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사보아>라는 주택이 있다. 현대 건축의 거장 르코르뷔지에 할배의 작품이다. 잘 날게 설계된 비행기가 좋은 비행기이듯 잘 살게 설계된 집이 좋은 집이라는 그의 생각이 그대로 담겼다. 할배는 극단적으로 '집은 살기 위한 기계'라고까지 표현했다. 건축과에 들어가서 '현대 건축의 5원칙'이라는 걸 이 집으로 배웠다.
모더니즘의 시초라 불리며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 주택은,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그냥 심드렁하다. 온 세상의 주위에 널린 게 이런 집이다. 현대의 시점에서 보면 빌라 사보아는 지극히 평범하다. (이 집은 1930년에 지었다. 고전주의 건축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시점이다. 그런 상황을 상상한다면 이 집은 혁명 그 자체다. 사실 100년이 지난 지금도 빌라 사보아의 흉내만 내는 건축물들이 수두룩하다.)
<베니스의 상인>은 선과 악이 확연하게 구분되어 있고, 권선징악의 플롯이 분명하다. 상상을 벗어나는 반전도 없다. 이런 류의 소설은 많이 봐왔다. 그럼에도 셰익스피어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극으로 꼽히며 여전히 읽히고 있다. 왜 그럴까? 이 책은 무려 400년 전인 1596년에 나왔다. 당시 남녀간의 사랑, 귀족들의 우정, 법의 지위와 계약 문제, 유대인의 문제 등이 이 책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하기 때문에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게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가졌던 생각들을 정리해 본다.
1. 무서운 여자 포셔.
사실 상 이 책의 주인공이다.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어낸다. 일단, 마음에 드는 잘 생긴 남자 바사니오를 남편으로 고른다. (남편 고르기 퀴즈에서 포셔는 바니시오에게 정답을 살짝 알려줬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남편의 절친인 안토니오를 샤일록의 죽음의 계약으로부터 구해내고, 남편에게서 안토니오를 떼어내고 온전히 남편을 차지한다. 전체적으로 상황을 통제하며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조정한다. 굉장히 현명하지만 매우 치밀하다. 나의 뱃속을 뚫어보는 그런 느낌이다. 뭔가 살짝 오싹하다. 여자는 역시 백치미지.
2. 당시에도 브로맨스가 있었나?
바사니오와 안토니오는 절친이다. 그런데 그 관계가 미묘하다. 우정을 넘어서서 사랑이라 표현해도 과하지 않은 그런 경계에 있다. 심지어 안토니오는 그런 관계를 은근히 자랑도 한다. 포셔는 이걸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지를 달라'는 절묘한 계책으로 바사니오에게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인지하게 해 준다. 모두가 아는 이런 남자들과의 사랑에 가까운 관계, 이걸 어떻게 봐야 하나. 그 시절엔 이런 게 아무렇지도 않았나?
3. 샤일록, 너 그렇게 될 줄 알았다.
계약 금액에 세 배를 준다고 할 때 받지 그랬어. 그렇게 욕심을 부리더만 모두 다 잃고. 정말 안토니오를 죽일 작정인 거였어? 그 정도로 심한 차별과 모욕을 받았다구? 안토니오가 침 뱉고 욕했다고 살점을 벨 작정이었니? 그깟 살 조각 받아서 뭐하게. 고리대금으로 돈을 버는 게 목적이라면 못이기는 척 좋은 조건을 받아야 유대인이라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샤일록은 복수라는 목적을 위해 직진한다. 수전노지만 교활함은 없다. 당시에 유대인이 받는 차별과 미움에 대해 조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서럽게 수 백 년간을 지냈고, 이제 겨우 자리 잡았는데, 이웃들과 사이좋게 지내야지, 이스라엘 너희들은 지금 왜 그러냐? 그런 핍박을 다 잊었냐?
4. 억지 계약은 지켜야 하나?
샤일록은 자신을 경멸했던 안토니오에게 돈을 빌려주면서 이런 패널티 조항을 넣는다. '돈을 갚지 못하면 너의 가슴 가까운 살 1파운드를 갖겠다.' 당사자 간에 이러 계약을 했다면 이건 지켜져야 하나? 포셔는 '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계약은 무효'라는 억지?스러운 논리로 이 계약을 무효로 만든다. 현대에서는 이런 계약은 원천 무효라고 한다. 사회 질서에 위반한 계약이라고. 포셔의 억지 판결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엉터리 계약은 현재에도 횡행하고, 그 법 적용은 오직 판사가 결정한다. 법대로 한다고 다 만사가 아니다. 그러니 판사가 현명해야 된다는 건 분명하다.
고전을 재미있게 있으려면 공부해야 될 게 많다. 당시의 사회, 역사, 사람들을 봐야 한다. 그리고 내용에 나오는 상징과 비유, 뭐 그런 것들을 다 읽어내야 한다. 마치 빌라 사보아가 혁명적인 건축물인 것을 알아차릴려면 그 시대의 보편적인 건축과, 빌라 사보아에 담긴 현대 건축의 요소들을 알아야하는 것처럼.
결론은, 고전을 재미을 느낄려면 사전에 알아야 될 것이 참 많다. 그래서 고전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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