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리증후군의 그녀 후지사와
생리는 병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사람이 많다. 생리를 이유로 쉬면, 같은 여자인데도 염치없다는 소리를 듣는다. PMS가 병의 범주 안에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고, 동정이나 걱정도 원치 않는다. 그래도 기분 문제는 절대 아니다. 몸이 도저히 생각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다.
공황장애의 그 야마조에
간혹 고독이 밀려오는 순간이 있다. 얘기하고 싶다. 생각은 그렇지만, 상대가 없다. 나는 이렇게 혼자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앞으로도 내내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 우울했다. 벌써 몇 번이나 경험했지만, 발작은 여전히 무섭다.
생리증후군을 앓고 있는 그녀, 한 달에 한 번 짜증과 분노를 제어하지 못한다. 머리로는 "그래선 안돼."라고 말하지만 정작 입으로는 마음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퍼붓고 만다.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그는 전철이나 버스, 미용실 등 막한 공간을 견뎌내지 못한다. 식당에 가지 못해 혼자 밥을 먹고, 혼자 걷는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공황발작이 두렵다. 이 둘이 같은 회사에 다닌다.
아, 이런 설정이 낯이 익다. 얼마 전 읽었던 한강 작가의 <희랍어 시간>도 그랬다. 청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여자가 희랍어를 가르치고 배웠지. 상처를 가진 두 사람이 서로 소통하고 보듬는 그런 소설. 어둡고 묵직하고 팍팍하고 어려웠다. 이 소설도 남모를 병을 지니고 있는 두 남녀가 만나니 그런 아픈 소설일까 싶었다.
그런데, 이토록 유쾌하고 사랑스러운 소설이라니. 책을 펼치자 엄청난 흡입력으로 빨려들어갔다. 다음 장이 궁금해서 잠깐이라도 책을 놓기가 힘들었다. 일본 소설 특유의, 특별한 사건도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지만, 사람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이 있는 소설이었다. 작가는 무엇보다 주인공 남녀의 관계를 시종일관 유쾌하게 끌고 간다. 오쿠다 히데오에 맞먹을 정도다.
자기와 비슷한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배려하고 성장하는 소설이지만, 서로에게 완벽한 모습을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서로를 돕는다. 그들이 하는 일은 크고 대단한 일이 아니다. 작지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며,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기꺼이 도움을 받는다. 그러면서 서로 배려하고 마음을 나눈다.
소설이 더 유쾌한 까닭은 주인공 뿐만 아니라 책 속에 나오는 모든 등장 인물들이 나름의 개성을 가지고 있고, 잘남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들 유능한 인간이지만, 애써 살펴보지 않으면 그걸 알아차리기 힘들다. 남을 해코지하는 인간은 더더욱 없다. 그러니 다들 사랑스러울 수 밖에.
좀 찾아보니 영화도 나와있다. 책의 그 유쾌함과 사랑스러움, 그리고 후지사와와 야마조에의 그 티키타가를 어떻게 풀어냈는지 궁금하다. 구리타금속의 사장님도 궁금하다.
평온함 속에서 얻는 안락함만으로 살아가기에, 우리는 너무 젊다고요. (289쪽, 야마조에의 한 마디)
타인의 존재가 나에게 이토록 힘이 되는 적이 언제였던가. 힘이 되기는 커녕 나이 들어 만나는 남들은 대부분이 짐이었다. 심지어 예전에는 힘이 되었던 이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짐이 되어 가고 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슬퍼진다.
평온하고 안락한 구리타금속에서 새로운 일을 기획하고, 그게 즐거워서 위의 대사를 말한다. 그래, 맞다. 나도 그렇다. 평온하고 변화 없는 일상이 내가 바라는 삶이긴 하나, 그런 삶을 살기엔 나는 아직 젊다.
다른 이가 나에게 힘이 되는 일상, 그리고 그 일상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 나. 책을 다 읽고 나니 이런 꽤 오래 전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욕망과 돌아갈 수 있다는 용기가 생긴다. 부디 이 욕망과 용기가 오래 지속되기를.
책을 다 읽고 밖을 보니 마당 저쪽에 핀 벗꽃이 환하다.
'소설 (외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그레고르의 가족을 비난한다 : 프란츠 카프카 <변신> (0) | 2025.04.26 |
---|---|
사랑한다고 말하라 : 조너선 샤프란 모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0) | 2025.03.09 |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따스한 슬픔의 불빛이 켜진다 : 클레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0) | 2025.01.12 |
그깟 살 조각 받아서 뭐하게 : 윌리엄 셰익스피어 <베니스의 상인> (0) | 2024.12.21 |
나는 왜 이 소설이 불편한가 : 과탈루페 네텔 <이네스는 오늘 태어날 거야> (0) | 2024.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