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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

나를 이루고 있는 세상에 대하여 : 황정은 <연년세세>

by Keaton Kim 2021. 7. 4.

 

바쁘다. 바쁘게 하루의 쳇바퀴가 돈다. 학교 수업, 과외 수업, 이틀 걸러 도자기도 구워야 되고, 의무적으로 읽어야 하는 책도 많다. 세금계산서, 견적서, 남품서 등 서류도 많고. 그렇게 바쁘게 돌아간다. 바쁘게 돌아간다는 핑계로 나를 이루는 세상에 대해 심드렁하다.

 

어머니는 진주의 상류층에서 스물 다섯에 시골 대가족에 시집을 와서 굴곡의 시간을 보내고 그 상처로 지금 치매를 얻었다.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간다. 자존심은 또 강해서 병원에는 결코 가지 않으시려고 한다. 어머니의 인생이 이렇게 마감하나 싶으면 그저 안스럽다. 그럼에도 자주 찾아보지 못한다. 바쁘다고.

 

동생이 암에 걸렸다. 수술과 항암치료를 병행했다. 머리는 빡빡 밀었다. 피부가 갈라지고 야위어 갔다.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 동생은 괜찮다며 웃었다. 병이 실체를 드러낸 동생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지금은 많이 호전되었다. 어제도 동생이 다녀갔다. 나는 그런 동생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다. 바쁘다고.

 

아내과 각방을 쓴지 1년이 되었다. 처음엔 일시적인 일이려니 했다. 하지만 방을 따로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대화도 점점 줄어들었다. 불필요한 대화는 모두 없어졌고 필요한 대화도 없어졌다. 둑에 금이 가면 서로가 의논해서 고치고 막고 했는데 이제는 그 둑이 아예 무너져버렸다. 그래서 이제는 남보다 더 못한 사이가 되어 가고 있다. 뭐가 문제인지 서로가 잘 알고 있는데도 애써 못 본 척하고 무시한다. 바쁘다고.

 

친구들은 거의 만나지 않는다. 어쩌다 만나서 으례 주고 받는 말을 하고 의례적인 인사를 한다. 지인들과 모임도 꼭 참석해야 되는 모임이 아니면 거의 안간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딱 업무적인 일만 하고 끝낸다. 바쁘다고.

 

 

 

 

미아 한센뢰베는 <다가오는 것들>에서 로맨스와 화해에 관한 기대를, 그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적절하게 실망시키는데, 그게 정말 좋다고 하미영은 말했다.

 

하미영이 옳다고 한세진을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삶은 지나간다. 바쁘게. 나탈리는 바쁘게. 울고 실망하고 환멸하고 분노하면서, 다시 말해 사랑하면서. (p.182)

 

마지막 장을 덮고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글이 남긴 여운이 쉬 가시지 않는다. 투명한 칼날이 몸을 한 번 스윽 하고 베고 간 느낌이다. 그 여운은 나를 이루고 있는 세상 중에서 필요하지 않는 것, 삶이 아닌 것을 툭 하고 건드리고 갔다.

 

책은 이순일과 한영진과 한세진, 그들을 이루고 있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이순일을 이루고 있는 세상과 한영진을 이루고 있는 세상, 한세진을 이루고 있는 세상은 전혀 다르다. 다르지만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영진을 이루고 있는 세상을 조금 바꾸면 그 영향은 순일과 세진 모두에게 미친다. 순일, 영진, 세진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하고 싶은 말을 끝내 참고 그저 깊은 눈으로만 표현한다.

 

나를 이루는 세상을 둘러본다. 지금 나는 동굴 속에서 웅크리고 지내서 나를 이루는 세상은 한 눈에 다 볼 수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이 나를 이루는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나를 이루는 세상은 동굴 저 너머 다른 여러 세상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내가 조금만 뒤척거리면 관계가 변한다.

 

그런데 나는 동굴 속에서 바라보는 나의 세계에서만 산다. 나와 밀접하게 관계된, 나에게도 영향을 주고, 내 주위에도 영향을 주는 진짜 세계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 그 세계에서 내가 부대끼고 웃고 울고 지지고 볶고 주고 받고 서로 나누고 해야 나를 이루는 세상이 변한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저 동굴 속에서만 산다. 웅크리고 지내든, 부딪히며 지내든 삶은 지나간다. 책에 나오는 순일과 영진, 세진을 보면서 나도 나를 이루고 있는 세상을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리고 로맨스와 화해에 관한 기대를 적당히 실망시키는 <다가오는 것들>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