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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시골 마을의 작은 벤치가 생각납니다 : 나희덕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이 산문집에 바람의 이야기와 텅 빈 벤치 사진이 나옵니다. 그 사진을 본 순간 스위스 여행이 떠올랐습니다. 5년 동안 한번도 기억에 올린 적이 없던 장면이 머리 속에 나타난 겁니다. 참 이상하지요, 어떤 메카니즘이 기억 저 편에 있던 그 장면을 불러왔을까요? 그래서 유럽 여행의 사진을 오랜만에 다시 찾아봤습니다. 위의 사진입니다. 숨비츠라는 작은 마을에 여행자를 위한 벤치와 그 벤치에서 앉아 본 풍경입니다.   페터 춤토르의 성 베네틱트 교회는 스위스의 숨비츠에 있습니다. 거의 숨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전 건축 공부를 할 때 사진을 보고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맘 먹었더랬습니다. 밀라노에서 새벽에 출발해서 기차를 다섯 번이나 갈아타고 무인역인 숨비츠에 내려 한참을 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2024. 11. 16.
경근쌤, 부디 잘 가셔요 : 엄경근 <산복도로 오딧세이아> 엄경근 2024  엄경근 2024  엄경근 2024  엄경근 2024 (이 그림과 함께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가 게시됨)  엄경근 2023  엄경근 2023  그림을 그리는 아이에게 미술실 뒷통수를 자처한 아이.미술 교사인 나보다 더 오래 미술실을 지키는 아이.뭘 그렇게 열심히 만들고 그리는지,한번 앉은 자리에서 몇 시간을 일어설 줄 모른다. 강제가 아닌 스스로 만들어낸 집중의 시간임을 알기에혹여 내가 그 흐름을 깨진 않을까, 발걸음도 조심스러웠다. 무엇을 그렸나, 얼마나 잘 그렸나 하는 궁금증보다,집중하는 그 모습 자체가 예뻐서훔쳐보는 내내 뿌듯하고 가슴 벅차기도,때로는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보다'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오늘의 미술 교육 현주소를 고민하.. 2024. 11. 9.
국방부 놈들아, 너희들은 이 책을 읽었느냐? : 방현석 <범도> 1. 김알렉산드라 알렉산드라는 우리와 얘기를 나누는 중간에 몇 차례나 걸려온 전화를 받고 유창한 러시아어와 중국어, 조선어로 지시를 내렸다. 그녀는 그때마나 우리에게 양해를 구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서는 진심이 묻어났다. 달라지지 않는 그녀의 태도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려주었다. 로씨아혁명의 지도자 레닌이 왜 그녀를 신뢰하고 칭송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2권 389쪽)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책에서는 김수라라고 홍범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하바롭스크에 들어선 극동 소비에트 인민정부의 외무장관으로 나온다. 소왕령(우수리스크)의 흰파 문창범과 하바롭스크의 붉은파 김알렉산드라가 홍범도에게 초대장을 보냈고, 홍범도는 알렉산드라를 택했다. 독일 첩자로 몰린 이동휘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기 직전 .. 2024. 10. 22.
나는 왜 이 소설이 불편한가 : 과탈루페 네텔 <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 # 라우라 나는 주말 내내 침묵을 지켰다. 월요일에는 예약도 없이 산부인과 진찰실에 찾아가 나팔관을 묶어달라고 요청했다. 내가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 연거푸 질문을 던진 후 의사는 스케줄을 확인했다. 바로 그 주에 나는 수술실에 들어갔다. 인생 최고의 결정이라고 확신했다. (25쪽) 아기를 갖고 싶어하는 남친의 유혹에 넘어가 뜨밤을 보내고 난 뒤 후 라우라의 행동이다.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고국 멕시코로 돌아온, 말하자면 상류층의 많이 배운 여성인 주인공은 자유분방한 삶을 살지만, 결혼과 출산에 있어서는 신념이 확고하다. 행복한 삶에 결혼과 출산은 절대적인 장애물이라는 신념.  # 알리나 "저를 재우지 말아주세요." 알리나는 분명히 말했다. "저는 이네를 만나고 싶어요. 얼굴을 보고, 가능한 한 모든.. 2024. 10. 16.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는 찌질이가 아니다 : 남문희 <전쟁의 역사> "This Is Spartaaa!" 제랄드 버틀러 형님이 빤쭈에 빨간 망토만 걸치고 세상 가오는 혼자 다 잡는 영화에 나오는 명대사다. 스파르타의 최정예 300명이 테르모필레에서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100만 대군과의 싸움이 주된 내용이다. 주인공은 그리스를 대표하는 영웅 중의 한 명인 스파르타의 레오디나스 왕이다. 조국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300명의 스파르탄과 함께 페르시아 100만 대군과 제대로 한타를 뜨는 장면은 압권이다. 근데, 영화에서 페르시아의 군대는 미개한 괴물 집단으로 묘사된다. 더우기 왕인 크세르크세스는 완전 열폭 찌질이로 망가진다. 문득 궁금했다. 진짜 저랬을까?  아케메네스 왕조, 일명 페르시아 제국은 기원전 550년부터 330년까지 220년 동안 실제한 이란의 고대 왕조다. 오리엔.. 2024. 10. 14.
