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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

모르는 사람들의, 그러나 알아야 하는 이야기 : 이승우 <모르는 사람들>

by 개락당 대표 2025. 5. 12.

 

<모르는 사람>

 

11p

아버지가 왜 떠났는지 오랫동안 궁금했다. 그 궁금증 속에는 아버지가 무엇으로부터 떠나려 했을까, 하는 질문이 숨어 있다. 무엇으로부터 떠났고 떠나려 했는지 안다면 왜 떠났고 떠나려 했는지도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 것 같다. 그는 집을 떠나고, 일터를 떠나고, 나와 어머니를 떠나고, 나와 어머니가 포함되어 있는 가족을 떠나고, 그리고 여기, 이 세상을 떠났다. 

 

이 세상은 견디는 것이다, 라고 말한 아버지가 11년 전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졌다. 러시아 국적의 보잉 747이 추락한 날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름이 탑승자 명단에 없었음에도 그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고 믿었다. 아버지 회사의 광고 모델인 그 여배우의 이름이 탑승자의 명단에 있는 걸 보고서였다. 

 

21p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가장 쉽고 위험한 방법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는 것이다. 가장 쉽지만, 이것은 사실은 이해가 아니라 오해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이해하지 않는 것보다 위험하다. 이해되지 않은 채로 두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왜냐하면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걸 이해할 수 없으니까, 어머니는 쉽고 위험한 방법을 택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11년 뒤 아프리카 레스토에서 아버지가 부고가 왔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말라리아로 죽었다. 부고를 알린 선교회에서는 아버지가 꽤 오래 준비하고 레소토로 떠났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었다.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은 가장 모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한 여자였다. 어머니가 견디고 있는 세상이 보였다.

 

 

 

 

늘 곁에 있는 사람, 그래서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실제는 내가 아는 게 별로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는 내 아버지와 어머니였고, 친구였고, 나 자신이었다. 알고 있던 것과 다른, 아버지와 어머니의 실제, 친구의 실제, 나의 실제를 마주했다. 실제를 알고 난 후, 그 사람들은 낯설었고, 이전과 달랐고, 그가 사는 세계가 보였다. 

 

내가 몰랐던, 그 사람들의 과거가 우연한 계기로 드러났다. 그런 일들이 있음으로 해서 지금의 그가 되었다. 그 과거를 알고 난 후 나는 당황했다. 하지만 곧 선명해졌다. 그가 왜 그런 삶을 살았는지, 그의 곁에 있던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소설의 이야기는 그렇게 내가 몰랐던, 숨어 있는 일들이 드러나지만, 현실은 소설이 아니라서 드러나지 않는다. 현실은 드러나지 않고 보여지지 않으니, 보지 못했고, 그래서 나는 그들을 모른다. 그들이 나의 부모, 나의 친구, 나의 지인들, 심지어 나의 자식이라 해도 그렇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기 위해 애써야 하나? 그러면 좀 더 다가갈 수 있나? 애써 살피지 않으면 이해할 수 있는 것들만 이해하는 것인가? 현실의 삶이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더해야 하나? 

 

돌이켜보면 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와 만물의 작용과 사물의 작동 원리에 대해서는 궁금했고, 관심을 가졌고, 알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관계나 작용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았다. 흥미가 없었고, 거리를 두었고, 부러 다가가지 않았다. 그게 편했다. 사람의 감정과 관계의 그 복잡다단함이 피곤했다. 이런 내 삶의 방식은 틀린 걸까? 책을 읽으면서 그런 의문이 들었다.

 

<모르는 사람>은 아버지가 떠나는 이야기다. 박범신의 <소금>, 다니구치 지로의 <열네 살>도 이런 류의 이야기다. 묘하게 마음이 간다. 나의 의식 어딘가에 그런 떠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남자의 떠남에는 설명이 없다. 떠남을 보는 이들의 심정은 잘 드러나지만, 떠나는 이의 입장은 표현되어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남자의 떠남에 대해 아직 관대하지 못함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런 생각도 했다. 

 

책은 그럼에도 술술 읽힌다. 현학적인 문장도 화려한 플롯도 없다. 게다가 작가는 친절하기까지 하다. 저이가 왜 저랬지? 하고 궁금해하는 나를 위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가 이런 건 예전에 이랬기 때문이야 라며. 그래서 나는 소설 속 화자처럼 모르는 사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다가가게 된다. 현실도 누가 이렇게 설명을 해주면 좋으련만, 그렇다면 내가 그들을 좀 더 이해하고, 더 가까이 갈 수 있을텐데.

 

 

35p

하찮은 것에 간절해지지 말자는 말은 하찮은 것에 간절해지는 나를 향해 주문처럼 하곤 했다. 그것이 내가 세상을 견디고 혐오스러운 나를 견디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뭐라고 말하든 나는 세상에 붙들려 있었고, 세상과 어울려 있었고, 세상의 일부였고, 그러니까 세상을 견딘다는 것은 나를 견딘다는 뜻이기도 했다.

 

114p

아버지 혼자 죽을힘을 다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나로 하여금 죽을힘을 다하지 않아도 되도록 죽을힘을 다하고 있었다는 걸 몰랐다. 아버지가 모르게 했기 때문이다. 

 

146p

스쳐지나가는 것들은 그 밖에도 셀 수 없이 많았으므로 그것들은 내 마음 어디에도 걸리지 않았다. 세상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요동치는데, 그럴 때마다 요동치는 대로 흔들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바람이 늘 심하게 부는 곳에 사는 사람은 바람이 불 때마다 호들갑을 떨지 않는 이치이다. 그 바람이 자기 방 창문을 흔들 때까지는 바람의 존재를 모른 체한다. 

 

203p

나는 네가 그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는 걸 안다. 그리고 다른 것도 안다. 네가 했는데 드러나지 않아서 감춰져 있는, 크고 작은 아주 많은 것들을 안다. 그 말을 듣는데, 아찔하더라. 그 말을 듣자마자 살면서 내가 저질러온 숱하게 많은, 그러나 발각되지 않아 나만 알고 있는 크고 작은 허물들이 우루루 떠오르는 거야. 살면서 잘못한 게 참 많더라. 몰랐는데 참 많다는 걸 알려주더라.

 

244p (작가의 말 중에서)

이 책 안에 대단한 것이 있을 리 없다. 내 안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성능 좋은 기구들이 그 좋은 성능 때문에 포착하지 못하는 구석진 세상 이치나 주눅든 진실 같은 것이 더듬거리는 허술한 손놀림에 더러 붙잡히기도 할 거라는 믿음이 여전히 소설을 쓰는 사람의 여전한 희망이라는 말은 해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