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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

국방부 놈들아, 너희들은 이 책을 읽었느냐? : 방현석 <범도>

by Keaton Kim 2024. 10. 22.

 

1. 김알렉산드라

 

알렉산드라는 우리와 얘기를 나누는 중간에 몇 차례나 걸려온 전화를 받고 유창한 러시아어와 중국어, 조선어로 지시를 내렸다. 그녀는 그때마나 우리에게 양해를 구했다.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서는 진심이 묻어났다. 달라지지 않는 그녀의 태도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려주었다. 로씨아혁명의 지도자 레닌이 왜 그녀를 신뢰하고 칭송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2권 389쪽)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김, 책에서는 김수라라고 홍범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하바롭스크에 들어선 극동 소비에트 인민정부의 외무장관으로 나온다. 소왕령(우수리스크)의 흰파 문창범과 하바롭스크의 붉은파 김알렉산드라가 홍범도에게 초대장을 보냈고, 홍범도는 알렉산드라를 택했다. 독일 첩자로 몰린 이동휘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기 직전 구출한 것도 알렉산드라였다. 

 

홍범도 책에서 알렉산드라를 만나니 어찌나 반갑던지. 심지어 겁나 멋지게 나온다. 책에서 그는 볼셰비키 그 자체였다. 노동자와 농민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생애를 바친 사람, 그래서 러시아 혁명을 이끈 볼셰비키와 손을 잡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운동가. 아무르 강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치는 장면도 드라마틱하다. 김금숙 화백이 그린 만화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도 재미있다. 

 

격동의 시대에 독립운동가로, 사회주의 혁명가로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김알렉산드라, 하지만 그를 기념할 그 무언가는 아무것도 없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 정도의 인물이면 적어도 기념비나 나아가서는 기념관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은가.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하바롭스크 무라비바 아무르스카바 거리 22번기, 100년도 더 전에 김알렉산드라가 일했던 붉은 벽돌로 된 3층 건물에는 이런 명패가 붙어 있다. '김알렉산드라가 이곳에서 일했고, 1908년에 영웅적으로 죽었다.' 지금은 상업건물로 사용되고 있다고. 아무르 강은 아직도 유유히 흐른다. 사진 출처 :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908140059332950

 

 

2. 최재형

 

- 내 로씨아 이름은 표트르 세묘노비치 2세요.

- 그런데 왜 사람들이 페티카라고 부릅니까?

 

페티카는 대답 대신 웃으며 안중근을 바라보았고, 안중근은 옆에 붙은 벽난로를 가리켰다.

 

- 저기 있잖습니까. 저 벽난로가 페티갑니다. 그걸 여태 몰랐습니까?

 

한 벽면의 일부로 내장된 러시아의 벽난로는 벽돌이 흡수한 복사열로 집안 전체를 데우는 대용량 난방기였다. 가난한 집에서는 취사용 화덕의 구실도 겸했다. 노비의 아들이었던 그는 어떻게 겨울이 길고도 매서운 연해주에서 조선 사람들의 벽난로가 되었을까?

 

- 운이 좋았소

 

페티가는 내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겸손했다. 사람을 은근히 어르는 한편 대놓고 구슬리는 리범윤과는 결이 달랐다. 리범윤이 풍겼던 야심가의 느낌이 페티카에게는 전혀 없었다. (2권 263쪽)

 

페티카는 비교적 입체적으로 나온다. 노비의 아들로 태어나 이국땅에서 러시아인으로 성공했다. 무엇보다 혼자 성공하지 않았다. 빈 땅을 개간하는 것도, 거기서 짐승을 기르는 것도 모두 조선 사람들이 하게 했다. 연해주의 조선인 마을마다 학교를 세웠고 우수한 학생들을 유학 보냈다. 연해주에서 페티가의 온기를 쬐지 않은 조선 사람은 없었다고 책에 나온다.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은 권업회고 권업회의 중심은 최재형이다. 홍범도는 부회장을 맡았다.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들이 모였다. 규모가 커지자 러시아 정부는 한인 자치 기관으로 인정했다. 한글로 된 권업 신문을 발행했고 신채오, 이상설 등이 주로 글을 썼다. 하지만 1차 대전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와 일본은 같은 편이 된다. 데라우치 총독은 러시아에 권업회 해산을 요구했고 이를 러시아가 받아들였다. 