호모 사피엔스는 곧 사라진다 : 유시민 <거꾸로 읽는 세계사>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약 7000발의 미사일이 이스라엘로 향했고, 하마스의 지상군이 이스라엘을 침투해서 민간인과 군인 360여 명을 죽였고 인질로 삼았다.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조직으로 사실상 이스라엘의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단체다. 가자지구는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의 지역이다.  이스라엘은 즉각 전쟁을 선포했고, 네타냐후는 가자지구에 하마스가 있는 장소를 폐허로 만들거라고 대대적으로 공표했다.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가자지구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하마스를 잡기 위해 팔레스타인 민간인을 죽였다. 이스라엘은 민간인 포함 천여 명이 죽었고, 팔레스타인인 사망자는 사만 명이 넘었다. 전쟁은 끝나지 않고 1년째 계속되고 있다.  레바논의 정치 집단이자 군대.. 2024. 10. 8.
아는 만큼 들린다 몰라도 잘 들린다 : 남문성 <Paint It Rock> 막내가 봉하마을에서 열리는 밴드 경연대회에 나간댑니다. 기타 유민제, 베이스 변재현, 드럼 한바다, 기타 겸 보컬 김강으로 구성된 입니다. 공연과는 달리 순위를 매기는 경연이라 긴장하는 눈치였습니다. 무슨 곡을 할거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처음엔 비밀이라더니 나중에 김광석의 와 산울림의 로 정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경연 3일 전에 아이들이 모두 우리집에 모였습니다. 친구한테서 드럼도 빌려오더니 합숙 훈련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의견도 많이 나누고, 장난기도 쏙 빼고 제대로 연습을 했습니다. 살짝 들여다보니 편곡 실력이 상당합니다. 두 노래 모두 매력적으로 변했습니다.  경연은 훌륭했습니다. 무대의 퍼포먼스도 좋았고 무엇보다 연주의 수준이 높았습니다. 다른 팀도 잘했지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 2024. 10. 4.
클랩함 정션으로 가는 길 : 림태주 <관계의 물리학> 문명을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진화하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세상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본다. 공부가 배움을 잃고, 만남이 사귐을 잃고, 노동이 땀을 잃고, 삶이 쓸모를 잃어가는 세상이 결코 진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53쪽)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싶다면, 내 성격이 어떤가를 남들에게 묻기보다 내 혀가 어떤 말을 주로 내뱉고 있는지 스스로 살펴봐야 한다.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기를 원하다면, 성격이 아니라 사용하는 언어를 바꾸고 말하는 태도를 바꾸면 된다. 성격은 바꾸기 힘들지만 말의 색채는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선택하고 바꿀 수 있다. (80쪽) 누구나 삶을 견디며 산다. 동정할 까닭도 값싼 위로를 건낼 이유도 없다. 오래 견디면 견디고 산다는 걸 잊게 된다. 견디.. 2024. 10. 3.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 곳으로 가네 : 하종강 외 7인 <하고 싶은 일 해 굶지 않아> 산이는 간디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대학을 안간다길래 "집구석에 빈둥빈둥 하는 꼴 못본다."라고 말해두었더니 졸업 후 3개월만에 군대에 갔습니다. 지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보기에는 수월하게 군대를 마쳤습니다. 제주도 한 달 살기를 두어 번 하더니 에버랜드에 알바를 하러 갔더랬습니다. 일 년 가까이 에버랜드의 식당에서 구르더니, 내려와서는 올해 그 더운 여름, 집 근처 워터파크에서 가이드로 두어 달 일하기도 했습니다.  "아빠, 일본에 우프를 가려고 하는데 어느 지역이 좋겠어요?" 하고 얼마 전에 물어왔습니다. "도심보다는 시골이 낫지 않겠냐? 그리고 이왕 시골에 가려거든 동북지방이 깡시골인데." 라고 답을 해주었습니다. 호스트에게 메일을 보낸다 어쩐다 하더니 일본에서 가장 시골인 이와테현의 하치만타이라는.. 2024. 10. 1.
