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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

태어나보니 안중근의 아들이라면.... : 김훈 <하얼빈>

by Keaton Kim 2024. 9. 24.

 

김아려 (1878~1946)

 

아려, 이름이 참 예쁘다. 1894년 안중근과 결혼해서 딸 현생과 아들 분도, 준생을 두었다. 거사 직전 아들들을 데리고 하얼빈으로 갔고, 도착하자마자 남편이 이토를 죽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일제에 잡혀 갇히게 되고, 곡절 끝에 풀려나 도주하여 러시아 꼬르지포 인근 조선인 마을 목릉 팔면통에 정착했다. 1910년에 남편이 처형당하고, 그 이듬해인 1911년에 큰아들 분도가 일곱 살로 죽었다. 1919년 임시정부가 상해에 들어서자 상해로 이주했다. 중일 전쟁 이후에 계속 중국에 남아 있었고,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상해에서 죽었다.

 

김아려의 심정을 듣고 싶었으나 불가능했다. 김아려의 고통과 슬픔에 대한 어떤 기억이나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고 김훈 선생은 책에서 말했다. 

 

 

안현생 (1902~1960)

 

안중근의 장녀이자 분도와 준생의 누나이다. 안중근은 의거 직전에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연해주에 살림을 장만해놓았으니 그리로 오라고 편지를 보냈고, 김아려와 분도, 준생은 연해주로 떠났으나 안현생은 할머니 조마이라 여사와 함께 남았다. (가족 모두 떠나면 할머니가 너무 쓸쓸할 것 같아 남았다는 이야기를 직접 현생이 썼다. 참고 자료 : 딴지일보 https://www.danji12.com/626) 1914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가족들에게 합류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 출신 황일청과 결혼하여 1928년 딸 황은주를 낳았다. 1941년에 남편과 함께 서울에 와서 박문사를 찾아 이토를 분향하며 "사죄한다"고 했다.

 

1945년 12월 남편인 황일청이 장수성 쉬저우에서 광복군 출신 인사의 총에 사망했다. 1946년 서울로 귀국했다. 허위 장군 후손의 도움을 받아 효성여대(현 대구카톨릭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1959년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1960년에 사망했다. 

 

딸 황은주는 이화여대 음대를 나왔고 군인 남편을 만나 네 명을 자식을 뒀다. 1970년대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하지만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1980년 중반 홀로 한국에 돌아왔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활을 이어갔고 다시 미국으로 왔다 갔다를 반복했고 2015년 영구 귀국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안중근 의사의 직계 후손이지만, 외손이라는 이유로 직접적인 혜택을 받지 못했다. 2021년 사망했다. (글 참고 자료 : 오마이뉴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795709)

 

 

안분도 (1905~1911)

 

안중근의 유서에서 장남 분도가 자라면 천주교 신부가 되게 해 달라고 당부했다. 안중근의 거사 후에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서 중국 흑룡강성으로 이주했다. 분도는 흑룡강성에서 일곱 살에 죽었다. 할머니 조마리아는 분도가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스스로 즐거워하도록 키우라고 아려에게 일렀다고 한다. 그래서 김아려는 겨울에도 대청마루에서 놀게 하고, 여름에는 벗겨서 길렀다는 이야기가 책에 나온다. 

 

 

안준생 (1907~1952)

 

안중근 일가는 임시정부의 지원으로 상해에 정착했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났으며 준생 일가는 남겨졌고, 일제가 찾아내 감시하에 살았다. 일제의 탄압으로 일을 할 수도 자유롭게 다닐 수도 없었다. 미나미 총독이 그에게 접근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에게 사과하면 제대로 살게 해주겠다고 제의했고, 준생은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결국 1939년에 박문사에서 히로부미의 차남 이토 분기치를 만나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사죄한다는 퍼포먼스를 했다. 총독부가 철저하게 기획한 이벤트에서 꼭두각시 역할을 충실하게 했다. 김구는 이 '박문사 화해극'에 크게 분노하여 중국측에 준생의 처벌을 요청했다. 광복 이후 돌아와서 숨어 살다가 한국 전쟁 와중에 폐결핵으로 죽었다. (이 사건에서 준생의 심정을 잘 표현한 글이 있다. 읽어보면 좋을 듯 하다. 글 참고 : 딴지일보 https://www.ddanzi.com/ddanziNews/599846871)

 

안준생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외아들 안웅호는 안준생 사후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교 졸업 후 의사가 되었다. 딸은 안선호와 안연호인데 모두 미국에서 살았다. 안웅호는 중국계 미국인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안도용이며 딸은 안리사와 안캐런이다. 안웅호는 심장전문의로 활동하였고, 이혼하고 퇴직 후 혼자 살다가 2013년에 사망했다.

