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노무현을 만나는 충실하고 세심한 안내서
이 책은 봉하마을에 있는 '노무현대통령의집'에 관한 해설서입니다. 2018년 대통령의 집이 시민들에게 문을 열고, 이 집에 대해 시민들에게 안내하고 있지만, 집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다 들려드리기에는 부족하여 이 책을 발간했다고 서문에 나옵니다. 특히 뜻이 있어도 오지 못하는 분들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책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고향인 봉하마을로 내려오게 된 계기, 설계자인 정기용 선생과 함께 집을 설계하면서 요구한 것들, 정기용 선생의 초기 스케치, 퇴임 후 이 집에 거주하면서 했던 다양한 활동, 집의 세부 공간에 표현된 건축적 의도에 대한 설명,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기억과 사연 등이 담겨 있습니다.
대통령은 퇴임 후 고향에서 편한 여생을 보내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사저를 베이스캠프 삼아 봉하마을과 주변자연을 새롭게 살려내 재임 시 밀린 숙제 같은 농촌의 균형 발전이 어떻게 가능한지 현장에서 몸 바쳐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제안했다. 농촌에서 일하며 지내시려면 수시로 농촌의 기후와 접해야 하고, 그러려면 옛날 농촌집의 배치처럼 채를 나누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그렇게 해서 중정을 중심으로 경호동과 사무동, 사랑채와 안채 이렇게 네 동으로 집을 배열했다. (정기용, <정기용 건축작품집(2011)>, 104쪽)
봉하마을 주택 계획
주인이 요청하는 집 :
- 느리게 살고, 적게 쓰고,
- 부끄럼 타는집
땅이 요청하는 집 :
- 마을과의 관계
- 봉화산과의 관계, 앞산/앞뜰과의 관계
- 경사면과의 조화
시대가 요청하는 집 :
- 자연 친화적인 집 / 에너지, 재료, 이미지
- 새로운 농촌 / Eco Museum을 위한 Base Camp
건축가가 제안하는 집 :
- Double Court House / 두 개의 기능, 두개의 영역 (공적 영역, 사적 영역), 그러나 통합된 건축
- 집에서 기념관으로 / 변화에 대처하는 집
- 다채로운 이벤트가 가능한 마당들, 옥외공간
- 감나무 과수와 교감하는 집
느리게 살고, 적게 쓰고, 부끄럼 타는 집
책에 나오는 정기용 선생의 스케치에 나온 '지붕 낮은 집'의 컨셉입니다. 주인이 요청하는 집이 재미있습니다. 느리게 살고, 적게 쓰는 건 이해가 가는데, 부끄럼 타는 집이라니요. 책에 이에 대한 해설이 나옵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성정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에 정기용 선생은 '불편한 흙집'을 제안했습니다. 대단한 건축주와 설계자입니다. 책에서도 두 분이 합이 잘 맞았다고 나오는데, 정말로 그랬을 것 같습니다. 신이 나서 작업에 몰두한 정기용 선생이 그려집니다.
저 컨셉들은 그대로 구현되었습니다. 건축가가 제안하는 집에 나오는 '집에서 기념관으로'는 이 집에 언젠가는 시민의 품으로 돌아갈 것을 염두에 두고 설계하였다는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빨리 실현되었습니다.