한국의 다니구치 지로 : 정용연 권숯돌 <1592 진주성> 진주대첩 김시민 장군을 주축으로 조선군 3,800명이 일본군 30,000명을 막아낸 전투(1차 진주성 전투). 이 책의 배경이며 임진왜란 발발 후 조선이 수성전에서 일본군을 완벽하게 물리친 첫 전투라고 책에 나온다. 책의 부제가 '전라도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다. 이는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온전히 보호하고 이순신의 수군 전력을 유지시킨 대단히 중요한 전투라 행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개빡친 일본군이 이듬해 6월 10만 대군으로 다시 진주성을 공격한다. 2차 진주성 전투라 불리며 임진왜란 중에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처절한 전투다. (결국 진주성을 함락한 일본군의 피로연에 19살의 논개가 일본군 장수를 안고 강에 뛰어들었다.) 책의 주인공은 김시민 장군과 진주성의 민초들이.. 2024. 9. 30.
태어나보니 안중근의 아들이라면.... : 김훈 <하얼빈> 김아려 (1878~1946) 아려, 이름이 참 예쁘다. 1894년 안중근과 결혼해서 딸 현생과 아들 분도, 준생을 두었다. 거사 직전 아들들을 데리고 하얼빈으로 갔고, 도착하자마자 남편이 이토를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제에 잡혀 갇히게 되고, 곡절 끝에 풀려나 도주하여 러시아 꼬르지포 인근 조선인 마을 목릉 팔면통에 정착했다. 1910년에 남편이 처형당하고, 그 이듬해인 1911년에 큰아들 분도가 일곱 살로 죽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상해에 들어서자 상해로 이주했다. 중일 전쟁 이후에 계속 중국에 남아 있었고,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상해에서 죽었다.  김아려의 심정을 듣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김아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어떤 기억이나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고 김훈 선생은 책에서 말했다.   .. 2024. 9. 24.
나라를 말아 먹은 대통령을 찾아봤다 : 쥴피 리바넬리 <마지막 섬> 1.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70세) 튀르키예 현직 대통령. 2003년부터 20년째 집권을 하고 있다. 의원내각제로 총리를 12년 해먹고, 계속 더 해처먹을라고 대통령제로 바꿨다. 심지어 이번 대통령 선거에도 당선되어 2028년까지 해 먹을 수 있다. 좀 희한한게 독재자이지만, 선출된 독재자다. 이게 말이 되나. 튀르키예 국민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슈카월드에 자주 등장해서 친숙하게 되었다. 여태 튀르키예를 말아 잡수시고 계신다.  튀르키예 물가 상승률은 평균 40%다. 물가가 그렇게 오르니 최저 시급을 50% 올려서 임금을 물가에 맞추는 정책을 썼다. 인플레이션이 이렇게 엄청난데도 금리를 내리는 노벨상감의 금리 정책으로 튀르키예 경제를 아주 박살 냈다. 요즘 엔화가 싸져서 다.. 2024. 9. 23.
Chat GPT에게 독후감을 써달라고 했다 : 옥타비아 버틀러 <블러드 차일드> 올 여름에 이주현 교수를 모시고 글쓰기 강좌를 열었다. 나는 주최자이면서 학생이었다. 교수님은 이 책을 추천했다. 책에는 를 비롯해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 중에 한 편을 골라 읽고 독후감을 쓰는 숙제를 내주셨다. 엄청난 상을 받은 엄청난 소설이라는 평가임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뭔가 낯선 소설이었다. 비유와 은유와 상징이 한가득했다. 이를 다 풀기에는 나의 한계가 명확했다. 해서 인공지능의 힘을 빌려봤다.   Chat GPT에게 물어봤다. 첫번째 질문은 '마사의 책에 대해 말해줘'라고. AI의 답은 아래와 같다.옥타비아 버틀러의 "The Book of Martha"는 책임, 변화, 인간 본성에 대한 주제를 다룬 사려 깊은 단편 소설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녀의 단편 소.. 2024. 9. 22.
