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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사회적 아픔 너머 희망의 다크 투어리즘 : 김명식 <공간, 시대를 기억하다>

by 개락당 대표 2025. 4. 21.

 

김명식 작가의 전작 <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책 제목처럼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려는 건축물들이 책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유럽 건축 여행, 특히 베를린에서는 이 책이 답사의 길잡이가 되어주었습니다. 4년 전쯤 동네 책방 '생의 한가운데'의 주인장에게 부탁하여 작가를 모시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가졌더랬습니다.

 

그리고 이번 책 <공간, 시대를 기억하다>는 전작과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제가 <사회적 아픔 너머 희망의 다크 투어리즘>입니다. 다크 투어리즘은 '흑역사 탐방'쯤으로 직역할 수 있으나, 아픈 기억을 품고 있는 공간에서 희망을 읽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우리가 손쉽게 다가갈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일상적인 공간으로 바꾸어 보려고 하는 작가의 바램도 담겨 있습니다. 

 

책은 2022년에 나왔습니다. 꽤 시간이 지났는데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도서관의 건축책들을 기웃거리다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서 절반쯤 읽어버리고, 책을 사서 다시 느긋하게 읽었습니다. 책에 나온 인상적인 건축물을 소개합니다. 

 

 

1. 4.3의 기억 - 비설 : 제주 4.3 평화공원

 

독일 베를린의 신위병소 피에타와 비견될만 한 한국의 피에타. 사진 출처 : https://www.gunchinews.com/news/userArticlePhoto.html

 

예술이 아름다움만을 고집한다면 그것을 이러한 보통의 사람이 맞게 되는 참혹한 죽음과 그의 삶에 대한 위선이지요. '비설'은 '바람에 흩날리며 내리는 눈' 또는 '쌓여 있다가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눈'을 뜻합니다. 비극의 순간을 그대로 묘사한 4.3의 피에타는 여러 해 지속된 4.3사건을 관통하며 제주의 비극을 동결해 놓았습니다. (26쪽)

 

** 저자는 이 작품을 설명하며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케테 콜비츠의 그림 '죽은 아이를 안은 여인', 베를린 신위병소에 있는 하랄트 하게의 피에타, 그리고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성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미완의 론다니니 피에타를 들었습니다. 성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는 미켈란젤로가 20살 때, 론다니니 피에타는 말년의 작품으로 죽기 전까지 만들었습니다. 성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는 직접 가서 보았으나 관객과 작품이 너무 멀어 겨우 형태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신위병소 피에타는 직접 들어가서 가까이서, 멀리, 그리고 만져봐도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글 말미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2. 4.16의 기억 - 4.16생명안전공원 : 안산시 단원구 화랑유원지 

 

사진 출처 : 4.16재단 https://416foundation.org

 

사진 출처 : https://www.hani.co.kr/arti/area/capital/1008896.html

 

광화문 광장에 설치되었던 세월호 기억공간은 2021년 8월 5일 완전히 철거되었습니다. 다행히 같은 해 11월 서울시의회 옆 임시 공간에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또 '4.16생명안전공원'은 안산시 단원구 초지동 화랑유원지 내 남측 미조성 부지에 디자인 공모를 통해 건립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근 주민이 혐오시설이라며 건립을 반대해 난항을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조성 공사가 재개되었습니다. (62쪽)

 

**책에서 2024년 완공 예정이라 나와 있어서 좀 찾아보니 여러 사정으로 2025년 2월에서야 착공이 되었습니다. 참 더디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한발짝씩 나아가고 있어 다행입니다. 이름은 좀 바꿔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 전태일기념과 : 서울 종로구

 

전태일이 근로감독관에게 보낸 진정서의 글을 조형으로 만들어 장식한 기념관의 입면. 그야말로 전태일의 상징이다. 사진 출처 : 전태일기념관 https://www.taeil.org/guide/viewing

 

본래 기억은 기억해야 할 것에 대한 징표입니다. 이것을 복기하면 그 기억에 근접할 수 있습니다.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것, 신성하고 종교적인 것, 일상적 삶 속의 현실적인 것, 한 세대나 시대의 문화와 사고방식의 체계를 보여주는 전통적이거나 통념적인 것, 혹은 민주주의 이전 권력의 상징이거나 권위주의적인 것들을 건축은 기록합니다. (106쪽)

 

** 어? 서울에 저게 있었다고? 하고 보니 2019년에 리모델링 되었다고 합니다. 저런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면 당장 달려가보고 싶습니다. 기억을 담고자 하는 노력을 꾸준히 하고 있고, 그 결과로 저런 건축물들이 계속 생겨난다는 것을 참으로 바람직한 일입니다. 

