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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호시우보(虎視牛步)의 마음으로 걷자 : 박창희 <걷기의 기쁨>

by 개락당 대표 2025. 5. 31.

 

15p

걸을 때 우리는 무언가를 하는 동시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걷기만큼 쉬운 것이 없지만, 제대로 걷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걸으면 감각이 깨어나고 머리가 맑아진다. 노폐물에 전 오장육부도 서서히 초기화된다. 잊힐 건 잊히고, 지울 건 지워진다. 머리가 가벼워지면 새로운 생각이 채워질 공간이 넓어진다. 

 

오래 전 친한 후배가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다녀왔다. 그보다 더 좋은 수는 없다면서 꼭 한번 가보라고 추천했다. 그가 보여준 사진을 보며 가고자 하는 의욕을 불태웠다. 하지만 안나푸르나가 뒷동산도 아니고 그리 쉽게 갈 수 있는 곳인가. 가끔 안나푸르나의 그 비경을 사진으로 찾아보기도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서서히 잊혀져 갔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어떤가. 걷는 이들의 로망아닌가. 다녀온 지인도 꽤 되고 심지어 딸의 친한 친구도 다녀왔다. 한때는 순례길을 책을 읽으며 언젠가는!을 외쳤다. 하지만 지금은 깨끗이 포기했다. 내가 걸을 수 있는 한계를 안다. 

 

몇 달 전의 이른 봄, 동네책방 생의 한가운데 대표님과 골목독서의 총무님 이렇게 셋이서 김해 수인사 뒷산을 올랐다. 시린 공기가 내 오장육부를 쓸고 가는 시원함을 느꼈다. 하지만 두 시간 남짓 되는 트레킹도 헉헉대며 두 여성분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내려와서 먹은 국수는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디스크 수술 이후 걷는 것이 허리에 가장 좋은 운동이라 게을리 할 수 없다. 그래서 체육관의 러닝머신에서 걷는다. 슈카월드 한편이 보통 30분이니 딱 적당하다. 야외에서 걷는 것이 훨씬 좋다지만 혼자 걷는 것도 별로고 해서 그냥 체육관을 이용한다. 그래도 가끔은 공원에 나가기도 한다. 

 

 

 

 

동네 책방 생의 한가운데의 독서모임인 <골목독서>에서 봄 가을에 걷는다. 걷기 마스터인 재구선생님 이름을 따서 이른바 '재구 로드'라 부른다. 올 봄에는 통영의 여러 곳을 걸었는데, 밥벌이 때문에 가지 못했다. 윤이상 선생과 이중섭, 전혁림 화가, 박경리 선생과 유치환 선생의 숨결이 담긴 곳을 책 동무들이 걸었고 나는 사진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소모임이 아니라 책방에서 주관하는 걷기도 가끔 한다. 딱 3년 전인 2022년 6월에 이 책을 읽고 책방 사람들과 함께 걸었다. 김해 진영의 철도박물관에서 시작하여 성냥 전시장과 찬새미 마을 골목을 누볐고, 강성갑 선생의 거리와 김원일 작가의 생가터를 들렀다. 마침 이제 수명을 다해 철거되기 직전인 적산가옥도 만나볼 수 있어서 의미를 더했다. 

 

 

진영에 남아 있는 적산가옥. 적산 가옥은 이름 그대로 적이 만든 집이다. 보통 일제시대에 지어진 일본식 집을 뜻한다.

 

모두 떠나고 남은 집. 이제는 재개발로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지는 집이다. 이런 집들은 보존했으면 하는 바램이 많지만 개발 논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도시재생 사업으로 깔끔해진 찬새내골의 입구. 타일로 문패를 만들어 집집마다 붙였다. 개성이 있다.

 

언덕배기에 있는 빨래터와 아낙의 조형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사람의 시선을 끈다.

 

타일로 벽을 장식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걷기에 적당하게 포장된 길도 좋았다.

 

언덕을 다 오르면 만나는 행복마을 나눔터. 동네에서 운영한다고. 주중에는 찾는 사람이 적어 운영이 쉽지 않다고 한다.

 

이런 비탈에 집을 지을 정도면 아주 오래 전에 마을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집으로 가는 가파른 골목길이 정겹다.

 

겨레의 상록수 강성갑 선생. 우리 지역에서 자랑할 만한 위대한 교육실천가다. 보도연맹사건으로 희생당했다. 기념관이 지어질 예정이라는데 잘 되었으면 좋겠다.

 

진영 금병공원에 있는 김원일 기념비와 책의 저자이자 이 날 길잡이 역할을 맛깔나게 해주신 저자 박창희 선생님.

 

사진이 너무 좋아서 가지고 왔다. 밴드 [생의 한가운데]에서 있는 답사기에서 선생의 사진을 빌려왔다.

 

 

5p

머리가 복잡한가? 당장 밖으로 나가라. 마누라가 쫓아내기 전에 제 발로 나가라. 핸드폰은 꺼놓든지 집에 냅두고 다녀라. 가벼운 옷차림에 무거운 것이 들어가면 스타일 구겨진다. 온갖 잡스런 정보와 소식에 목매고 있을 이유가 뭔가.

 

책의 앞부분은 길과 걷기에 대한 작가의 생각과 감상을, 뒷부분은 부산 인근의 순례길에 대한 소개가 들어있다. 삼량진의 작원잔도, 만덕고개의 그 힘든 고갯길, 서면의 철길마을, 금정산 금어동천, 구포나루와 구포시장,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양산의 황산까지 복원했다. 해운대의 최치원 유랑루트를 설명하며 중국 장쑤성 양저우의 최치원 기념관을 언급하기도 했는데, 십여 년 전 아내와 함께 갔던 곳이라 반가웠다. 

 

작가가 소개한 곳들은 모두 한번쯤은 가본 곳들이라 흐뭇했다. 만덕고개는 정말 걸어서 한번 넘어보고 싶은 정도였고, 가끔 가던 구포시장은 책을 끼고 작가의 루트로 다시 가봐야겠다고 작정했다. 서면도 안간지 오래되어 다시 걸어보고 싶고, 도심 속 섬이라고 하는 범일동 매축지마을도 처음 알았는데 재개발로 사라지기 전에 다녀오면 좋겠다. 양산의 황산공원이 왜 황산공원인지 알게 되었다.

 

호시우보(虎視牛步)는 호랑이처럼 보고 소처럼 걷는다는 말로 사물을 잘 살피고 소같이 신중하며 여유있게 뚜벅뚜벅 걸어라는 말이다. 작가도 책에서 표현했지만, 약으로 보신하는 것보다 먹는 것으로 보신하는 게 낫고, 먹는 보신보다 걷는 보신이 더 낫다고 한다. 걷기는 몸에도 좋고 정신에는 더 좋다. 

 

예전에 서울 본사에서 근무할 때, 집에 내려가지 않는 주말이면 배낭에 먹을 것 가득 넣어 하루 종일 걸었다. 서울은 그야말로 600년 된 건축 박물관이었다. 서울 곳곳의 골목과 여러 건축물을 발품을 팔아 보러 다녔다. 호기심과 열정, 배움에 대한 갈망이 있을 시절이었다.

 

지금은 러닝머신에서 유투브를 보며 걷는 신세지만, 그래도 밖으로 나가 짧게 거니는 것은 상쾌하다. 가능하면 공원이나 운동장에 가려고 한다. 안나푸르나를 포기하기엔 아직 30년이나 남았다. 힘 닿는 데까지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