늙기의 즐거움, 늙기의 자연스러움, 늙기의 두려움 : 김훈 <허송세월>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병원에 가셨는데, 오빠야 니가 좀 가봐야 될 것 같다." 동생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고, 나는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진료실 앞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아버지, 아버지, 진료는 보셨어요?" 하며 깨웠고, 아버지는 의사를 만났는지 안만났는지도 모르겠다고 어눌하게 말씀하셨다. 혹시 몰라 1층 접수에 가니 이미 접수는 했다고 한다. 담당 간호사에게 다가가 어찌 된 일이냐고, 의사를 뵐 수 있냐고 물었다. 간호사는 진료는 봤고, 아마도 부정맥이 원인인 것 같으니, 부정맥으로 다니던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근수 내과에서 간호사가 모시고 왔다고 했다. 요약하면 몸이 좋지 않아 근처 내.. 2024. 9. 21.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라 : 조국 <조국의 법고전 산책> 사형 선고가 나오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패소한 이유에 대해 "설득 논리가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뻔뻔스러움이나 몰염치함이 부족하여 여러분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 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미 사형 선고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저의 방식대로 변명한 데 대하여 지금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비굴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살아남기보다는 저의 방법을 선택함으로써 죽는 편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문구를 읽으면서 떠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1974년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며 투쟁하다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던 재학생 김병곤(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4학년)은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가 내려지자 당당히 외쳤습니다. "영광입니다. 저는 유신 치하에서 생명을.. 2024. 9. 19.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 : 류이치 사카모토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요즘 도마의 이라는 노래를 듣고 있습니다. 강이가 혼자 기타를 치며 부르고 있길래 물어보니 이 노래라고 합니다. 노래가 경쾌하고 특히 아들 녀석이 맛깔나게 부르니 더 멋져 보입니다. 듣다보니 좋은 건 멜로디 뿐만이 아닙니다.  슬픔은 저어기 골목 끝까지 갔다가 내가 부르면 다시 달려오고슬픔은 저어기 시장통에 구경 갔다가 밥 짓는 냄새에 돌아오지 밥 짓는 냄새에 돌아오는 슬픔이라, 어쩜 이리 감성적인 가사를 쉬이 만들었을까요? 나이도 엣되어 보이는데요. 그런데, 벌써 오래 전에 고인이 되었다네요. 헐, 이 피지 못한 청춘을 어찌 할까요. CTR사운드에 가면 도마의 서약서가 있댑니다. 아프지 말고 건강하게 2집을 마무리할 것이라는 내용으로요. 그런데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고 합니다. 남은 절친.. 2024. 9. 17.
도시재생, 풀뿌리 민주주의의 선봉장 : 조진만 <그를 만나면 그 곳이 특별해진다> 우리 동네에 불암도시재생현장지원센터라는 곳이 있습니다. 여기 센터장이 음, 재미납니다. 출신부터 남다릅니다. 밀라노 공대 출신입니다. 그것도 건축학과. 밀라노 공대는 이탈리아 최대 규모이자 최고의 공과대학이며 세계적으로도 그 명성이 자자합니다. 특히 디자인과 건축 분야에서는 탑오브탑을 달립니다.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받은 알도 로시와 렌조 피아노가 밀라노 공대 출신입니다. 이런 학교를 나와서 도시재생 센터장을 하고 있습니다. 핥핥핥. 하지만 도시재생에는 진심입니다. 도시재생에 걸림돌이 되는 행정이나 제도에 대해 가끔 쓴 소리도 합니다. 그 만큼 열정이 있습니다.  도시재생이란 쇠락한 지역을 다시 활동적인 지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낙후 지역을 바꾸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보편적.. 2024. 9. 16.