 

 

4. 추모시설의 새로운 시각 언어 - 일상의 추념 : 서울 서초구 매헌시민의 숲

 

사진 출처 : https://a-platform.co.kr/architect/home/projects/index2.php?boardid=project&mode=view&idx=2969&category=tdws

 

재난의 일반적인 기억과 염원을 정적인 사각의 공간과 정갈히 다듬어 세운 백석에 담아 상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일상의 추념'은, 다행히 20세기를 마감하는 주변의 추모시설들과 다른 조형성을 띠면서 숙연한 공간감을 자아냅니다. 그것은 21세기 추모를 위한 '신문물', 곧 새로운 기념물과 공간의 제안으로 받아들여도 좋은 듯합니다. 이런 점이 이곳을 일상 속에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장소로 만듭니다. 그렇기에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흥미로운, 국내 몇 안 되는 공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127쪽)

 

** 이 작품을 설명하면서 저자는 유대인박물관에 있는 '추방의 정원'이 떠올랐다고 했습니다. 저도 책에 나와 있는 이 작품을 보자마자 바로 그 생각이 났습니다. 지난 6년간 한번도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았던 기억이 저 사진으로 인해 나타났습니다. 기억이란 놈은 참 신기합니다. 여기도 나중에 소개하겠습니다. 

 

 

5. 도시재생의 빛과 그림자 - 공중보행로, 서울로7017 : 서울시 서울역 일대

 

사진 출처 : http://societyofarchitecture.com/project/yoonsulmanridong-reflects-seoul/ 하

 

하이라인에 영감을 받아 제안된 '서울 수목원'이 당선되어, 결국 서울로7017은 선형의 긴 공원의 계보를 충실히 이은 공간이 되었습니다. 보존이라는 결정이 어디서 왔고 그것은 긍정적인 것인가 하는 의문은 쉬 풀리지 않습니다. 어찌 오래된 것이라고 다 아름답기만 할까요. 복원을 말할 것도 없고 보존을 위한 재생은 거기에 담긴 역사와 가치를 세공하던 작업이 아니던가요. (153쪽)

 

** 책은 이 작품의 혹평 일색이었습니다. 보행로 아래에 서 계시는 왈우 강우규 선생의 사세시를 빌어 시를 만들 정도로 아쉬웠나봅니다.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네요. 왈우 선생의 사세시와 저저의 시를 함께 소개합니다.

 

왈우 선생의 사세시辭世詩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작가의 시

서울로7017에 올라서니

오히려 매연 바람이 분다

육체는 있으나 시대의 정신은 없으니

어찌 후환이 없을까

 

 

6. 시월의 문샤인 - 윤슬 : 서울시 중구 만리동

 

사진 출처 : http://societyofarchitecture.com/project/yoonsulmanridong-reflects-seoul/

 

2800개에 달하는 육면체의 내림 층계가 만들어낸 둥근 공간, 그 위를 가로지르는 스테인리스스틸 루버가 지면 아래와 위를 아른거리듯 빛을 산란합니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가면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을 뜻하는 '윤슬'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체험하게 됩니다. 산란된 빛이 만들어내는 잔물결이 아름답습니다. 빛의 결이 가득 담긴 웅덩이는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도심에서 조용히 침잠하는 공간으로 바뀌고, 시간은 이제 내 것이 됩니다. 우물물에 이는 잔물결처럼 빛으로 충만한 공간은 수면 위 물결의 공간이 되고, 이내 아늑히 옛날의 공간으로 시간을 되돌립니다. 덩굴내가 흐르고 그 위로 달이 떠오를 것만 같습니다. 앞에서 잠깐 얘기했듯, 이 빛의 우물은 역설적이게도 엄청난 예산과 노력을 투입한 서울로7017의 기다란 공중길을 압도합니다. (170쪽)

 

윤슬, 서울을 비추는 만리동. 사진 출처 : http://societyofarchitecture.com/project/yoonsulmanridong-reflects-seoul/

 

시월의 윤슬은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순박하기만 했던 청춘이 하지 못한 일은, 청춘이 지나고서도 하지 못했으니, 한숨을 부르는 시린 인생의 순간과 맞닥뜨리게까지 합니다. (174쪽)

 

** 몇 년 전에 윤슬을 만드는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건축가의 상상력에 놀랐습니다. 대개의 건축가들은 오리지널의 모방과 각색에서 디자인을 출발합니다. 거기다가 자신의 창작을 가미하는 것이지요. 그 오리지널을 만드는 사람은 천재이자 거장입니다. 윤슬을 만든 건축가들은 그 오리지널을 창조한 것입니다. 낮과 밤, 빛의 이동에 따른 변화 등을 모두 경험하고 싶습니다. 가면 오래 머물겁니다.  