 

이후 연해주에서 만든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의 외교부장으로 임명되었다. 3.1운동 후 상해에서도 임시정부를 만들었는데, 이 때도 재무총장으로 뽑혔다. 2개의 임시정부에 모두 이름을 올렸다. 최재형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1920년에 우수리스크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자신이 잡히지 않으면 가족이 고통당할 것을 알았기에 피하지 않았다. 

 

러시아 우수리스크에 있는 최재형 선생 기념관이다. 순국하기 전까지 거주한 건물이다. 선생의 자식들은 스탈린 정권에 의해 축었고, 살아남은 자식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되었다. 선생에 대해 공부하다가 <나의 아버지 최재형>이라는 책이 나온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의 아들과 딸이 쓴 책이다. 책 읽고 우수리스크 가자. 사진 출처 : https://www.seoul.co.kr/news/politics/2023/01/17/20230117500100

 

 

3. 리위종

 

리범진과 리위종, 리공 부자에 대한 평가는 사람에 따라 같으면서도 달랐다.

 

-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오.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좀더 많았다. 자진한 그 아버지 리범진의 나이 당년 쉰여덟이었다. 대원군의 심복이었던 훈련대장 리경하의 서자로 태어난 리범진의 삶은 파란만장했고, 죽음은 장렬했으며, 유훈은 비장했다.

 

- 그 아들에 그 아버지였던 것도 같소.

 

하지만 이렇게 얘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아들 리위종의 나이 당년 스물여섯이었다. 불란서 사관학교 출신인 그는 내 앞에서 수줍어했다. (2권 339쪽)

 

아버지인 리범진은 러시아 공사였다. 을사조약 이후에도 대사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나라를 잃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장면은 상세하게 책에 나온다. 리범진의 동생 리범윤은 간도 관리사로 등장하는데, 최재형과 함께 연해주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로 묘사된다. 리범윤은 권업회, 의군부, 대한독립군단 등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간다.  

 

리위종은 헤이그 특사에서 러시아로 돌아와 아버지일을 돕우며 독립운동을 했다. 아버지의 장례 이후 러시아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차 세계대전에 러시아 장교로 참전했다.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자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우랄 기관총 연대'의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일본 밀정 보고서에 의하면 '모든 재러시아 한인의 두목'으로 묘사했다. 거물급 지도자였다. 이후 크라스노야르스크, 치타 등에서 공산당 간부로 활약했다. 1924년을 끝으로 행적이 사라졌다.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국제적인 지식인으로 성장했고, 고종의 특사로 헤이그 외교 무대에서 활약했다. 독립운동에 매진하다 러시아 군인이 되었고 마지막에는 사회주의 혁명에 투신했다. 폭풍과 같은 시대를 정면으로 질주한 사람이었다.

 

리위종의 기념관이나 기념비를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는다. 안타깝다. 아버지 리범진 초대 러시아 공사의 기념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총영사관 1층에 있다. 옛날의 그 공사관을 매입해서 만들려 했지만 불가능해서 청사 내부 공간을 활용해 만들었다고. 리위종은 신념대로 살았다. 그 시절 독립운동가들이 파란만장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냐만, 그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꼭 만나보고 싶다. 사진 출처 : https://www.yna.co.kr/view/AKR20231212003100080

 

 

4. 최운산과 김성녀

 

- 우리 대원들이 입고 먹는 군복과 급양을 모두 책임지고 있는 보급대장입니다. 김성녀 보급대장에게 밉보이면 오늘 저녁도 없습니다. 

 

시원한 이마를 가진 여인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띠며 최운산을 바라보았다. 최운산은 자신과 닮은 눈빛을 지닌 여인을 다시 소개했다.

 

- 저의 아내, 보급대장 김성녀입니다.

 

군무도독부 보급대장 김성녀는 내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 잘 오셨습니다. 장군님.

 

보급대장 김성녀의 몸가짐은 조심스러웠으나 목소리는 아주 또렷했다. 

 

- 그런데, 저 큰 맷돌은 뭐하는 데 쓰는 것입니까?

 

정찰부장 안국환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하긴 지름이 어른 키만큼 큰 맷돌이 나도 궁금했다.

 

- 저녁 드셔야지요. 콩을 갈고 있습니다. 

- 와, 제 평생에 소를 매서 돌리는 맷돌은 처음 봅니다. 

 

안국환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 칠백이나 되는 군사가 먹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요.

