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툴룽에서 스페인의 포트부로 이동한 적이 있습니다. 기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갔었는데, 남부 프랑스의 해안을 따라 가는 기찻길이었습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경관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시골과 바다가 묘하게 오버랩된 매력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언젠가 이 길을 걸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프랑스의 남부 지역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래서 고흐도 아를에 머물렀다고요.
포트부는 발터 벤야민이 나치를 피해 피렌체 산맥을 넘어 겨우 프랑스를 탈출했으나 스페인의 프랑코 정부가 입국의 거부하자 희망을 잃고 자살한 곳입니다. 예전에 어떤 건축책에서 이 곳에 있는 발터 벤야민의 기념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꽤 오래 마음에 남아서 버킷 리스트에 올려 놓았습니다. 오래 간직하면 이루어진다고, 결국 가서 볼 수 있었습니다.
2019년 여름 90일을 발로 꽉꽉 눌러 담아 유럽의 건축물을 보러 다녔습니다. 인생의 전환점, 마일즈스톤, 해묵은 숙제 같은 느낌의 여행이었습니다. 같은 해 가을 90일 꽉 채워서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을 걸은 여행자가 있습니다. 무려 2200킬로미터를요. 네, 짐작했던 대로 산티아고 순례길 이야기입니다. 이 책의 부제는 <르퓌에서 산티아고, 그리고 리스본까지 86일간 여정>입니다. 대충 계산해도 하루에 25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걸아야 완주할 수 있습니다.
마흔에 은퇴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리고 그 결심을 현실로 만듭니다. 제주로 내려옵니다. 시골 생활의 소소한 재미를 느낍니다. 몇 년 살고 나니 제주 생활 또한 심드렁해집니다.
지루해지고 있었다. 모든 걸 멈추고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지루해지지 않기 위해 한라산을 오르며 인적이 드물고 핸드폰도 터지지 않는 계곡을 하루 종일 헤매고 다녔다. 종일 몸을 혹사해야, 몸에 근육통이라도 생겨야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몸이 불편해져야 다음 날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은퇴 후 귀농을 하고 딱히 먹고 살 걱정 없느 주변의 부모님과 선배들이 농사를 비롯해 끊임없이 일거리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산티아고 길이 떠오른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7쪽)
그래서 무작정 비행기표부터 끊습니다. 넘들 안가는 길을 찾아봅니다. 마눌이 묻습니다. 왜 그런 미친 짓을 하냐구요. 마흔 여섯, 모험을 떠나기 딱 좋은 나이가 아닌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책에 나오지만, 이 호기로움은 출판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 쫓겨나지 않은 거에 고마워해야지요.
원래 내 계획은 르퓌에서 생장 800, 생장에서 산티아고 800, 산티아고에서 리스본 600 해서 모두 2200킬로미터를 걷는 것이었다. 그런데 프레디를 보며 어쩔 수 없이 목적 지향적인 한국인이었던 나를 본다. 천천히 자세히 보고 느끼며 다니는 프레디를 보니 최종 목적지는 굳이 정할 필요가 없겠다 싶어졌다. 나는 산티아고로 간다고 하고, 프레디는 산티아고에 가기를 바란다고 한다. 이제 나도 산티아고에 가기를 바란다. (84쪽)
여러 책 중에 여행 책이 제일 안팔린다고 합니다.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유투브엔 어마무시한 여행 컨텐츠들이 가득입니다. 여행 정보, 풍광, 여행자의 감상 등 영상으로 보는 것이 훨씬 재미있습니다. 산티아고를 걸은 많은 영상들을 찾아보면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책 재미납니다. 일어나서 먹고 걷고 사람들을 만나고 하는 똑 같은 하루이지만 매번 다릅니다. 하루하루 새로운 매력이 있습니다.
뭘 얻었나고 묻는다는 건 지금 생각해보면 다 욕심이었다. 옹졸한 마음이 넓어질 거라든지, 뭔가 새로운 구상들이 떠오를 거라든지, 하다못해 혼자 여행하면 영어가 늘 거라든지, 이 길이 내게 많은 것을 줄 거라는 생각은 다 내 희망 사항일 뿐 헛된 기대였다. 변한 건 없다. 그저 2천여 킬로미터를 걸을 것 뿐, 그게 전부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렇지, 혹시 오늘 자고 나면 뭐라도 변해 있을까. 마지막 허튼 기대를 해보지만 그럴 것 같진 않다. (503쪽)
마침내 모든 길을 다 걷고 더 이상 가야할 길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돌아봅니다. 그 때의 심정을 위와 같이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이 책이 매력적인 이유고 작가가 멋진 이유입니다.
유럽을 다녀온지 5년이 지났습니다. 나의 이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에서 그래도 가끔 언뜻언뜻 여행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여행 사진을 한 번 찾아보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아, 그땐 그랬지 하고 씩 웃습니다. 작가도 그렇겠지요. 작가를 만나면 5년이 지난 지금 그 여행이 작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아니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지 묻고 싶습니다. 각자의 여행 이야기를 나누면 뭔가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근데 이 양반, 지금쯤이면 또 어디를 방랑하고 있으려나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도 언젠가 꼭 해봐야 하는 희망이지만, 이젠 놓아줍니다. 시간이 충분하고 돈이 있다해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 달을 꼬박 걷기만 하는 게 어떤 건지, 다 걷고 난 후의 감상은 또 어떨지, 걸으면서 무엇을 보고 느끼며 얻을 수 있을지 매우 궁금합니다만, 내 몸의 한계를 이제 압니다. 아쉽지만 이 책으로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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