625가 발발하고, 보도연맹 사람들이 북한군에 협조하거나 입대한다는 보고를 받은 이승만은 이 빨간 놈들을 모두 처단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2025. 2. 27.
비트라 캠퍼스에 다녀왔습니다 : 이용수 이정은 <자전거를 유럽 도시 읽기> 요즘 책장에 꽂힌 지난 책들을 다시 보는 재미에 빠졌습니다. 이 책은 6년 전(벌써 6년이 되었네요) 유럽 여행 가기 전에 참고로 한 책입니다. 자전거로 유럽을 여행한 책인데 저자가 건축가이다보니 주로 건축물을 보고 감상을 적었습니다. 다시 읽으니 이 책을 참고로 해서 많이 다녔네요. 이 책에 비트라캠퍼스가 나옵니다. 나도 갔더랫습니다. 유럽 여행 일정에 바젤을 넣은 건 순전히 비트라 캠퍼스를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비트라 캠퍼스는 스위스의 가구 브랜드인 비트라의 공장이 있는 곳입니다. 1981년 불이 나서 비트라 공장 대부분이 소실되었습니다. 이후 비트라의 사장인 롤프 펠바움이라는 양반이 공장 부지의 건축물들을 세계적인 건축가들에게 맡겼습니다. 프랭크 게리, 알바로 시자, 안도 다다오, 자하 하디드, 헤.. 2025. 2. 27.
카토 토키코의 명곡, 가끔은 옛날 이야기를 : 미야자키 하야오 <붉은 돼지> 이거 해석 쫌 해도고.야~~ 이거 언제적 편지냐? 2000년도 다이어리에 낑기가 있는 거 주섰다.이걸 아직 가지고 있는 게 용타. 아직 해석 안한 거는 더 용하고. 번역해가 올리라.안 알랴줌. 니가 직접 해보시게.  오래된 친구에게서 카톡이 날라왔습니다. 아주 오래 전 히로시마 대학교를 지을 때 친구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 편지를 친구가 뜬금없이 보내온 겁니다. 편지가 반가왔고, 그걸 아직도 보관하고 있는 친구가 더 반가왔습니다. 어릴 때 부터 함께 자란 친구입니다. 세상에서 친구가 가장 중하다고 여길 때 함께 놀던 친구입니다. 다들 장가를 가고 아이를 낳고 이젠 예전처럼 자주 볼 수 없습니다. 명절이나 친구들 부모님의 부고가 있을 때 얼굴을 봅니다. 편지를 보니 20대의 그 까마득한 시절로 다시 돌아갔.. 2025. 2. 25.
달마가 되는 비법서 :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무한> 2003년에 닉 보스트롬이 라는 논문을 냈다. 이 논문은 '인류 문명이 발달하다보면 언젠가는 컴퓨터로 인간의 의식을 재현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라는 전제를 제시했다. 물론 현재는 당연히 불가능하지만, 밀리초당 10의 17승 정도의 연산이 가능한 컴퓨터가 나오면 인간의 뇌를 재현할 수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이 전제를 받아들일 경우 아래 세 가지 명제 중에서는 하나는 분명히 참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1. 인류는 의식 재현 수준의 기술력에 도달하기 전에 멸망할 것이다.2. 기술력에는 도달하지만, 의식을 재현해내는 대규모 시뮬레이션을 진행하지 않을 것이다.3. 기술력에 도달하고 시뮬레이션을 만든다. 일단 2번은 거짓이다. 인간이 시뮬레이션을 만들 수 있다면, 내가 주인공인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만들지 않.. 2025. 2. 20.
한국의 아이히만들 : 유시민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윤석열 탄핵 심판이 한창 진행중이다. 계엄령 부역자들에 대한 재판 및 청문회도 진행하고 있다. 계엄과 관련하여 명령을 한 자들, 명령을 받아 수행한 자들, 그리고 그 명령을 거부한 자들이 증인으로 나왔다. 주무 장관들, 장관 밑에 있던 차장들, 국정원의 요원들, 그리고 군인들이 나와서 계엄 상황을 설명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헌법을 위반한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으면서도 그럴 작정이 전혀 아니었다고 변명했다. 계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고, 사태의 심각성을 몰랐으며, 자신의 행동에 대해 옮고 그름을 판단한 시간적 심리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그들의 공통된 말들이었다. 이 책에서 유시민 작가도 언급했지만, 나치의 핵심 권력자이며 홀로코스트 기획회의에도 참가했고 유대인 학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아이.. 2025. 2. 19.
