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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외국)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따스한 슬픔의 불빛이 켜진다 : 클레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by 개락당 대표 2025. 1. 12.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11쪽, 소설의 첫 문장)

 

1985년 겨울, 아일랜드의 작은 도시 뉴로스, 여기에 사는 펄롱은 땔감과 석탄을 팔면서 살아간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가 없었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많은 놀림을 받았다. 하지만 바르게 성장했고, 지금은 아내와 다섯 딸을 돌보며 지역에서도 신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좋은 남자이자 남편이고 아버지다. 그런 펄롱 덕에 그의 가족은 물질적인 어려움 없이 단란하고 행복하다.

 

어느 날 땔감을 배달하러 간 수녀원에서 이상한 소녀를 만난다. 보자마자 수녀원에 있어서는 안 될 아이들임을 알았다. 아이들은 구원의 손길을 보내지만, 그는 애써 외면한다. 그 시절 수녀원의 힘은 막강했고, 수녀원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르게 할 것이 분명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펄롱도 알았기에 외면한 것이다.

 

외면하긴 했으나, 펄롱의 마음은 편치 않다. 아내에게도 상의를 해보았으나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고, 우리 딸들은 잘 크고 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고 했다. 이후로도 평화와 안정이 보장되는 삶을 누릴 것인가, 아니면 옳다고 생각하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이가에 대해 계속 고민하고 방황한다. 그리고 마침내 불안한 걸음으로 방황하던 길을 지나 수녀원으로 가서 아이를 구한다. 아이의 손을 잡고 수녀원을 나오면서 펄롱은 새삼스러운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했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은 어떤 것이든 지금 옆에 있는 아 아이가 이미 겪은 것, 어쩌면 앞으로도 겪어야 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능 길을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구두 상자를 들고 걸어 올라가는 펄롱의 가슴 속에서는 두려움이 다른 모든 감정을 압도했으나, 그럼에도 펄롱은 순진한 마음으로 자기들은 어떻게든 해나가리라 기대했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121쪽, 소설의 마지막 문장)

 

 

 

 

1.

제목이 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일까. 책에 미시즈 윌슨이 했던,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았던 사소한 것들이 한데 합쳐져서 펄롱의 삶을 이루었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런 사소한 것들이 펄롱의 대단한 행동을 낳았다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지었을까. 

 

2.

책 맨 첫장에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소설을 바친다고 썼다. 덧붙이는 말에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은폐, 강금, 강제 노역을 당한 여자와 아이들의 숫자가 3만 명이라고 했다. 찾아보니 막달레나 세탁소는 매춘여성, 미혼모, 불륜, 혹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여성을 강제로 수용한 곳이다. 무려 200년 동안이나. 여러 폭로와 취재로 막달레나 세탁소가 세상에 나오면서 아일랜드의 국가적 이슈가 되었다.

 

3.

실업수당을 받으려는 줄이 길어지고, 전기 요금을 내지 못해 창고보다 못한 집에서 지내며, 여자들은 아동수당을 받으려고 줄을 서고, 시골에는 일할 사람들이 모두 영국으로 떠나버린 탓에 젖을 짜달라고 아우성대는 소가 널렸다. 심지어 고양이 밥그릇에 담긴 우유를 마시는 남자 아이를 보았다(23쪽)고 작가는 당시 아일랜드의 시대 상황을 묘사했다. 10만 달러가 넘은 국민소득을 자랑하는 아일랜드가 고작 40년 전엔 그랬다고? 막달레나 세탁소의 존재 만큼 놀랐다. 

 

4.

지역 공동체체의 한 일원으로, 한 가정의 가장으로, 가족을 보호하고 가난해지지 않기 위해 성실하게 살아가는 노동자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공모 사실을 알아차리고,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선택 앞에서 고뇌하고 결단하는 과정은 쉽지 않다. 펄롱은 담담하게 자신의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두려웠으나 무엇보다 기뻤다고 했다. 결단의 결과는 기쁨이다. 그게 핵심 아닐까. 

 

5.

펄롱이 옳은 일은 하게 만든 원인이 무엇일까? 아내와의 대화에서 얼마간의 유추가 가능하다.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니 가만 두어라는 아내에게 "미시즈 윌슨이 당신처럼 생각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57쪽)"고 펄롱은 말한다. 윌슨 부인 덕택에 어머니와 자신이 사람답게 살 수 있었고, 그런 보살핌을 받은 펄롱은 수녀원의 불쌍한 아이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6.

읽으면서 스산한 기분이 든 건 나만 그런건가? 계속 뭔가 쎄~하다는 느낌이이었다. 까마귀, 앙상한 나무, 잿빛 사람들, 검은 강 등의 배경들 때문일수도. 결국 막판에 주인공은 사고?를 치고 만다. 내 그럴 줄 알았다. 

 

7.

이후의 이야기는 어떻게 전개될까? 자신의 공동체에서 펄롱은 따돌림을 받겠지. 석탄과 땔감 주문은 점점 오지 않고, 그래서 가난해지겠지. "내가 하지 말라고 했잖아!" 라며 아내는 돈을 벌어오지 못하는 펄롱에게 이혼을 요구하겠지. 사람들의 압박에 굴복한 펄롱은 수녀원에 사죄하겠지. 그게 아니라면 펄롱의 작은 시작으로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수녀원의 비리와 억압을 폭로하고, 그리하여 감금되었던 아이들은 해방되고 수녀들은 벌을 받는 해피엔딩은 어떤가? 

 

8.

소설은 40년 전 지구 반대쪽 아일랜드 이야기지만, 지금 우리나라와 비교해도 별로 다르지 않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려고 첫 발을 떼는 용기, 자신에게 떳떳해질 수 있는 용기, 이런 게 필요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