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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여행은 타인이 된 나를 연인으로 맞아들이는 일이다 : 조문환 <괴테를 따라 이탈리아 로마 인문 기행>

by Keaton Kim 2020. 7. 27.

 

 

 

여행은 타인이 된 나를 연인으로 맞아들이는 일이다 : 조문환 <괴테를 따라 이탈리아 로마 인문 기행> 

 

 

 

하동의 악양 면장님을 지낸 분이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책을 냈단다. 그런데 이 양반, 시인이고 작가란다. 지금은 하동에서 지역 여행사를 하고 있고. 책보다 사람이 궁금했다. 동네 책방에 강의를 온다니 저자의 책을 사서 미리 읽었다. 저자가 겪고 느낀 이탈리아가 궁금했다.  

 

 

 

 

 

 

가는 비 사이로 언덕 위의 로툰다가 내 손에 잡힐 듯하였다. 한폭의 그림 같은 로툰다, 이와 같은 것들을 두고 픽처레스크한 건축이라고 한다. 이는 중세풍의 저택에서 볼 수 있듯이 비대칭적 형태로서 재미있고 변화가 풍부한 건물을 가리킨다. 좋은 건축물은 그려보면 안다. 사람도 그림이 되는 사람이 있다. 아름다운 것은 그림이 될 수 있다. (p.53)

 

 

 

서양건축사를 공부할 때 자주 나왔던 빌라 로툰다가 비첸차라는 도시에 있구나. 저자는 비첸차라는 도시를 설명하면서 소제목을 <단 하나를 가진 도시>라 붙였다. 그 '단 하나'가 빌라 로툰다를 지은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다. 팔라디오의 건축물 29개가 비첸차에 있단다. 명색이 건축 전공인데 나도 처음 알았다. 면장님이 건축에도 조예가 깊네. 그림이 되는 건축물, 그림이 되는 사람, 건축에서 사람으로 글이 이어진다.

 

 

 

이탈리아 사람들만큼 담소 나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광장에 앉아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아이스크림 하나, 생맥주 한 잔, 병아리 눈물만 한 에스프레소 한 잔에 세상 이야기를 다 쏟아 놓았다. 그래서 역사 이래로 광장 문화가 발달한 것일까? (p.60)

 

 

 

이탈리아 사람들이 특히 그러하지만, 유럽 사람이 다 그런 것 같다. 남부 프랑스에 갔을 때도 아침부터 길거리 까페에 나와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보며 "아니, 아침부터 무슨 할 말이 이리도 많을까? 일은 언제 하노?"라고 혼자말을 했더랬다. 유럽의 힘은 저 소통에서 나온 걸까? 부러운 문화다. 

 

 

 

미네르바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 건물 앞은 광장이었고, 광장 앞에는 건물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의 아시시역이 있는 자리에서도 또렷이 볼 수 있었을 것이나 지금은 다른 건축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고대인들은 하나의 건축물의 기능도 고려했겠지만 위치도 기증 못지않게 중요시했다. 괴테는 이런 것들을 팔라디오와 비트루비우스에게서 배웠다. 도시는 어떻게 건설돼야 하며 신전과 공공건물은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를, 이것이 이탈리아를 그랜드 투어로 삼은 이유이기도 했다. (p.137)

 

 

 

저자는 아시시에 사흘을 머무르며 매일 밤낮 미네르바 교회를 보았다고 했다. 낮에는 절제된 민낯의 건축물에, 저녁에는 조명이 들어오는 신비로운 자태에 반했다고 썼다. 나도 반했다. 깨끗하고 목가적인 아시시의 풍경과 오래된 건물들이 주는 편안함이 배낭 여행자의 긴장감을 완전히 풀어주었다.   

 

 

 

17세기에 본격적으로 그랜트투어가 영국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 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공교육에 대한 불만이었다.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등 주요 대학의 위상은 끝없이 추락했다. 1733년 케임브리지의 그라이스츠 칼리지는 신입생이 겨우 세 명이었다고 한다.