 

 

7. 서소문 밖 행형지의 변신 - 서소문역사공원과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

 

사진 출처 : https://biz.heraldcorp.com/article/2749310

 

예수를 노숙인으로 만나기는 처음입니다. 낯설기도 하고 불경스럽기도 합니다. 이 '노숙인 예수 Homeless Jesus'는 어느 성당 앞에 설치되어 신성모독의 논란까지 일으킨 캐나다 조각가 티모시 슈발츠의 조각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 인근에서 얼어 죽은 노숙인을 기리기 위해 그의 작품을 직접 축복하고 교황청에 설치하였지요. 이어 여러 나라에 설치되어 현재 우리에게까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 모든 노숙인은 예수가 될 것만 같습니다. (185쪽)

 

사진 출처 : https://biz.heraldcorp.com/article/2749310

 

돌아서면 하늘이 닿는 하늘광장이 있습니다. 하늘광장을 둘러싼 전시 공간인 하늘길도 근사합니다만, 그 어떤 미사여구의 도움을 받더라도 형상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표현해 내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늘광장이 그렇습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의 가장 본질의 공간, 그 정수를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하늘광장이라고 이름하여 신의 공간처럼 신비스러운 공간일 것 같지만, 실은 땅의 공간, 땅 위를 살아간 사람의 공간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순교한 이들을 기리는 공간이지요. (196쪽)

 

** 하늘광장에 간 적이 있습니다. 오래되어 전체적인 기억은 흐릿하지만, 위의 사진에서 저 낮은 천정의 공간에서 탁 트인 곳에 나왔을 때의 해방감은 아직 기억합니다. 저 넓은 공간을 저자는 '형상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이라 했는데, 매우 공감합니다. 형상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은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8. 건축의 공간과 공간 공동체 - 경주타워 : 경북 경주시 보문관광단지

 

사진 출처 : https://kr.trip.com/moments/detail/gyeongju-431-11707897/

 

황룡사 9층 목탑을 부활시킨 경주타워를 통해서, 여러 단계를 건너뛰고 조금은 과도하게 해석해서 말해보자면 이렇습니다. 서로 전경과 후경이 되어주는, 건축의 내용물인 '공간'과 이를 둘러싼 '배경'을 역전시켜 후경을 중요성을 강조하는 한편, 공간 공동체의 인식과 이에 대한 인식을 필요로 하는 삶의 세계로 확장하여 생각하도록 만든 것 같다는 얘기입니다. 그 어느 시대보다 이러한 의식을 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서로에게, 대지에게, 지구에게, 후경이 되어주는 공간 공동체의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233쪽)

 

류동룡 선생의 경주타워 원안. 사진 출처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698264

 

유동룡 선생은 설계디자인을 통해, 완성된 건물이 전망대로서 주변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주변에서 바라볼 때 음각된 빈 공간을 통해 신라 건축문화의 상징이 느껴지도록 하는 등 현대건축을 통하여 지금은 사라진 신라 불탑을 환원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경주타워 현판 이타미 준에 관한 설명 중에서, 221쪽)

 

** 이 디자인의 모티브가 유동룡 선생에게서 나왔다고 하니 참 반가웠습니다. 유동룡 선생은 제일한국인 건축가로 이타미 준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주로 일본에서 활동하셨고, 우리나라에도 좋은 건축물을 많이 남겼습니다. 저자는 경주타워를 '전경과 후경의 반전'이라는 주제로 설명을 하였는데, 멋진 해석입니다. 저자는 델프크 공대와 밀라노 공대에서 건축을 전공한 건축 전문가입니다. 그런데 글을 읽다보니 그 보다 더 나은 작가인 것 같습니다. 

 

 

9. 봄 길 저편의 기억 - 목성 : 강원도 영월 젊은달와이파크

 

사진 출처 : https://klood.tistory.com/entry/travel-jeju-yeongwol-ypark

 

사진 출처 : https://klood.tistory.com/entry/travel-jeju-yeongwol-ypark

 

얼키설키 엮어놓은 나무토막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빛은 내부 공간을 더욱 투박하게 만들면서 원석 같은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산란하여 몸에 부딪치는 빛의 공간은 태곳적 공간을 연상하게 만들면서 원시적 은신처의 공간감을 드러냅니다. (250쪽)

 

