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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

빨치산의 딸이 아버지를 보내며 :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by 개락당 대표 2025. 2. 4.

 

1.

인물은 박색이었으나 방물장수의 목소리는 갓 지은 찰밥처럼 좌르르 윤기가 흘렀다. 사회주의자고 뭐고 남자란 죄 야들야들한 암컷 앞에서 흐물흐물 녹아나는 모양이었다. 안방에서 귀를 세운 나는, 그렇다면 사회주의보다 더 강력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닌가, 지금 생각해봐도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을 뇌세포에 각인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콩 심은 데 반드시 콩이 나는 것은 아닌 법이다. 뼛속까지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의 피를 받고 그런 아버지의 교육을 받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현실주의자다. 남들에게는 빼도 박도 못하는 빨치산의 딸이겠지만. (11쪽)

 

2.

어머니는 몇시간 전 세상 떠난 아버지가 북한을 비판하면 파르르 날을 세우던, 누가 보면 천생 사회주의자였다. 그런데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 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도 그 정도는 해준다. 그러니까 어머니에게 사회주의란 그저 지나간 첫 남자가, 지나갔음으로 가장 그리운, 뭐 그런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21쪽)

 

3.

여호와의 증인들이 한 감방에 있었는디 갸들은 지 혼자 묵들 않애야. 사식 넣어주는 사램 한나 읎는 가난뱅이들헌티 다 노놔주드라.단 한멩도 빠짐없이 글드랑게. 종교가 사상보담 한질 윈갑서야. (47쪽)

 

4.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법을 나는 모른다. 사회주의자 부모가 나를 그렇게 키웠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내 부모는 어린 나를 일으켜주지 않았다. 무릎이 까져 피가 흘러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조금 울다가 별 수 없이 툭툭 털고 일어섰다. 그렇게 자란 나는 누구 앞에서도 힘들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울어본 적도 없다. 이게 바로 빨치산의 본질인 것이다. (53쪽)

 

5.

- 암만 혀도 자네는 유물론자가 아니구면. 죽으면 그걸로 끝인디 워디 묻히고 안 묻히고, 고거이 뭣이 중하대?

- 아버지는 정말 무덤 필요 없어?

- 두말허먼 잔소리. 우리 죽으먼 싹 꼬실라뿌러라. 꼬실라서 니 펜한 대로 암 디나 뿌레삐레라. 고기밥이 되든동 밭에 거름이 되든동. 기왕지사 죽은 몸, 뭣이라도 도움이 돼야제.

- 그럼 제사는?

- 지사는 무신 지사. 헹제라도 많아서 핑계 김에 얼굴이나 볼라먼 모릴까 니 혼찬디 지사는 무신 지사. (93쪽)

 

6.

- 오죽흐먼 나헌티 전화를 했겄어, 이 밤중에!

또 그놈의 오죽하면 타령이었다. 사람이 오죽하면 그렇겠느냐,는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달리 오죽해서 아버지를 찾는 마음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 힘들 때 가장 믿거나 가장 만만한 사람을 찾는다. 어느쪽이든 결과는 마찬가지다. 힘들 때 도움받은 그 마음을 평생 간직하는 사람은 열에 하나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주의자 아버지는 그렇다한들 상처받지 않았다.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 탓이고, 그래서 더더욱 혁명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102쪽)

 

7.

- 저리 겡우 바르고 똑똑헌 양반이 왜 하필 뽈갱이가 되얐을꼬.

- 하기사 그 시절에 똑똑흐다 싶으먼 죄 뽈갱이였응게.

- 똑똑헌 사램만 뽈갱이였가니. 게나 고동이나 죄 뽈갱이였제. (117쪽)

 

8.

- 서울서 머 해묵고 사는가?

아버지가 물었더니 그는 어머니가 무쳐놓은 말린 취나물이 맛있다며 딴소리만 했다.

- 입성을 봉께 누가 생겠는갑는디?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머 흐는 여잔디? 반반한 얼굴로 홀겠구마.

- 자그마한 식당 해서 먹고 사네.

- 자네가 손이 읎어, 발이 읎어? 워쩌자고 민중을 등쳐묵고 산단 말인가? 베룩의 간을 빼묵제 것도 불쌍한 여성을! 노동을 하란 말이네, 노동을!

그이가 밥숟가락을 놓고 멀뚱멀뚱 허공을 바라봏면서 나지막이 웅얼거렸다.

- 노동이..... 노동이..... 힘들어.