 

(중략) 이 논쟁은 사교육 선호로 기울어졌지만, 학생들을 집 안에서만 교육하기에는 당시 영국 사회가 맞이한 변화를 수용하기 힘들어, 제3의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해외여행을 통한 아카데미식 수학이었다. 그 여행의 대상지가 르네상스와 휴머니즘의 본고장이자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산이 살아 있는 로마가 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p.137)

 

 

 

대학 4년을 다닐래, 해외 여행을 4년 동안 할래? 나는 망설임 없이 여행을 선택하겠다. 내 아이가 그렇게 한다고 하면 적극 밀어주겠다. 여행을 통해 배우는 것이 대학보다 훨씬 많다고 믿는다. 유럽에서는 무려 250년도 더 전에 그 방법으로 배웠단다. 연암 박지원도 마찬가지고.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 근데 울 아이들이 가려고 할까?

 

  

 

오르비에또 성을 반 바퀴 정도 돈 후에 확신이 든 것은 이 도시가 슬로시티를 주창할 수밖에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도시의 크기로, 속도로 다른 도시들과 경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면적이 도시의 동 정도, 농천의 마을이나 리 정도의 면적 밖에 안 된다. 이 같은 도시가 크기로 승부를 걸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속도는 더더욱 절망적이다. 길어야 2km 정도 밖에 안 되는 곳에서 무슨 속도 경쟁을 하겠는가?

 

그러니 느림을 이야기했다. '느림'으로 경쟁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느림'이라는 것을 주창해버렸다. '내가 앞장서서 느리게 살 터이니 당신들도 우리를 따라서 해 보시오'라고 말이다. 그 주창에 따라나선 도시가 세계적으로 300개가 넘는다. 속도나 크기를 경쟁 단위로 삼았다면 늘 꼴찌에 머무를 도시가 느림의 원조가 되었다. (p.148)

 

 

 

유럽을 여행하면서 시간이 느리게 가는 동네를 여럿 만났다. 이탈리아의 아시시, 독일의 로텐부르크, 포트부를 비롯한 스페인의 작은 도시들은 모두 발전이니 경쟁이니 하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도시 자체가 느리디 느렸다. 내가 사는 동네도 '슬로시티 김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이름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속도와 변화가 어울리는 도시다. 그럼에도 슬로시티라고 이름붙인 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 거다.

 

 

 

나의 시집 <바람의 지문>에 '언어 체감의 법칙'이라는 시가 있다.

 

평화를 말할 때 평화는 떠나 버렸다.

자유를 노래하자 자유는 억류되었다.

평등을 부르짖자 평등은 기울어져 버렸다.

사랑한다고 말함으로 사랑을 허울뿐이었다.

보고 싶다는 말에 타는 가슴은 식어버렸다.

추하고 지저분한 저 언어 덩어리들.

 

말이라는 것은 그렇다. 말하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있어야 진정한 소망이 되고 바람이 된다. 어쩌면 느리게 살겠다고 말하지 않은 볼세나가 더 느림의 진수를 보여주고 참다운 느림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에 늘 서툴다. (p.151)

 

 

 

저자의 시는 자체로도 읽는 맛이 있다. 더하여 그 시를 느림을 외치는 도시를 빗댔고, 사람의 일상으로 확장했다. 외치고 표현해야 진실이 되는 현실에서, 그 말을 가슴에 품어 더 의미가 있는 세상을 바란다. 저자의 의견에 동감한다. 느리고 느린 도시 오르비에또와 볼세나가 궁금해진다.  

 

 

우리나라에도 아팔피 해안 못지 않은 길이 많이 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섬진강 길은 이들이 아말피 해안을 일컫는 형용사인 가슴 떨리게 하는 수준 정도가 아니라 가슴을 부둥켜안고 강물로 빠져들게 하는 길이다. 남해의 오밀조밀한 해안 길은 모퉁이를 돌 때 마다 마치 섬을 헤엄쳐 가는 기분을 들게 할 정도이고 금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다도해의 풍광은 또 어떤가. (p.180)

 

 

 

이탈리아에서 가장 절경이라고 지인이 추천한 아말피 해안. 꼭 가봐라고 했지만,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가지 못했다. 좀 아쉬웠다. 아말피를 보고 온 저자가 저런 말을 하니 거짓일 리는 없겠지. 가슴을 부둥켜안고 강물로 빠져들게 하는 섬진강이라.... 글을 읽고 다시 가보면 달라보이겠지. 훌쩍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니 주말에라도 가서 걸어야지. 

