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용석이의 어머니는 10년 전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급하게 병원으로 옮겼으나 몸은 움직일 수 없게 되었고, 의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는 그나마 부여잡고 있던 의식도 끊어졌고 음식도 관을 통해서 넣는, 말하자면 기본적인 생체 기능만을 유지하고 있다. 서울에 있는 용석이는 그런 어머니를 뵈러 한 달에 한 두번은 꼭 내려온다.
"이제 엄마 보내드려라. 할 만큼 했다." 어제 함께 저녁을 먹으며 내가 말했다. "어제 엄마한테 갔는데, 컨디션이 좋아서 웃으시는 같더라. 내나 누나나 별 한 것도 없다. 엄마가 얼마나 힘들지 가늠할 수 없지만, 나는 안힘들다." 라며 석이는 웃었다. 당신이 스스로 생명을 내려놓지 않는 한 친구는 의도적으로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결정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나는 잘 안다. 그럼에도 이런 말은 한 건 친구의 안스러운 상황에 대한 나의 에두른 표현이다.
나의 엄마도 기억력을 잃어가고 있다. 수 년 전부터 시작된 치매는 최근 그 속도가 빨라졌다. 밥 하는 법을 까먹은 지는 오래되셨고, 외삼촌을 비롯한 돌아가신 분들의 안부를 묻기도 하시고, 손자와 손녀의 존재감도 희미해지고 있다. 얼마 전엔 집 근처에서 넘어지셔서 크게 다치고 난 후론 외출도 거의 안하신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아들인 나를 못알아보는 날이 올 것이다. 최악의 경우은 인간이 가진 모든 존엄을 잃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전히 엄마로 모시며 찾아뵙고 안부를 물으며 자식의 도리를 할 수 있을까?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이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철갑처럼 단단한 등껍질을 대고 누워 있었다. 머리를 약간 쳐들어보니 볼록하게 솟은 갈색의 배가 보였고 그 배는 다시 활 모양으로 휜 각질의 칸들로 나뉘어 있었다. 이불은 금방이라도 주르륵 미끄러져내릴 듯 둥그런 언덕 같은 배 위에 가까스로 덮여 있었다. 몸뚱이에 비해 형편없이 가느다란 수많은 다리들은 애처롭게 버둥거리며 그의 눈 앞에서 어른거렸다. (7쪽)
가족을 위해 외판원으로 고달픈 생활을 반복하던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자신이 벌레로 변해 있는 걸 발견한다. 그레로그를 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여동생은 그래도 한 동안은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며 오빠를 보살핀다. 그레고르가 일을 하지 못하니 살림이 어려워진 가족들은 모두 일자리를 구한다. 하루는 그레고르가 방에서 나가자 그의 아버지는 흉측한 그레고르에게 사과를 던져 치명상을 입힌다. 어느 날 저녁 동생이 하숙인들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있을 때 음악에 이끌린 그레고르는 거실로 나갔고, 하숙인들은 벌레를 보고 놀라며 하숙을 해약하겠다고 위협을 한다. 가족들은 그레고르에게 등을 돌린다.
"아버지, 엄마!" 여동생이 먼저 입을 열며 식탁을 내리쳤다. "더이상 이렇게 살 순 없어요. 두 분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저는 깨달았어요. 저는 저런 괴물 앞에서 오빠의 이름을 입 밖에 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건 오직 한 가지, 우리가 저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저것을 돌보고 참아내기 위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봤어요. 우리를 조금이라도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111쪽)
동생의 저 말을 들은 그레고르는 힘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와 시름거리다 결국 뻣뻣해진 모습으로 발견된다. 가족들은 한 자리에 모여 그레고르의 시신을 확인한다. 아버지는 '자아, 이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려야겠다.'며 외출을 준비한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가족들은 행복한 기분으로 전차를 타고 소풍을 나간다.
그레고르는 벌레가 된 이후 처음엔 인간다운 사고를 하지만, 가족들이 그를 '쓸모없는 것', 그리고 이를 넘어서 '해로운 것'으로 취급을 하자 점차 벌레 같은 생각을 하며 영혼이 파괴된다. 그의 가족들은 더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갑충으로 변한 것, 그리고 가족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변하자 그를 버리고 단란하게 외출을 한다.
내가 살면서 경험한 실존은 마땅히 그래야 하는 본질에 앞선다. 실존주의를 상징하는 말이다. 가족을 사랑으로 대하고,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보살피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그래야 되는 본질이다. 하지만 가족 중의 한 명이 거추장스럽고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나아가 나에게 해로운 것이 되어 나를 힘들게 하는 존재로 경험하는 것은 실존이다. 그레고르의 가족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에 아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나도 그레고르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은 의도하지 않은 상황에서 순식간에 올 수도 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레고르의 가족들처럼 쓸모 없어진 나를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지성을 가진 사람들은 이런 게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한다. 인간은 본래 그런 존재라고. 믿고 싶지 않으나 우리나라 노인의 빈곤과 자살율, 비단 노인 뿐만 아니라 지금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리 거짓은 아닌 것 같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현대 사회는 많은 사람들은 사회 밖으로 내몰고 있다. 밖으로 내몰린 사람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거나 사람이 아닌 것으로 취급당하기도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계속해서 벌레로 만들어서 밀어내고 있고, 그 벌레들은 쓸쓸히 죽어간다. 쓸모가 없어진 것들은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실존주의는 사람은 본래 그런 존재라고 한다. 실존주의 문학에 나오는 주인공들, 예를 들어 뫼르소나 스트릭랜드는, 그래서 하나 같이 개차반 인생들이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다움을 잃어버리면 남은 건 무엇인가. 우리가 많은 것을 잃더라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이다. 나는 그레고르의 가족을 힘을 다해 비난한다. 그래선 안되었다고.
학교 다닐 때 나는 친구가 많았다. 참 많은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왔다. 엄마는 그런 친구들을 늘 반겼다. 고기를 굽고 밥을 차려서 친구들을 먹였다. 내가 그 시절 친구가 많았던 이유는 순전히 엄마 때문이다. 부모가 되어 산이 들이 강이를 낳고 보니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아이들의 친구들이 올 때마다 최선을 다해 먹였지만 그 시절 엄마에 비하며 발가락 근처에도 못간다. 요즘은 컨디션이 좀 좋아지셔서 저번에 가니 피부도 뽀얗고 말씀도 많이 하셨다. 나를 보고 방긋 웃는 모습이 아기 같았다.
엄마가 보고 싶다. 오늘은 뜨끈한 국밥을 같이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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