** 책에 나온 목성의 사진을 보자마자 페터 줌토어의 '브루더 클라우스 예배당'이 떠올랐습니다. 천정의 오쿨루스(원형 천창), 브루탈리즘의 재료 그대로의 거침, 하늘과 소통하는 형상 등의 닮았습니다. 건축가는 이 목성을 설계할 때 브루더 클라우스 예배당을 염두해 두었을까요? 저자도 이 건축물을 설명하면서 줌토어의 작품을 언급했습니다. 줌토어의 작품은 아래에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이런 놀라운 건축물이 시골? 영월에 있습니다. 좀 가까이 있음 당장에 달려가볼텐데요. 건축가의 대담함과 창작성이 돋보입니다. 브루더 클라우스 예배당은 유럽 건축 여행 중에서 만난 가장 놀라운 건축물 세 손가락에 꼽을 수 있습니다. 거기서 느꼈던 감동을 이 목성에서 다시 한번 느끼고 싶습니다.  

 

 

10. 기억의 재건축 - 둔촌주공 : 서울시 강동구 둔촌동

 

재건축 되기 전의 둔촌주공. 사진 출처 : 나무위키

 

대지면적 46만 2771제곱미터에 달하는 둔촌1동에 대한 재건축은, 한국에서 유래가 없는 최대 규모의 사업으로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공사 전에는 입주민의 이주 문제로 인한 행정적 비용과 이주 비용이 발생했고, 공사 중에는 인근 주민이 견뎌야 하는 분진과 소음, 공사 차량의 통행으로 인한 교통 혼잡, 그리고 공사 후에는 분양에 따른 복잡한 과정, 대규모 입주에 따른 인구 이동, 상승한 집값에 따른 저소득층 원주민의 재입주 불가 등의 문제가 이어졌습니다. 금전적, 환경적, 행정적으로, 두루 많은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 하는 문제들입니다. 주거의 발전과 질 향상을 위해 당사자와 주변 이웃이 감내해야 하는 고충치고는 기간과 규모 면에서 작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294쪽)

 

재건축 후의 둔촌주공. 올림픽파크포레온이라는 요상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

 

금전이 추동하는 개발은 언제나 거주의 가치를 희생시켜 낭만과 추억과 삶을 교수대에 매답니다. 무엇이든 물질과 자본으로 귀결되는 시대 탓에 인간적인 것들에 대한 예우는 실종된 지 오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기억이 일시에 소거되지 않는 거주 공간의 재건축 방식을 고민해보고 또 고민해봅니다. 이런 고민은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습니다. (300쪽)

 

** 둔촌주공은 1980년에 완공된 5,930세대의 아파트였습니다. 이걸 82개동 12,032세대로 재건축하였습니다. 저자는 재건축으로 인해 그 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한꺼번에 소멸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재건축 방법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리고 잘게 나누자는 대안도 제시합니다. 작가의 진심 어린 고민이 참 고맙습니다. 기억을 비롯한 인간적인 것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 받는 날이 오면 재건축의 방식도 자연스럽게 바뀔 것입니다. 

 

 

 

 

책에 다른 나라에 있는 건축물도 설명하고 있는데, 제가 가본 곳들이 많아 무척 반가웠습니다. 저자의 책을 길잡이로 하였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 중 몇 곳을 사진과 함께 소개합니다. 

 

 

# 분서도서관

 

1935년 히틀러 시대에 괴벨스의 주도로 수만 권의 책을 태워버렸습니다. 명목은 '비독일인의 정신을 정화시킨다'고 했지만, 실은 양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불태운 것이지요. 이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1995년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앞 바벨 광장에 '분서도서관'을 만들었습니다. 가로세로 1.1미터 길이의 유리 아래에 텅빈 책장을 넣었습니다. 실제로 가서 보면 "헐, 이렇게 작다고?" 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소박합니다. 저자는 히틀러 정권의 독일의 추악함을 바벨 광장에 묻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후에 하인리히 하이네의 글을 청동판에 새겨 넣었습니다. 실제 글 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 문구는 아래와 같습니다. 

 

책을 불태우는 자가 마지막엔 사람까지 불태울 것이다.

 

 

 

 

 

 

 

# 신위병소(노이에 바헤)

 

노이에 바헤는 기억의 장소이며

전쟁과 폭정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장소입니다.

우리는 전쟁으로 고통받은 민족들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박해 받고 목숨을 잃은 시민들을 기업합니다.

우리는 양심을 저버리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한 모든 사람을 추모합니다. 