 

 

 

너무 가까이 있다는 것도 관계가 일상이 되어 버려 상대가 어떤 존재인지, 얼마나 소중한지 망각하게 만들어 버린다. 불과 2km 떨어져 있는 메시나와 빌라 산 조반니는 꼭 그런 관계 같아 가슴이 서늘해지곤 했다. 일상의 삶은 바람도 잔잔하고 파도도 없으며 탄탄함과 견고함이 문지기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러나 잔잔함과 견고함이 화석처럼 무뎌질 때에는 일상이라는 것은 있어도 없는 것 같은 타인이 되어 버린다.

 

여행은 타인이 된 나를 연인으로 맞아들이는 일이다. 그곳은 사면이 가로막힌 선실과 같은 곳이면 더 아름다울 것이다. 대화할 상대라고는 나밖에 없는 감옥과 같은 곳이면 더 명징할 것이다. 읽을 책이라고는 없는, 있어 봤자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선반에 올려놓은 작은 묵상 시집 정도면 더 감사하게 될 것이다. (p.208)

 

 

 

책의 문장들 중 가장 눈에 들어온 글이다. 마음이 통했는지 작가도 저 글귀로 책에 사인을 해주었다. 나도 여행에서 나랑 계속 말했다. 나랑 이야기하는 게 지겨워질 정도였다. 그래도 타인이 된 내가 연인이 되지는 않았다. 혼자 여행하고, 여행에서 대화를 나눌 상대가 나 밖에 없고, 그래서 내가 연인이 되는 여행을 작가는 경험했나 보다.

 

 

 

잠깐 사이에 장소만 바뀌었을 뿐인데 이제 와서 보니 내가 있는 곳은 현실이 되고, 그 너머는 이상이 되었던 것 같다. 이상적으로 보였던 이탈리아가, 역사의 물결이 도도하게 흘렀던 시칠리아가, 그것도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나를 역사의 현장으로 끌어들였던 메시나와 빌라 산 조반니가 이제 와서 보니 현실이 되어 내 곁에 있는 것 아닌가?

 

차라리 지금의 이상의 나의 나라, 내 고장, 나의 작은 집과 마당이 이상이요, 이상 중의 이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렇게 현실에 신물이 나서 도망치듯 빠져나왔건만 석 달 만에 현실이 이상이 되고, 이상에 저려 있는 듯했던 나의 이상 이탈리아는 너무도 분명한 현실이 되어 있다. (p.247)

 

 

 

시칠리아 카타니아 에트나 화산. 카타니아 시내에서 본 에트나 화산은 이상이었는데 화산에 올라서니 화산은 현실이 되고, 분화구에 서서 바라본 카타니아와 해변은 오히려 그림이 되었다고 저자는 말했다. 직장에 다닐 때 지금의 내 모습은 이상이었다. 그 이상이 현실이 되었는데 나는 이 현실에 또 힘들어한다. 그게 당연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현실이 삶의 목적으로 바꾸기 위해 나는 오늘도 애쓴다.

 

 

 

 

 

 

좀 이상한 여행기였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콜로세움 옆에 뜬 추석 보름달 사진 한 장으로 넘겨버렸고 피렌체의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도 아무런 언급없이 지나갔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이탈리아를 저자는 외면했다. 대신 자신이 본 이탈리아에 대해 담담하게 기록했다. 감상이 더하면 시가 되어 일상으로 넘어왔다. 처음엔 뭐지? 이 여행기는? 했지만 점차 고개가 끄떡여졌다.

 

 

 

강의에서 괴테와 연암을 언급했다. 그들은 동시대의 사람이며 해외여행을 했고 여행기를 썼으며 여행 후에 인생이 바뀌었다고 공통점이 있었다. 음. 그러하군. 난 여행기를 안써서 인생이 아직 바뀌지 않았나?ㅋㅋㅋ

 

 

 

공직을 자의로 일찍 마치고, 여러 직업을 가지고 있는 새 인생을 살고 있는 저자다. 그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어쨌거나 남들 앞에서 이렇게 자신있게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저자가 좋아보였다. 내가 바라는 삶의 모습이다. 두어 시간의 강의로 친근감이 확 들었다. 저자의 인생도 내 인생도 화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