자연과 어우러지는 지붕 낮은 집
느리게 살고 적게 쓰는 삶에 적합한 집, 자연과 어우러지는 지붕 낮은 집, 언젠가는 시민에게 돌려줘야 할 집,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집. 원하는 집의 조건이라면 조건이었다. 정기용 선생은 여기에 더해 '불편한 흙집'을 제안했다. 되도록 자주 자연을 바라보고, 공기 내음을 맡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것이 농촌생활의 뜻에도 맞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바라던 바였다. 우리 조상들이 안채와 사랑채를 나누어 살았듯,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할 때 신을 신고 밖으로 나와야 하는 채 나눔 구조는 그렇게 탄생했다. (68쪽)
홀로 도드라지지 않는 부끄럼 타는 집
한옥 양식을 차용했지만 지붕은 낮고 평평하게 했다. 산등성이로 흐름이 집 안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하자는 생각이었다. 주변 환경에 역행하지 않고 주어진 조건을 최대한 살리려 애를 썼다. 경사진 터에 집을 짓자니 땅을 파내거나 돋워야 했다. 높게는 짓지 말자고 정해뒀다. 지하 공간을 활용하게 된 건 그래서다. 홀로 도드라지지 않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부끄럼 타는 집'이면 좋겠다. (68쪽)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 수 있는 집
집이건 사람이건 조화로워야 한다. 아름다운 마을을 가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이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서로 어울려 살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 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이 공존하는 생태계를 다시 불러와보자. 아이들이 소풍 와서 풀밭에 자리 펴고 도시락 먹고 놀 수 있는 친근한 동산, 어린 시절 봤던 방아깨비와 물방개, 맹근쟁이가 돌아온 숲과 늪, 그리고 들, 사람 냄새 나는 마을, 새로 지어질 집은 그 풍경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될 것이다. (68쪽)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조경
너무 화려하지 않고 전혀 사치스럽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촌스럽지 않은 선을 찾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백제나 신라, 조선의 미술품을 보면 화려한 맛이 있잖아요. 그런데 사치스럽진 않죠. 예를 들어 백제 항아리 같은 걸 보면 절대로 누추하지 않아요. 농이나 소반 같은 걸 봐도 중국처럼 요란하지도, 일본처럼 완벽하지도 않아요. 그냥 대충 만든 것 같은데 멋이 넘치죠. 그 경계를 잘 지키는 것이 한국건축과 조경의 요체, 핵심이에요. (조경가 정영선 선생의 인터뷰 중에서, 215쪽)
'대통령의집'이 정기용 선생의 작품이라는 건 잘 알려져 있지만, 조경을 담당한 정영선 선생은 이에 비해 덜 알려져 있습니다. 집 뒤의 꽃계단인 화계도 선생의 솜씨이고, 곳곳에 있는 마당도 모두 선생의 작품입니다. 선생은 이 집이 노무현 대통령과 권양숙 여사의 집임에도 두 분의 개인적인 공간이 부족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이를 마당으로 풀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집의 공간이 다 담아내지 못한 기능들을 보완하고, 그렇다고 화려하고 요란하지도 않으며, 차분하고 소박한, 그러나 미적으로 매우 아름답고 멋이 넘치는 야외 공간을 만들어냈습니다. 지붕 낮은 집은 이렇게 완성되었습니다.
사저가 완공되었을 때, 질 나쁜 사람들과 언론이 '아방궁' 운운 하며 비방을 참 많이 했습니다. 당시에 참 분통이 터져, 절대 그렇지 않다고, 너희들이 정기용 선생을 아느냐고, 그렇게 외쳐댔습니다. 그러면서 이 집에 대해 여러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면서 공부도 했더랬습니다. 아방궁 운운한 자들은 아직도 잘 살고 있다. 이 생각을 하니 지금도 급 빡침이 올라온다.
며칠 전 헌쇠도서관에 갔다가 이 책을 발견했습니다. 대통령 사저에 관한 책이 있을 법도 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만나니 무척 기뻤습니다. 책장을 들추니 유홍준 선생이 '지붕 낮은 집'의 터를 찾기 시작하는 대목이 나왔습니다. 벌써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읽다가 급기야 책을 들고 집으로 왔습니다.
정기용 선생이 남긴 스케치도 인상적이었고, 정영선 선생이 설명하는 집의 조경도 무릎을 탁 칠 정도로 좋았습니다. 책 뒷부분에 나오는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도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장인의 산소는 안가면서 노대통령의 산소는 그리 자주 가노? 라는 아내의 핀잔을 들을 정도로 묘역에는 자주 갔더랬습니다. 심란할 때 묘역 주위를 휘휘 한바퀴 돌고 오면 좀 차분해지곤 했습니다. 건축은 무엇보다 경험해야 하는 것이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통령의집'은 아직 가보지 못했습니다. 여러 핑계가 있었습니다.
이제 책도 읽었으니 준비 완료입니다. 봄 날이 다 가기 전에 다녀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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