 

베를린 신위병소는 1993년 '전쟁과 폭정의 희생자를 기리는 추모관'으로 개관했습니다. 육중한 기둥이 돋보이는 신고전주의 건축물 안으로 들어가면 둥근 천창 아래에 케테 콜비츠의 조각상 '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뻥 뚫린 천정은 조각을 비추는 하이라이트 같으면서도, 비와 눈, 추위 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 같습니다. 

 

꽤 오래 여기에 머물면서 빛이 옮겨가면서 다르게 표현되는 조각상을 보았습니다. 여기에 오는 많은 참배객을 보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공간을 느꼈습니다. 혹시나 조각상이 말을 걸어올까 하는 기대감도 가졌습니다. 

 

여러나라의 언어로 된 노이헤 바헤의 설명이 있었습니다. 한국어는 없어서 아쉬움에 일본어 설명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자료를 찾아보니 2023년에 한국어 안내문이 아홉번째로 추가되었다고 나옵니다. 참 반가웠습니다. 위에 한국어 안내문 일부를 옮겼습니다.

 

 

 

 

 

 

 

 

 

 

 

 

 

 

 

 

# 유럽의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

 

베를린의 심장부에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담은 거대한 추모공원이 있습니다. 거대한 터에 2711개의 사각 기둥을 빽빽하게 세워놓았습니다. 기둥 사이로 들어가면 땅은 꺼지고 하늘은 까마득해집니다. 여기서 아이들은 숨박꼭질을 하고 있습니다. 나도 조금 놀았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기억의 건축물은 그 위치도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특히나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 땐 쟁점과 논란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위치가 바뀐 두 개의 건축물을 예로 들었는데, 우리나라의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원래는 서대문독립공원 안에 세워질 예정이었으나 성산동의 주택가로 밀려났고, 반대로 이 공원은 도심 안쪽으로 이동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나는 이런 걸 기념하는 조형물이야' 라고 스스로 드러내기보다는 '어? 여기는 뭐하는 곳이지? 뭘 기념하려고 만든 거지?' 라는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조형이나 공간이 훨씬 매력적입니다. 여기가 그 증거입니다.  

 

 

 

 

 

 

 

 

 

 

 

 

 

 

 

# 베를린 유대인박물관 '추방의 정원'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가 고풍스런 옛 박물관 옆에 지그재그 모양으로 유대인의 상징인 다윗의 별을 왜곡한 형태의 건물을 만들었습니다. 독특한 형태와 거대한 규모로 유명한 유대인박물관입니다. 그야말로 철저한 반성이자 기억하려는 최대의 노력입니다. 여길 보면서 도쿄의 도심 한가운데에 '전쟁으로 희생된 조선인을 추모하는 기념관'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추방의 정원'은 유대인박물관 한쪽 정원에 위치해 있습니다. 49개의 육중한 콘크리트 기둥 위에 올리브 나무를 심어 유배되고 추방된 유대 민족을 상징했습니다. 

 

 

 

 

 

 

 

 

 

 

 

# 브루더 클라우스 예배당

 

페터 춤토어의 이 걸작은 독일 서부 바헨도르프라는 작은 마을에 있습니다. 드넓게 펼쳐진 들판 한 가운데 있는 이 건물은 태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우뚝 서 있습니다. 그러나 춤토어의 모든 건축이 그러하듯 자연스럽습니다. 간결하고 단순하며 지엄합니다. 

 

높이 12미터의 오각 기둥 모양이며, 흙이 많이 들어간, 옛날 콘크리트를 층층히 붓고, 타설 후 내부의 거푸집을 모두 태워버려 그 거친 질감을 그대로 표현하여 영적인 공간을 더욱 부각시켰습니다. 육중한 삼각형 문, 그 문으로 들어오는 빛, 물방울 모양의 오쿨루스, 초와 조각상 등이 어우러져 무어라 말을 할 수 없는 신비롭고 경이로운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유럽 건축 여행에서 본 여러 건축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축물 중의 하나입니다. 사진이나 동영상으로는 결코 느낄 수 없습니다. 직접 몸으로 체험해야 알 수 있는 공간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건축물은 반드시 경험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기억하지 않으면 더 이상 역사가 아닙니다. 저자는 기억을 붙잡으려 애쓰는 건축물, 특히나 아픈 기억을 기록하는 건축물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이런 건축물은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런 건축물들은 아무 것도 아닌 공간을 강력한 회상의 장소로 탈바꿈시키기 때문입니다.

 

김명식 작가의 이번 책은 전작보다 많이 말랑말랑해졌습니다. 전작이 '아픈 기억'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번에는 '아픈 기억을 보는 따뜻한 시선'에 촛점을 맞춘 것 같습니다. 작가는 기억의 공간에서 더 나은 시대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본다고 했습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다음 책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