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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여정이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by Keaton Kim 2019. 12. 5.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여정이다 : 김영하 <여행의 이유>

 

 

 

뉴욕에서 살던 어느날 아내가 불쑥 이런 말을 했다.

"여행가고 싶다."

"지금도 여행 중이잖아."

아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런 거 말고 진짜 여행." (p.193)

 

 

 

독일을 여행하던 중 베를린에서 친구를 만났습니다. 나는 팔자 좋은 여행자였고, 그는 딸아이의 면접때문에 먼 곳까지 왔습니다. 같은 고향에 있으면서도 생전 연락 한번 안하다가 우연히 독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굳.이. 연락을 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베를린 돔이 보이는 슈프레 강가에서 만났습니다. 하도 오랜만이라 좀 어색했습니다. 음악을 하는 아이의 입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간의 사정도 오고 갔습니다. 쓴 독일 커피를 다 마셔갈 즘 그가 책을 한 권 내밀었습니다. 책 제목이 <여행의 이유>였습니다. 막 유럽여행을 시작한 나에게 딱입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그렇게 이 책은 석 달 가까이 나와 함께 유럽 곳곳을 다녀왔습니다.

 

 

 

책 내용 중에 여행의 묘미는 계획과는 전혀 다른 뜻밖의 일이라고 했는데, 베를린의 어느 카페에서 뜻밖의 책이 불쑥 들어왔다.

 

 

여기까지 와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사진 한 장 찍자고 했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걸 알고 선물로 준비한 친구다. 그 마음 씀씀이가 예쁘고 고맙다. 뒤에 보이는 건 베를린 돔이다.

 

 

 

퇴사를 하자마자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마치 여행을 하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것처럼요. 그것도 여행지의 백미라 불리는 유럽입니다. 가고자 했으나 여태 멀리만 있었던 곳입니다. 아껴두었다는 표현이 딱 적합할지 모르겠습니다. 백수가 되었으니 시간도 넉넉합니다.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겠죠. 이십대에 떠났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나이 먹고 혼자 떠나는 여행도 꽤 괜찮을 거라고 위로도 하고 혹시 실망할까봐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아야지 하고도 마음을 먹었더랬습니다.

 

 

 

그렇게 떠난 여행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낯선 도시까지는 잘 왔는데 어디를 가야 할지 뭘 먹어야 할지 하는 사소한 선택이 쉽지 않았고, 당장 내일 어디서 묵어야 할지 안절부절했으며 다음 도시로 가는 기차는 버스가 오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습니다. 여행의 이유나 본질을 생각하기보다 당장 눈 앞에 있는 숙제를 해결하기 바빴습니다. 남들이 얘기하는 자아 찾기 따위는 안드로메다였습니다. '우씨, 집 놔두고 이 머하는 기고?!' 뭐 이런 마음이었죠.

 

 

 

작가는 여행이 계획대로만 되면 그 무슨 재미없는 일이냐고 일갈합니다. 여행의 진짜 묘미는 내가 생각지 못한 뜻밖의 일이라고 합니다. 여행을 하면서 그 말의 의미를 점점 깨닫게 되었습니다. 낯선 동네에 가기 전에 그 곳에 대해 알아봅니다. 정보는 차고 넘칩니다. 그리고 막상 그 곳에 다다라서는 인터넷에 쓰여진 것, 혹은 내가 예상했던 것을 확인하는 정도입니다. 감동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건 혹은 장소가 쨘!! 하고 나타날 때와의 희열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여행지에서 만난 진짜 여행자들도 가장 좋은 여행은 '잘 모르는 여행'이라고 합니다. 정보의 홍수에서 그런 여행을 하기가 힘듭니다. 이 깨달음을 얻고서는 여행이 좀 쉬워졌습니다.

 

 

 

책의 내용 중에 <스탠바이 웬디>라는 영화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인공 웬디는 자폐증으로 바깥 세상과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소녀입니다. 좋아하는 시리즈 <스타트랙> 시나리오를 써서 공모하려고 했지만 원고를 우편으로 부치지 못하고 직접 배달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불친절한 버스가와 도둑을 만나고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시련을 겪습니다. 원래의 목적이었던 시나리오 공모 당선은 이루지 못했지만 대신 그 좌정을 통해 스스로 부과했던 한계를 돌파해 세상으로 나가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을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과 무역을 해서 큰돈을 벌겠다는 목표을 가지고 여행을 떠났지만 이 세계가 자신이 생각해왔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과 짐승, 문화와 제도가 존해한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와 그것을 <동방견문록>에 남겼다. (p.19)

 

 

 

그토록 원했던 여행을 마치고 몇 개월이 지난 지금, 내 여행을 꺼내어 봅니다. 내가 여행에서 이루려고 했던 것을 이루었나요? 아니면 다른 본질적인 것을 얻었나요? 제목(마르셀 프루스트가 한 말을 인용했습니다)처럼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나요? 웬디나 마르코 폴로와는 달리 나는 필부라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운 시각은 커녕 새로운 풍경을 찾기도 바빠 허둥대다 온 느낌입니다. 다시 떠난다면 더 잘 여행할 수 있겠는데 말이죠.

 

 

 

현실로 돌아오니 백수로 맞이하는 일상은 여행보다 드라마틱합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조그마한 깨달음이 있다면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세상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멈추면 그 도시도 멈추고 내가 걸으면 세상도 따라 걸었습니다. 이 원칙은 현실의 일상에서 더 확실하게 적용이 되는군요. 현실이란 놈은 여행보다 더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어서 내가 뭔가를 하지 않으면 아주 착 엎드려 있습니다. 

 

 

 

제목에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여정이다.'라는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경구를 옮겼습니다. 근데 새로운 시각은 꼭 여행에서만 가져지는 건 아니지요. 현실의 지루하고도 팍팍한 일상에서도 가능합니다. 그리고보니 여행과 일상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새로운 시각이 생겼습니다. 여행을 떠나 온 것처럼 일상을 살고, 일상을 사는 듯이 여행하기..... 아, 뭐라도 하나 건졌습니다.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