사형을 구형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 김현서 <김병곤 평전> 영광입니다! 검찰관님, 재판관님. 영광입니다. 사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잃고 삶의 길을 빼앗긴 민중들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어 걱정하던 차에 이 젊은 목숨을 기꺼이 바칠 기회를 주시니 고마운 마음 이를 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 (213쪽)    오래전에 이 책을 데리고 와서 두었는데, 읽지 못했습니다. 나는 와 안읽는데? 하고 책이 자꾸 쳐다봤습니다. 쉬이 읽을 책이 아니라서 손이 안갔을까요? 책이 보내는 눈길이 심상치 않아 책을 끼고 도서관에 갔습니다.  김병곤 열사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습니다. 우리 고장 출신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는 것, 그리고 그 법정에서 현대사에 길이 남을 최후 진술(위의 글)을 했다는 것 정도입니다. 이 사실을 안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 2025. 2. 18.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 김주혜 <작은 땅의 야수들>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603쪽)    역동의 시대에 다양한 인물들이 자기 삶을 치열하게 살아간다. 어떤 이는 세상과 타협하며 살고 어떤 이는 어려운 시대임에도 자신의 길을 꿋꿋이 찾아간다. 삶의 갈림길에서 한쪽을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 어떤 삶이 더 나았다고 할 수 있는지, 소설을 읽으면서 각 인물들의 선택을 이해하고 그 결과를 볼 수 있으며, 그래서 누구의 삶이 더 나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옥희의 지원을 받아 성공한 한철은 성공을 위해 옥희를 버리고 성수의 딸을 선택한다. 이 결정을 납득할 수 없다. 욕을 한바가지 먹어도 싸다. 옥희는 왜.. 2025. 2. 7.
아마야도리, 당신의 품에서 비를 긋다 : 배삼식 <3월의 눈> 아마야도리라는 일본말이 있습니다. 사다 마사시의 노래 제목이기도 합니다. 일본어로는 雨宿り라고 씁니다. 한자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비를 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처마 밑이나 그 비슷한 곳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 또는 그 행동을 말합니다.   갑자기 비가 쏟아지네, 어떡하지? 우산도 없는데. 소나기 같으니 일단 저 건물 처마 밑에서 비가 그치기를 잠깐 기다리자. 그래서 비를 잠깐 피하고 있는데, 예쁜 여자가 머리에 맞은 비를 훔쳐내며 이 처마 밑으로 들어오네. 눈이 마주쳤다. 어, 말을 걸어야 되나? 뭐라도 해야 하나? 손수건을 건내면 많이 오반가?  네, 그렇습니다. 잠깐 비를 피하는 것이라는 뜻의 아마야도리는 그 단어 자체로도 좋지만, 그 단어에서 파생되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기대감이 있습.. 2025. 2. 6.
빨치산의 딸이 아버지를 보내며 :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1.인물은 박색이었으나 방물장수의 목소리는 갓 지은 찰밥처럼 좌르르 윤기가 흘렀다. 사회주의자고 뭐고 남자란 죄 야들야들한 암컷 앞에서 흐물흐물 녹아나는 모양이었다. 안방에서 귀를 세운 나는, 그렇다면 사회주의보다 더 강력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봐도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을 뇌세포에 각인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콩 심은 데 반드시 콩이 나는 것은 아닌 법이다.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피를 받고 그런 아버지의 교육을 받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자다. 남들에게는 빼도 박도 못하는 빨치산의 딸이겠지만. (11쪽) 2.어머니는 몇시간 전 세상 떠난 아버지가 북한을 비판하면 파르르 날을 세우던, 누가 보면 천생 사회주의자였다. 그런데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 더 풀어.. 2025. 2. 4.
