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기계에 끼어 숨진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를 비롯한 열두 사건을 드러내어 우리의 민낯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우리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사건들입니다.
1. 살고 싶다는데도 별수 없다.
- 성 소수자는 여기에 있다, 故 변희수
2. 심장이 찢어져도 별수 없다.
- 말이 칼이 될 때, 故 최진리
3. 맞아도 별수 없다.
- 때려주는 선생이 진짜라는 이들에게, 故 최숙현
4. 떨어져도, 끼여도, 깔려도 별수 없다.
- 너는 나다, 故 김용균
5. 일가족이 죽어도 별수 없다.
- 가난이 죄책감이 되지 않기를, 故 성북 네 모녀
6. 국가를 믿어도 별수 없다.
- 내 몸이 증거다. 故 가습기 사망자 OOOO명
7. 우리는 더 날카로워질 것이다.
-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8. 우리는 또 둔감해질 것이다.
- 관대한 판결을 먹고 자랐다, n번방 사건
9. 우리는 계속 수군댈 것이다.
- 나는 출산의 도구가 아니다, 낙태죄 폐지
10. 우리는 끝없이 먹먹할 것이다.
- 기억과 책임 그리고 약속, 세월호 참사
11. 우리는 언제나 잊는다.
- 망각에 맞서는 기억의 투쟁, 박근혜 대통령 탄핵
12. 우리는 역시나 순진하게 믿는다.
- 공정하다는 착각, 조국 사태
85p
(김용균씨의) 업무는 석탄을 운송하는 컨베이어 벨트에 석탄 가루가 끼여 있는지를 확인하고 조치가 필요한지 아닌지 발전소에 알리는 일이었다. 근무 환경은 열악했다. 상태를 보고하는 순찰 임무만을 해야 했지만, 그는 삽을 들고 석탄 가루를 제거했다. 입사 3개월 차인 비정규직 근로자라면 그 일이 누구 업무인지 따질 수 없었을 것이다. 좀 치워 달라는 부탁, 그것도 원청의 부탁을 하청업체의 어린 직원이 싫다면서 대꾸하긴 불가능하다. 아마 수차례 "이런 상황인데 제가 치우겠습니다." 라고 보고하면서 사회생활 잘한다고 칭찬도 받았을 거다.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으로 평가받으면서 점점 위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졌을 거다.
그렇습니다. 항상 이런 식입니다. 사고는 가장 성실하고 책임감 강한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이 사람들은 못 본 체를 못합니다. 그냥 놔두었으면 될 일이었는데. 김용균씨의 사고가 더 안타까운 이유입니다.
오찬호 작가는 알릴레오 북스에서 처음 봤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날카롭게 말하면서도 재치가 넘쳤고 인간미가 있었습니다. 또한 알기 쉽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열 몇 권의 저저가 있는 작가였습니다. 사회학자이니 만큼 빛이 잘 가지 않는 우리나라 사회의 구석구석을 살피고 문제를 제기합니다.
266p
첫 책이 나온 지가 8년이 지났다. 열세 번째 단독 저서이지만 글을 쓴다는 건 매번 힘들다. 쓰기 자체의 고충도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쓰기의 의미'가 나를 괴롭힌다. 비판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글이 무슨 효과가 있을까 하는 번뇌가 매번 나를 주저앉게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씩씩해지라는 독자들의 격려를 받았다. 새벽부터 일하는 게 너무 힘들어 SNS에 주절주절 푸념을 늘어놓으니 '당신의 밥벌이가 누군가에게는 사회 변화의 희망'이라며 내가 찾지 못한 글쓰기의 힘을 말해 주는 이가 있었기에 또 끝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의 민낯에 익숙해지지 말자고 다짐한다. 안 그래도 사회가 엉망인데, 굳이 무거운 이야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스산하게 만들 필요가 있냐고 속삭이는 내 마음 속 어딘가의 흐트러짐을 다잡는다. 지금 여기의 모습은, 우리의 결과다. 다시 우리가 원인이 되어야, 사회는 변한다.
읽기만 불편한 줄 알았더니, 쓰기 역시 불편했다는 작가의 고백이 솔직하고 따뜻합니다. 독자가 불편한 글을 억지로 읽는 이유와, 작가가 힘을 다해 쓰는 이유를 명확하게 적었습니다. 이런 일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기억을 해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된다고, 그래서 뭐라도 하자고 말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야 줄어듭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은 우리의 결과라는 말이 슬프지만 정곡을 찌릅니다.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당신의 책을 열심히 읽고 기억하고 말하겠습니다. 힘내라고 팬레터는 못보내지만, 그래도 여기에 이렇게 적습니다. 저도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서요.
덧붙이는 글
예전에 아파트 공사현장 책임자로 일할 때였다. 어느 날 오후 "사람이 떨어졌어요." 하고 무전이 날라왔다. 급하게 현장으로 가니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119를 부르라고 지시하고 추락한 사람에게 다가가 이름을 물었다. 다행히 의식은 있었고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5층에서 떨어졌다는데 천만다행이었다. 떨어진 사람은 골절상과 타박상을 입었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었다. 노동부에서 점검을 나왔으나 안전 시설물에 대한 법적인 하자는 없었고 처벌 또한 없었다. 나는 회사의 사장에게서 경고장을 받았다.
공사현장에서의 사고는, 책에서 설명한 것처럼 '사업주의 안전관리 미흡'으로 간단하게 치부하는 것은 정확한 해석이 아니다. 적어도 1군 건설사에는 안전관리를 소홀히 한다거나 안전관리비를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일은 없다. 법적 기준은 만족하나 부적절한 안전 시설물, 작업자의 안전불감증, 안전 매뉴얼대로 다 하면 돈을 벌지 못하는 구조 등의 복합적인 문제다.
하지만 이를 근절하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떤 사고든 사고의 책임을 모두 원청에 물으면 된다. 법적 책임을 다했든 그러지 않았든 원청에서 책임을 지게 하면 원청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사고를 막을 거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사고가 나도 법적 기준을 충족하면 아무런 벌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중대재해처벌법은 꼭 필요하다. 이 법은 사고가 났을 때 사업주나 경영책임자를 처벌하는 법이다. 2022년부터 50명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시행되었고, 2024년부터는 5인 이상 사업장에도 적용되었다. 이 법은 더 강화해도 괜찮다. 5인 이상이 아니라 모든 사업장에 적용되어야 한다.
더디지만 조금씩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결과도 그것을 보여준다. 산재사망율은 근로자 1만명당 2003년 2.55명, 2010년1.36명, 2024년 0.98명으로 점점 줄어들고 있다. 더 줄일 수 있다. 김용균씨의 죽음을 기억하고 말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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