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이 숨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긴장한 얼굴로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고 외치던 그 분. 그 분은 일약 대한민국의 스타가 되었고 국민들의 찬사가 더해졌다. 그 분이 행했던 과거의 미담들이 회자되었고, 그 중에 헌법재판관 인사청문회의 발언이 화재가 되었다.
저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독지가 김장하 선생을 만나 대학교 4학년까지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학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사법시험에도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인사하러 간 자리에서 '내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이 사회의 것을 너에게 주었으니 갚으려거든 내가 아니라 이 사회에 갚아라'고 하신 말씀을 저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 분은 김장하 선생의 가르침대로 우리 사회에 진 빚을 갚는 것, 평균의 삶을 벗어나지 않는 것을 삶의 신조로 삼았다. 그렇게 김장하 선생은 수면 위로 드러났고, 나는 책장에 꽂혀있던 이 책을 다시 꺼냈다.
진정한 나눔은 댓가를 바라지 않는다.
그분 '문형배' 헌법재판관은 그가 밝혔듯 김장하 장학금의 수혜자다. 본인이 밝혀서 우리는 알 수 있었다. 바꿔 말하면 밝히지 않으면 우리는 알 수 없다. 책에 김장하 장학금의 특징이 나와 있다.
1. 장학금 수여식 또는 전달식을 하지 않는다. 사진도 물론 없다.
2. 성적보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우선 선발한다.
3. 가급적 1회성이 아니라 졸업할 때까지 전액 지원한다.
4. 등록금뿐 아니라 생활비 등 각종 경비까지 지원한다.
5. 드물게 재수생에게 입시학원비와 하숙비를 지원한다.
6. 갈 곳이 없는 아이에겐 집도 내어준다.
7. 장학금의 기록을 남기지 않고 누가 물어봐도 안 가르쳐 준다. (117쪽)
여기에 더 중요한 특징 하나가 더 붙는다. 바로 장학금을 받은 이들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장하 어른의 한약방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고 한 장학생이 찾아와서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선생님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되어서 죄송합니다.
김장하 어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책에 스님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추운 날 스님이 길을 가다 추위에 떠는 거지를 만났는데, 가만히 두면 얼어죽을 것 같아 외투를 벗어 주었다. 거지는 당연한 듯 옷을 받았고 가려 했다. 스님은 기분이 좀 어짢아져서 "고맙다는 말을 하셔야죠."라고 했더니, 거지가 "줬으면 그만이지, 뭘 칭찬을 돌려받겠다는 것이오?"라고 되묻더라는 이야기다.
김장하 어른은 2009년 형평운동기념사에서 이 이야기를 했다. 스님 이야기와 졸업생의 에피소드에도 알 수 있듯 김장하 어른의 나눔의 방식은 반대급부를 바라지 않는다. 이것이 김장하 어른의 나눔 철학이다. 장학금을 받고서 특별한 인물이 못되어 죄송하다는 분과 평범한 사람이 우리 사회를 지탱한다고 하신 어르신 모두 우러러 보였다. 이 부분에서 울컥 했다.
이 책은 어른 김장하 선생의 취재기다. 저자는 오래전부터 선생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선생이 취재를 완강히 거부하셔서 자료만 모아두었다. 그러다 채현국 선생을 포함한 '시대의 어른' 다섯 분에 대한 기사를 썼는데, 이것이 대중에게 김장하 선생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취재기이긴 한데 좀 독특하다. 정작 김장하 선생의 인터뷰는 거의 없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들은 이야기와 기사 등을 일일이 찾아가며 썼다. 파도 파도 끝없이 미담만 나온다. 이거 어쩔거냐. 심지어 짐작은 가나 확인할 수 없는 미담들도 많다. 그런 사실에 대해 어른께 여쭈어보면 "기억이 안난다."로 끝난다. 김장하 선생은 끝내 자신의 선행을 드러내기 거부했다.
선생은 교육뿐 아니라 지역 문화, 역사, 예술, 여성 등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정치 빼고는 온 사방에 영향을 끼쳤다. 2022년 약방을 정리하고 장학재단도 해산하면서 남은 재산 몇십 억을 경상대학교에 기부했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도 선생의 정신은 명징했다. 단 한 사람이 지역에 이만큼 큰 역할을 하신 분이 또 계실까. 돈 많은 사람의 자선 활동 이야기가 아닌,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어른의 본보기였다. 진주는 복받았다.
고마운 책이다. '나쁜 사람들을 비판하고 단죄하는 것도 중요한 언론의 기능이지만, 좋은 분들을 널리 알리는 것 또한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데 유용한 방법'이라고 말하며 이를 실천한 저자가 고맙다. 그래서 이 사회가 아직 살아있다고, 살 만하다고 책은 외쳤다. 김장하 선생이 뿌린 씨앗은 선생을 닮은 '문형배' 헌법재판관을 비롯하여 세상에 퍼져 또 다른 김장하 선생을 만들고 있다.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포스터에 이렇게 적혀있다. "당신을 만나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졌습니다." 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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