쇼츠를 끊고 싶습니다 : 요한 하리 <도둑맞은 집중력> 화장실에 가면 30분은 기본이고 한 시간도 앉아 있습니다. 일 하다가 잠깐 핸드폰을 봤는데 한 시간이 넘게 지났습니다. 밤에 잘 때는 두어 시간은 그냥 가버립니다. 쇼츠 이야기입니다. 삶이 아닌 것은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이를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쇼츠를 비롯한 유튜브입니다.  쇼츠를 보는 시간도 아까울 뿐더러, 더 중요한 것은 이넘에게 질질 끌려다닌다는 겁니다.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뭐도 하고 뭐도 하고 해야지 하며 계획을 세웠지만 이넘 때문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서 또 후회하고, 이 같은 패턴이 반복되면서 에잇, 될대로 되라며 대충 삽니다.  핸드폰을 없애버릴까요? 아님 어르신 폴드폰으로 바꿀까요? 이런 극단적인 선택 외에는 방법이 없을까요? '쇼츠를 끊어버리자'는 결심만으로는 잘.. 2025. 1. 29.
장애는 가치가 있는가? : 수나우라 테일러 <짐을 끄는 짐승들> 싱어 : 당신이나 당신 아이의 장애를 치유할 수 있고, 그 비용도 겨우 2달러에 부작용도 전혀 없는 알약이 있습니다. 당신은 이 알약을 사용할 겁니까? 저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알약을 사용할 거라고 생각해요. 테일러 : 글쎄요, 제가 볼 때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 약을 사용하려고 하겠지만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싱어 : 그럼 당신은 사용하지 않겠다고요? 테일러 : 절대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싱어 : 정말요? 테일러 : 장애인들은 항상 그런 질문을 받아왔어요. 장애인들이 그런 질문에 '아니요'라고 답할 수도 있다는 걸 비장애 신체를 가진 사람들이 이해하기란 정말 어려울 겁니다.  싱어 : 그럼 왜 당신이 그 알약을 쓰지 않겠다는 것인지 좀 더 이야기해주세요. 테일러 : 저는 예술.. 2025. 1. 25.
걷기 좋은 도시가 가장 살기 좋은 도시다 : 데이비드 심 <소프트 시티> 유럽은 자전거의 천국입니다. 자전거가 취미나 동호회 수준이 아니라 정말 하나의 교통 수단입니다. 자전거는 아주 효율적인 이동 수단으로, 어딜 가나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북유럽 국가, 그리고 독일과 네덜란드는 자전거를 이용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지난 유럽 여행때 암스테르담에서 4일 정도 머물렀는데, 자전거를 빌려 다녔습니다. 하루는 자전거로 한적한 길을 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쓩~~ 하고 추월하길래 보니 할머니였습니다. 무슨 자전거 축지법을 쓰는지 편안하게, 하지만 무지 빠르게 자전거를 타고 계셨습니다. 젊은 여자들도 치마 자락을 휘날리며 페달을 밟고 있었습니다. 아, 네덜란드는 이런 나라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암스테르담의 구도심과 신도시, 시외,그리고 잘 정비된 .. 2025. 1. 23.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의 아니키스트 : 야마다 쇼지 <가네코 후미코> 1. 내가 무적자라는 게 나의 죄일까? 나는 무적자라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만이 아는 일이었고, 그 책임도 두 사람에게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학교는 나에게 그 문을 닫아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경멸해 마지않았다. 육친인 할머니마저도 내가 무적자라는 이유로 멸시하고 협박했다. (, 본문 44쪽)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1월 25일 요코하마시에서 장녀로 태어난다. 어릴 때는 호적에 이름이 올라가지 않아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1912년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부강리에 있는 고모 집안에서 성장한다. 7년 동안 조선에서 살면서 학대를 받은 그는, 비슷한 처지에 있던 조선인들에게 깊은 이해와 공감을 가지게 된다.  2.지금까지 얇은 베일에 싸여 있던 세상의 모습이 점.. 2025. 1. 23.