고시엔, 고교 야구 열혈 청춘의 그 정점에서 : 모리타 마사노리 <루키즈> 쇼츠에서 고시엔의 한국 교가를 들은 건 8강이 끝나고였다. 고시엔이 어떤 곳인가. 일본에서 야구 좀 한다는 고등학생들이 그토록 밟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가 아닌가. 지면 바로 짐 싸서 고향으로 가야 하는 살벌한 토너먼트 경기다. 탈락한 학생들이 울면서 고시엔 경기장의 흙을 담는 모습은 그 자체로 슬픈 드라마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만 산다는 정신으로 부서져라 몸을 던진다. 그런데 그 꿈의 무대에 한국어 교가를 부르는 학교가 8강까지 올라갔다고? 교토국제고는 4강에서 아오모리 야마다고등학교에 3대2 짜릿한 역전승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이긴 팀의 교가를 선수들이 함께 부르는 건 고시엔의 성스러운 의식이다.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아침 저녁 몸과 덕 닦는 우리의 정다운 .. 2024. 9. 15.
산티아고 순례길을 내려놓습니다 : 김응용 <그냥, 2200Km를 걷다>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툴룽에서 스페인의 포트부로 이동한 적이 있습니다. 기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갔었는데, 남부 프랑스의 해안을 따라 가는 기찻길이었습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경관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시골과 바다가 묘하게 오버랩된 매력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언젠가 이 길을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프랑스의 남부 지역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흐도 아를에 머물렀다고요.  포트부는 발터 벤야민이 나치를 피해 피렌체 산맥을 넘어 겨우 프랑스를 탈출했으나 스페인의 프랑코 정부가 입국의 거부하자 희망을 잃고 자살한 곳입니다. 예전에 어떤 건축책에서 이 곳에 있는 발터 벤야민의 기념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꽤 오래 마음에 남아서 버킷 .. 2024. 9. 7.
백 년 전 일본의 시덥잖은 뒷담화 : 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는 고양이다. 아직 이름이 없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아무튼 어두컴컴하고 축축한 데서 야옹야옹 울고 있었던 것만은 기억난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인간이라는 족속을 봤다. 나중에 들은 즉 그건 서생이라는 인간, 인간 가운데서도 가장 영악한 족속이라고 한다. (p.16)  그는 고약한 굴처럼 서재에 딱 들러붙어 일찍이 외부 세계를 향해 입을 연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아주 달관한 듯한 상판대기를 하고 있으니 가소롭기 짝이 없다. (p.39)  그에 비하면 고양이는 단순하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화가 나면 열심히 화를 내고, 울 때는 죽어라 운다. 우선 일기처럼 쓸데없는 건 결코 쓰지 않는다. 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주인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은.. 2024. 9. 4.
이러다 곧 온다 : 실버 센류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종이랑 펜찾는 사이에쓸 말 까먹네 야마모토 류소. 남성. 지바현. 일흔세 살. 무직 (p.9)  일어나긴 했는데잘 때까지 딱히 할 일이 없다 요시무라 아키히로. 남성. 사이타마현. 일흔세 살. 무직 (p.17)  자명종 울리려면 멀었나일어나서 기다린다 야마다 히로마사. 남성. 가나가와현. 일흔한 살. 경영 컨설턴트 (p.19)  연명 치료 필요없다 써놓고매일 병원 다닌다 우루이치 다카미쓰. 남성. 미야기현. 일흔 살. 무직 (p.20)  "연세가 많으셔서요"그게 병명이냐 시골 의사여 마쓰우라 히로시. 남성. 지바현. 여든세 살. 무직 (p.50)  손주 목소리부부 둘이서수화기에 뺨을 맞댄다 나카쿠보 시로. 남성. 히로시마현. 일흔여섯 살. 무직 (p.72)  무농약에 집착하면서내복약에 절어 산다 나카타니.. 2024. 9. 3.
고전의 지혜는 나를 현명하게 만들어 줄까? 전호근 <사람의 씨앗> 1. 사람이 다쳤느냐? 에 기록된 내용을 읽어보면 참으로 이상하다. 난생 처음 듣는 신기한 이야기도 아니고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칠 만큼 재미난 이야기도 아니고 가슴 불타는 정의감을 불러일으키는 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다. 마구간에 불이 났다. 공자가 퇴근하여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 다쳤느냐?" 그러고는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p.17) 즐겨보는 드라마 에 겨울이가 정원이에게 자기 집안의 개판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아빠는 가정 폭행범이고 엄마는 아빠한테 맞아서 반병신이 되어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고. 정원이의 반응이 궁금했는데, "니 탓이 아니야. 니가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라고 위로한다. 의 저 구절이 생각났다. 논어는 이천오백 년 .. 2021. 8. 28.