 

김성녀는 눈도 깜빡하지 않고 대답했다. (2권 494쪽)

 

봉오동 전투의 주역 최진동, 최운산, 최치흥은 봉오동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자신의 재산으로 봉오동에 한인 마을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했다. 홍범도는 봉오동에서 일본군과 싸우면 주민들의 피해가 너무 커질 것을 우려해 삼툰자에서 싸우자고 했으나 최운산은 봉오동이 싸우기엔 최적지이고, 그래서 봉오동의 희생을 감수하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최진동은 봉오동 전투 이후 꾸준하게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일제에 대항하다 1941년 사망했다. 동생 최운산도 1930년대까지 대전자령 전투 등 여러 전투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을 했다. 1945년 장남 최붕우가 일제에 고문당하고 풀려나자 아들을 만나러 평양에 갔다가 사망했다. 책 말미에 최운산의 서훈에 대한 여러 에피소드가 나온다. 서훈을 빌미로 뇌물을 요구하는 사건, 우여곡절 끝에 가장 낮은 서훈을 받는 과정, 김성녀의 노력 등, 답답한 이야기다.

 

다행히 김성녀 여사의 서훈을 촉구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왜 안되나, 봉오동 전투의 보급 대장인데. 독립운동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탠 사람들에겐 다 주자. 서훈 그게 머시라고. 또한 최운산의 손녀인 최성주씨가 '최운산 장군 기념사업회' 이사 역할을 맡아 할아버지의 행적을 기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2020년에 할아버지의 공적을 다룬 <최운산, 봉오동의 기억>을 출간했다. 

 

책에 나온 그 맷돌이다. 심지어 여러 개가 저렇게 방치되어 있다고. 최운산 장군의 손녀 최성주씨가 봉오동 전투와 그 때 상황을 비교적 상세하게 한겨레 신문에 실은 기사가 있다. 그러면서 김성녀 여사가 독립운동가로 외면당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다. 모든 말씀이 옳고 또 옳다. 언젠가 나도 저런 답사를 갈 수 있겠지. 사진 출처 : https://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638

 

 

5. 황병길과 김숙영

 

- 강건하셨습니까?

 

황병길이 환하게 웃으며 내게 인사했다. 사 년 전 안중근이 하얼빈 작전을 환수한 직후에 훈춘으로 떠난 그였다. 나도 너무나 반가워 손을 마주 내밀었다. 황병길은 허리를 굽히며 내가 내민 손을 두 손으로 마주 잡았다. 나는 그의 왼손 약지를 살폈다. 잘라낸 한 마디가 돋아났을 리 없었다. 황병길은 안중근이 가장 아꼈던 단지동맹의 젊은 맹원이었다. 

 

- 숙경씨는 잘 지내오?

 

내 인사에 이동휘가 먼저 방긋이 웃었다. 이동휘도 숙경씨를 아는 모양이었다. 숙경씨는 황병길의 아내였다.

 

- 네, 숙경씨가 훈춘에 학교를 아홉 개나 열었습니다. 연통라자의 서골, 하다문, 신풍, 마천자, 전선촌.....

- 훈춘에 간 지 몇 년이나 되었다고 벌써 학교를 그렇게 늘렸소?

- 숙경씨 아닙니까. 

- 아내 자랑하는 팔불출은 여전하오. 숙경씨의 황선생. (2권 355쪽)

 

손가락을 자른 이가 12명(남산에 있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이를 모티브로 해서 12개의 기둥 형식으로 지었다)인줄은 알았는데 어떤 다른 이들이 있는지 몰랐다. 동의단지회는 러시아 그라스키노의 자작나무 숲에서 안중근 의사와 김기룡, 백규삼, 황병길을 중심으로 결성된 암살단이다. 단지동맹으로 불린다.

 

이외에 강순기, 조응순, 강창두, 정원주, 박봉석, 유치홍, 김백춘, 김천화가 맹원이다. 이 책에서 변절자로 나오는 엄인섭이 맹원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황병길은 '훈춘의 호랑이'라 불리며 일본군을 상대로 무장투쟁했다. 1920년 3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내 김숙경은 3.1운동 당시 훈춘 지역에서 만세 시위를 조직하고 참가했다. 건국회와 북로군성서도 가담하며 훈춘 지역(두만강 바로 동쪽의 중국땅)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다. 딸 황정신은 훈춘현 연통라자 항일유격대에서 활약했고 1934년 전사했다. 아들 황정해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패장으로 활약하다 1941년 사망했다. 24살이었다. 책에 황병길과 김숙경은 애틋한 부부애를 가진 독립운동 동지로 나온다.  