노벨문학상 작품을 원어로 읽었다 : 한강 <희랍어 시간> 한강 작가 2024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여덟 살 때의 어느 날을 기억합니다. 주산학원의 오후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맹렬한 기세여서, 이십여 명의 아이들이 현관 처마 아래 모여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습니다. 도로 맞은편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마치 거울을 보는 듯 그 처마 아래에서도 수십 명의 사람이 나오지 못하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쏟아지는 빗발을 보며,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습기를 느끼며 기다리던 찰나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나와 어깨를 맞대고 선 사람들과 건너편의 저 모든 사람이 '나'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저 비를 보듯 저 사람들 하나하나가 비를 보고 있다. 내가 얼굴에 느끼는 습기를 저들도 감각하고 있다. 그건 수많은 일인칭들을 경험한 경이.. 2025. 1. 17.
윤씨가 독방에 갔다 내 그럴 줄 알았다 : 강만길 <20세기 우리 역사> 계엄령 발표 이후 온 나라의 관심은 대통령 탄핵이었다. 결국 오늘 대통령은 체포되었다. 이제 대통령은 햇볕을 보는 일이 없을 것이다. 곧 구속이 되고, 파면이 되고, 감옥에 갈 것이다.  돌이켜보면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 국회의원들이 그렇게 빨리 계엄 해제를 하지 않았다면, 시민들이 국회로 모이지 않았다면, 양심 있는 군인이 없었다면, 아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런 멍청한 인간들로부터 위협 받을 정도로 얇았던가? 아니면 이렇게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들의 힘이 대단한가? 물론 후자긴 하지만 그래도 반성할 여지는 충분하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우리 시민들이 힘겹게 쌓아올린 이 민주주의를 무자비하게 밀어버릴 시도를 했던 주도자를 철저하게 심판해야 한다. 다시는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 2025. 1. 16.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따스한 슬픔의 불빛이 켜진다 : 클레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11쪽, 소설의 첫 문장) 1985년 겨울, 아일랜드의 작은 도시 뉴로스, 여기에 사는 펄롱은 땔감과 석탄을 팔면서 살아간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가 없었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많은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바르게 성장했고, 지금은 아내와 다섯 딸을 돌보며 지역에서도 신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좋은 남자이자 남편이고 아버지다. 그런 펄롱 덕에 그의 가족은 물질적인 어려움 없이 단란하고 행복하다. 어느 날 땔감을 배달하러 간 수녀원.. 2025. 1. 12.
우당 이회영의 아내 이은숙 회고록 : 이은숙 <서간도시종기> 들이가 서울에서 미처 가지고 오지 못한 짐이 있어 차를 몰고 서울에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하루에 갔다오기는 부실한 허리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아 오후쯤 출발해서 하루 자고 다음날 짐을 찾아 오기로 했습니다. 모처럼의 서울 나들이에, 딸과 함께 하는 일정이라 신났습니다. 반나절 정도의 데이트 코스를 알아보았습니다. 먼저 떠오른 건 이회영 기념관입니다. 몇 달 전 새로 개관했다는 소식을 얼핏 보았는데,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그래, 우당 선생이면 당연히 가서 뵈어야지. 지도를 찾아보니 경희궁 뒷쪽입니다. 근처에 딜쿠샤가 있습니다. 복원하기 전의 황량한 딜쿠샤를 간 적이 있었는데, 이젠 깨끗이 단장한 딜쿠샤도 만날 수 있겠군요. 주차는 서울역사박물관에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하여 서울역사박물관 - 경희궁 - 홍난파.. 2025. 1. 11.
위대한 교육실천가 강성갑 : 홍성표 <한얼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대학을 나오고 서울 바닥에 눌러 앉아 월급쟁이나 할 생각은 버리고 농촌으로 오시오. 농촌을 움직이는 사람이 결국은 조국을 움직이게 됩니다. 한 5년이나 10년, 딴 생각말고 농촌에 묻혀 농민들을 도우며 그들와 더불어 사는 사람만이 대한민국의 주인이 될 겁니다.” 1949년 여름, 연희대학교의 강당에서 강성갑 선생이 했던 말이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고, 국민들의 대다수가 농업에 종사하였기에 농촌의 문제가 곧 나라 전체의 문제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소수의 지주와 다수의 소작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신분상의 문제, 빈부격차, 차별 등은 해방이 되어서도 가장 심각한 사회 경제적 문제였다. 선생은 이것을 해결해야 모두가 행복한 새로운 나라가 될 것이라 믿었다. 강성갑 선생은 1912.. 2025. 1.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