그때까지 위태위태 잘 참고 있던 나는 노동이 힘들다는 빨치산의 고백에 그만 풉, 웃음을 뿜고 말았다. 스스로도 염치가 없었는지 그가 비식 웃으며 덧붙였다. 

- 사흘 노가다 뛰고 석달 입원했네. 나는 암만해도 노동과 친해지질 않아.

- 저놈의 부르주아 근성은 머리가 희캐져도 뿌리가 안뽑히그마이. 그런 놈이 멀라고 뽈갱이는 돼가꼬.... (149쪽)

 

9.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말에는 '빨치산'이 부모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 부모에게도 마땅히,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듯 자식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을 만큼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가 무거웠다고, 나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변명을 들을 아버지는 이미 갔고 나에게는 변명의 기회조차 사라졌다. 그 사실이 뼈아파 나는 처음으로 소리 내 울었다. 아버지를 위한 울음이 아니라 나를 위한 울음이었다. 아버지 가는 길에까지 나는 고작 그 정도의 딸인 것이다. (224쪽)

 

10.

지하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위장 자수를 하려고 산을 내려갔을 때 아버지도 이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눈을 피하자면 밤에 움직였을 것이고, 세상은 환한 불빛으로 아버지를 맞았을 것이다. 아버지는 생각했겠지. 우리가 싸워야 할 곳은 산이 아니라고. 사람들이 불빛 아래 옹기종기 모여 밥 먹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싸우기도 하는 저 세상이라고. 아버지라면 분명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 아는 아버지였다. (255쪽)

 

11.

골목이라 담에 막힌 것인지 뼛가루는 날아가지 않고 우리 머리 위로 쏟아졌다. 셋 중 누구도 몸 어딘가 내려앉았을 뼛가루를 털지 않았다. 아마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어쩐지 아버지가 여기, 함께하는 느낌이었다. 살아 있는 우리와 항꾼에. (263쪽)

 

 

 

 

1.

전라도 사투리가 어찌 이리 구수한지. 책을 읽으면서 빨치산 아버지의 대사가 음성지원이 되었다. 태백산맥에서도 전라도 사투리가 참 정답더라. 음식도 전라도가 찰지더만 사투리도 그렇다.

 

2. 

정답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와 섞여 아버지의 이야기를 이렇게 재미지게 풀어냈는지, 소설 속에 나오는 대화는 거의 만담 수준이다. 대부분이 실제 아버지의 이야기이며 자신의 이야기이긴 하겠지만, 그걸 이리 풍성하게 엮어낸 작가의 솜씨가 놀랍고도 부럽다. 

 

3.

빨치산의 아버지는 죽어서 해방되었다. 살아생전 그 어떤 것에도 욕심부리지 않았고, 죽어서는 더 그랬다. 죽으면 꼬실라가 뿌리라했다. 제사도 지내지 말고. 진정 유물론자였다. 나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나? 나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아도 미련이 없을만큼 현재에 충실한가? 빨치산 아버지의 삶이 존경스럽다.

 

4.

울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이 책의 아버지만큼 많은 사연들이 나올거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진주의 잘 나가는 집안의 딸과 결혼하고, 할머니와 어머니, 고모들과 어머니, 그 갈등 속에 선 아버지, 사업해서 시원하게 말아드시고, 보증 서서 말아드시고, 지금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수발하는 아버지. 나는 작가가 아니라서 그 사연들은 다 글로 적을 수가 없다. 그저 가슴이 묻고 지나가겠지. 아쉬움과 미련이 덜 남으려면 지금 살아계실 때 좀 더 자주 찾아뵈야 하는데.

 

5. 

빨치산 아버지는 결국 혁명을 못하고 죽었다. 혁명을 해서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했다. 그 좋은 세상이란 못 배우고 못 가진 사람들도 사람답게 사는 세상, 항꾼에 어울려 즐겁게 사는 세상이다. 강산이 여러 번 변했지만 그 '좋은 세상'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아니 예전보다 더 멀어지고 있다. 혁명은 지금 더 절실하다.

 

6.

정지아 작가의 이름은 어머니가 빨치산으로 뛰었던 '지'리산과 아버지가 빨치산으로 뛰었던 백'아'산에서 따왔다고 한다. 빨갱이의 딸은 곧 빨갱이이니 자라면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을텐데, 이리 잘 자라서 이리 좋은 소설을 내주니 고맙다. 

 

7.

아주 오래전에 작가의 <빨치산의 딸>을 읽었다는 것을 기억한다. 내용은 당연히 기억하지 못한다. 책꽂이를 뒤져도 책이 없다. 책을 사서 다시 한번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