 

안중근 의사의 증손이 되는 안도용(61세)은 미혼이며 안중근 관련 일이 있을 때면 한국에 온다. (10년 전 중국 하얼빈에 안중근의사기념관이 만들어졌다. 중국 정부가 이웃나라 독립운동가를 추모해서 만들었다. 안중근 의사의 위상이 이 정도다. 하얼빈에 가면 들를 곳이 생겼다. 이 때 안도용씨가 참석했다. 참고 자료 : https://news.mt.co.kr/mtview.php?no=2014051611108245012)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과 이토 히로부미의 차남 이토 분기치. 이 사진 한 컷의 힘은 대단하다. 어떤 설명보다 더 극적이다. 역사는.... 진짜 잔인하다. 꼭 그랬어야만 했나. 사진 출처 : 딴지일보

 

 

자라서 보니 아버지가 안중근이었다. 심지어 일제의 통치는 더욱 견고해지는 시대에. 이미 일본의 총과 칼이 내 목 바로 아래를 겨누고 있으며 시시각각 감시의 눈이 주변을 에워싸고 있다. 집요한 회유와 공작이 계속 된다. 그럼 난 어찌해야 되나. 아, 쓰벌.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한다. 

 

안중근의 후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라치면, 가장 극적인 사건이 안준생의 '박문사 화해극'이다. 어쩔 수 없이 그랬다 쳐도 그 사건이 당시 백성들에게 미친 영향은 작다고 하지 못했을 거다. 이 사건에 대해서 딴지일보의 펜더(위 안준생의 참고 글을 쓴 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할 만큼 했다." 이 한 마디에 격하게 공감한다. 태어나보니 아버지가 안중근인데,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아버지가 위대한 독립운동가라고 해서 아들에게도 그걸 강요할 수는 없다. 준생이 가족들을 모두 미국으로 보낸 이유도 너무나 당연했다. 영웅의 자식이든 배반자의 자식이든 그 짐을 자식들이 안고 살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  

 

안중근의 집안은 통째로 독립운동가 집안이었다. 그의 형제인 공근과 정근 뿐만 아니라 사촌에 팔촌까지. 그런데 막상 그 후손 대부분은 외국에 살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 대부분이 그렇다. 남아 있는 후손들 중 절반 이상이 직업이 없고 가난을 대물림하며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참고 자료 : https://greatkorean.org/35/?q=YToyOntzOjEyOiJrZXl3b3JkX3R5cGUiO3M6MzoiYWxsIjtzOjQ6InBhZ2UiO2k6MjM7fQ%3D%3D&bmode=view&idx=9631603&t=board)

 

안중근은 1909년 이토를 쏘고 1910년 처형당했다. 당시 나이 서른 하나. 아내가 있었고 아이가 셋 있었다. 남편이자 아버지였고, 30대의 한 청춘이었다. 그게 아팠다.

 

 

 

 

이토는 조선 사대부들의 자결이 아닌 무지렁이 백성들의 저항에 경악했다. 왕권이 이미 무너지고 사대부들이 국권을 넘겼는데도, 조선의 면면촌촌에서 백성들은 일어서고 또 일어섰다. (18쪽)

 

낮에, 번화가에서 양구이로 점심을 먹고 나서 안중근이 말했다.

- 옷을 사러 가자

- 옷이라니?

- 지금 입은 옷은 추레하다.

- 돈이 모자랄텐데.

- 넌 돈 걱정을 하지 마라.

- 왜 갑자기 옷이냐?

- 쏘러 갈 때 입자.

우덕순이 웃었다. 우덕순의 웃음을 보면서 안중근이 웃었다. (140쪽)

 

- 어디를 겨누었는가?

- 심장을 겨누었다.

- 거리는?

- 십 보 정도였다.

- 이토 공의 수행원에게도 쏘았는가?

- 누가 이토인지 몰랐기 때문에 이토의 오른쪽으로도 쏘았고 그 다음에 왼쪽으로 쏘았다.

- 성공하면 자살할 생각이었는가?

- 아니다.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위해서는 단지 이토를 죽인 것만으로는 죽을 수 없다.

- 그런 원대한 계획이었다면 범행 후 체포당하지 않으려 했을 텐데, 도주할 계획을 세웠는가?

- 아니다. 나쁜 일을 한 것이 아니므로 도주할 생각은 없었다. (233쪽)

 

 

안중근의 빛나는 청춘을 소설로 써보려는 것은 내 고단한 청춘의 소망이었다. 나는 밥벌이를 하는 틈틈이 자료와 기록들을 찾아보았고, 이토 히로부미의 생애의 족적을 찾아서 일본의 여러 곳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 원고를 시작도 하지 못한 채 늙었다. 나는 안중근의 짧은 생애가 뿜어내는 에너지를 감당하지 못했고, 그 일을 잊어버리려고 애쓰면서 세월을 보냈다. 변명을 하자면, 게으름을 부린 것이 아니라 엄두가 나지 않아서 뭉개고 있었다.

 

2021년에 나는 몸이 아팠고, 2022년 봄에 회복되었다. 몸을 추스리고 나서, 나는 여생의 시간을 생각했다. 더 이상 미루어 둘 수가 없다는 절박함이 벼락처럼 나를 때렸다. 나는 바로 시작했다.

 

나는 안중근의 '대의'보다도, 실탄 일곱 발과 여비 백 루블을 지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그의 가난한 청춘과 그의 살아 있는 몸에 관하여 말하려 했다. 그의 몸은 대의와 가난을 합쳐서 적의 정면으로 향했던 것인데, 그의 대의는 후세의 필생筆生이 힘주어 말하지 않더라도 그가 몸과 총과 입으로 이미 다 말했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305쪽,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은 먹먹했다. 후손들의 삶을 공부하고 나니 더 먹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