사이보그지만 괜찮지 않아 : 김초엽 김원영 <사이보그가 되다> # 1. 아파트 경비원 민수는 1995년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 이후 줄곧 의족을 착용한 채 일했다. 2010년 12월 민수는 근무하던 아파트 단지의 눈을 치우다 넘어졌고, 그 일로 의족이 파손되고 말았다. 업무 중 의족이 부서졌기에 민수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했다. 산재보험법에 따르면 근로자가 업무와 관련하여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경우에 산재에 해당된다. 민수의 산재 신청 결과는? # 2. 23살의 무용수 승희는 2013년, 우연히 보스턴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코스 근처에 있었고, 폭탄 테러에 휘말려 다리 하나를 잃었다. 승희에게 잃어버린 다리는 좀 더 특별했다. 그는 단순히 다리 하나를 잃은 게 아니라 춤을 추며 살아왔던 시간과 앞으로 춤을 추며 살아갈 날들에 대한 꿈을 잃었다... 2021. 8. 24.
무림 최강자가 되기 위한 잎싹의 여정 : 황선미 김환영 <마당을 나온 암탉> 잎싹은 슬쩍 마당을 봤다. 늙은 개와 역시 늙은 수탉과 암탉, 날기를 포기한 오리 몇 마리가 있을 뿐이었다. 닭장에서 나가기만 하면 마당의 저들을 제압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닭장이었다. 자신의 노력으로 여기서 탈출하기란 불가능했다. 닭장을 들락날락하던 주인을 유심히 관찰한 잎싹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죽은 닭이나 알을 낳지 못하는 닭은 낡은 수레에 실려 나갔다. 잎싹의 머리는 번개같이 회전했다. 그날부터 잎싹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하루, 이틀, 사흘, 배가 고파서 미칠 것 같았지만, 닭장을 탈출할 수 있다면야. 단식 닷새째가 되니 모가지를 가눌 수 없게 되었다. 다리에 힘도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이거, 닭장을 나가기 전에 먼저 죽는 거 아냐?"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 2021. 8. 19.
경계의 시간, 이름 짓기를 희망하다 : 허태준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동네 책방 에 저자의 초청 강의가 있었습니다. 책을 재미있게 읽은 터라 설레는 마음으로 책방에 갔습니다. 잘 생긴 청년이 와 있었습니다. 마스크 속의 얼굴이 궁금할 정도였습니다. 대면으로 하는 북토크는 이제 겨우 두 번째라 많이 긴장된다며 수줍게 웃었습니다. 청년은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속해 있는 집단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존재를 증명받을 수 있다. '대학생', '군인', '직장인', '사회초년생'이라는 말 안에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할 정도의 서사가 녹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일하는 청년, 대학생이 아닌 이십대, 군인이 아닌 군 복무자였던 나는,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넘어가지 못한 채 경계 위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p.6) 책의 부제는 .. 2021. 8. 18.
얼른 글 쓰고 유튜브 봐야지 : 김성우 엄기호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하루의 모든 일을 마치고 방에 눕습니다. 그리곤 유튜브를 봅니다. 새로운 동영상이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긴벌레의 턱걸이 영상, 하하하의 고양이 영상, 곽튜브의 러시아 여행기, 믈브의 야구, 장삐쭈의 군대 이야기, 오늘 있었던 바둑 하이라이트, 새로운 영화 소개까지,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보면 두 시간은 후딱 가버립니다. 누워서 뒹굴거리며 유튜브 보는 시간이 가장 편안한 시간입니다. 책을 읽으면 잠이 잘 오는데 동영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재미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보기만 하면 됩니다. 유튜브가 다 결론까지 알아서 내줍니다. 하지만 단점이 있습니다. 볼 땐 재미있는데 다 보고 나면 기억에 남는 건 거의 없습니다. 하루에 두 시간이면 십이분의 일을 사용하는데 좀 허망합니다. 그 시간에 책을 봤다면 남는 .. 2021. 8. 13.