 

연해주의 연추 마을이라고 우리 민족이 많이 살았던 동네 이름이 나온다. 러시아는 이곳을 크라스키노라 부른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면 두만강 조금 못 와서 있다. 대표적인 항일의병근거지로 알려져 있으며 최재형 선생을 비롯해 이범윤 유인식 안중근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다. 원래 단지동맹을 했던 장소는 연추마을 하리라고 하는데 그곳에는 이미 군부대가 있어서 인근 한국 기업 유니베라 농장 입구에 만들었다. https://www.jungto.org/pomnyun/view/81804 여기를 참조하면 답사 기행문이 있다. 황병길과 김숙경의 기념비 같은 것은 안타깝게도 인터넷에 나와 있지 않았다. 사진 출처 : https://www.impeter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47219

 

 

연해주는 말 그대로 바다와 면해 있는 지방이다. 두만강 동쪽의 동해와 닿아 있는 러시아 땅을 이렇게 부른다. 러시아 말로는 프리모리예라고 부르며 주요 도시는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나홋카 등이 있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이 곳에서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 많다. 하지만 지금 제대로 조명받고 있는 분들은 몇 안된다.

 

만주에서 활약한 분들이 중국 공산당과 관계를 맺은 것과 마찬가지로 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을 위해 소비에트와 타협했고, 대다수는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게다가 러시아에 우호적인 독립운동가들은 스탈린 정부에서 대부분 일본의 간첩이란 누명을 썼거나 그럴 가능성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육군 사관학교에 있는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철거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국방부가 말한 철거 사유는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고, 자유시 참변과 관련이 있고 했다. 육사는 공산 세력과 싸울 간부를 양성하는 곳이며, 그렇기에 공산주의 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의 흉상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공부 좀 하고 책 좀 읽어라 이놈들아. 홍범도 장군도 이럴진대, 하물며 다른 독립운동가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연해주에서 직간접적으로 의병 활동을 했던 한국인이 10만 명을 넘고 일본군과도 1700여 회의 전투를 벌였다. 책에 나온 여러 인물들 이외에도 이종호, 이동녕, 신채호, 장도빈, 김경천, 김유천, 한창걸 등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이 우리 근대사에 오래 간직해야 할 업적을 연해주에서 남겼다. 이 분들의 놀라운 활약에 비해 단지 사회주의 혹은 무정부주의자라는 이유로 우리에게 알려진 바는 턱없이 적다. 그래서 이 책이 더 고맙다.

 

 

중국 길림성 도문(지린성 투먼)에 있는 봉오동 전투 기념비. 사진 출처 :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aver?volumeNo=23086533&memberNo=205857

 

 

작가는 신흥무관학교 100주년 기념으로 서간도와 북간도 일대를 답사하면서,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던 사람들의 흔적을 여태 무시하고 덮어버린 우리 역사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면서 이때부터 <범도>를 쓰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소설로 된 '항일무장투쟁사 교과서'를 만들고 싶었다고.

 

그래서 작가의 의도는 완전히 성공했다. 나는 간도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사를 읽었다. 포수들을 모은 부대인 항일연합포연대를 조직하면서 시작한 그의 항일 일대기를 읽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동자로, 시베리아 광산에서 광부로 일한 홍범도 장군의 고단한 삶을 읽었다. 우라나라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시대에, 가장 가혹한 현실에서 가장 힘든 싸움을 했던 한 인간을 읽었다.

 

2권 중간 쯤에 밀산농장에서 황아바이와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농사를 짓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평안했던 부분이다. 긴장해서 읽던 나도 여기서 한숨 놓았다. 홍범도 장군이 이제 그만 총을 내려 놓고 그냥 여기서 농사만 짓고 지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해질 정도였다. 

 

 

 

 

위에 책에 나오는 독립운동가들 몇 분을 적었다. 오직 독립을 바라보며 저항했던 그 분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숭고한가. 그런 분들이 역사에 사라져 이름없이 시베리아의 동토에 묻혀 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억하는 일이다. 그 분들의 스토리를 끄집어 내어 기념할 것을 만들고 크게는 기념관, 작게는 기념비라도 만들어 기억할 거리를 만드는 것이 후세의 우리들이 할 일이다. 

 

하바롭스크에 있는 김알렉산드라 명패, 우수리스크의 최재형 기념관, 크라스키노의 단지동맹 기념비, 지린성 투먼에 있는 봉오동 전투 기념비, 흑룡강성 밀산에 있는 십리와항일투쟁유적지기념비, 이 모두를 가봐야 할 곳 목록에 올린다. 가서 보면 오래 기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