우한의 참상이 아닌 우한의 아름다운 일상 : 팡팡 <우한일기> 1월 26일 봉쇄 4일 차 : 후베이성 공무원들의 모습이 바로 중국 공무원들의 평균 수준이다 우한의 공무원들은 사태 초기에 바이러스를 얕보았고, 봉쇄 전후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무능함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고, 이는 우한 시민들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이 일에 대해 앞으로 자세히 쓰도록 하겠다. 하지만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후베이성 공무원들의 이런 모습이 바로 중국 공무원들의 평균 수준이란 사실이다. 이들이 다른 지역의 공무원들보다 무능한 게 아니라 단지 운이 나빴던 것이다. (p.29) 1월 31일 봉쇄 9일 차 : 아첨을 하더라도 제발 정도는 지켜달라 나는 상인들에게 이럴 때 문을 열면 감염될까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덤덤했다. "우리가 여기서 버티고 있어야.. 2021. 8. 11.
사회주의 국가 수도 중 가장 아름다운 도시 평양 : 박원호 <북한의 도시를 미리 가봅니다> 3년 전인 2018년 4월에 재인이 아재와 정은이 엉아가 만났습니다. 악수도 하고 포옹도 했더랬습니다. 도문다리에서는 둘이서 속닥속닥 이야기도 했습니다. 한반도의 봄이 이렇게 불쑥 찾아왔다고 기뻐했습니다. 끊어진 철도와 다리를 다시 놓고, 개성공단은 다시 활기찬 모습으로 변할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곧 정은이 엉아가 서울에 올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잠깐의 봄을 뒤로 하고 남과 북 사이는 다시 냉랭해졌습니다. 뭐가 맘에 안들었는지 삐져서는 서로 말도 안합니다. 너무 아쉽습니다. 미국 말을 잘 들어야 하는 남쪽과 미국 말은 무조건 안들어야 하는 북쪽의 정치적 입장이야 그렇다쳐도 서로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철도와 도로 사업, 관광단지와 공업단지 조성 같은 것은 얼마든지 할.. 2021. 8. 8.
선생님 부모님 말씀은 언제나 옳을까? : 이유선 조원희 <행복이 정말 인생의 목표일까?> 1. 물건을 살 때 자유를 느낀다고? 바우만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를 소비자 사회라고 봐요. 사람들이 자유롭게 할 수 있고, 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소비'라는 것이에요. 사람들은 오늘날 상품을 사는 데서 자유를 느끼고, 자신의 자유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거죠. 그것이 왜 자유로 느껴지냐면 세상에는 그 상품을 살 수 없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에요. 누군가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다는 데서 소비자는 그것을 자유로운 행위라고 여긴다는 거죠. 자유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렇듯 '차이'에서 비롯된 행위라는 거예요. (p.42) 2. 공부 안하면 저렇게 된다고? 마르크스는 노동을 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된 이유를 노동하는 사람이 그 결과물을 제대로 가져가지 못하고, 노동을 통해서 무엇이 만들어지고 .. 2021. 8. 6.
극한 직업인 대안 학교 교사들의 앞담화 : 류주옥 외 5인 <선생님들의 수다> 간디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들은 자기 학교를 무척 좋아합니다. 학교 이야기를 주저리 하지는 않지만, 딱 봐도 보입니다. 근데 저도 우리 아이들만큼이나 간디학교를 좋아합니다. 학교 선생님도 좋구요, 아이들의 친구들도 좋고, 돌집과 도서관 사이의 오솔길도 좋아합니다. 큰 아이가 졸업을 하고, 둘째도 고3이라 이제 학교와 인연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간디 학부모 생활을 더 연장하기 위해 중3인 막내를 열심히 꼬시고 있습니다. 거의 넘어왔습니다ㅋㅋ. 사실 요즘 학교와 관련된 여러가지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학교 공간혁신 촉진자로 학생들과 함께 새 건물을 짓고, 낡은 건물을 리모델링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바라는 환경과 공간을 만드는 거죠. 좋아하는 학교를 변화시키는 거라 꽤 부담감이 들긴 하지만 즐겁게 하고 있.. 2021. 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