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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

74년생 최영주에게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by 개락당 대표 2017. 5. 25.

 

 

 

74년생 최영주에게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아내에게

 

 

 

며칠전에 한 권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소설이라면, 좀 특별한 주인공이 겪는 좀 더 특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일반적일텐데, 이 소설은 조금 이상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82년에 태어나 초등학교, 중학교를 나오고, 적성에 맞게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취업의 어려움을 약간 겪다 회사원이 되고, 그러다 결혼을 하고 예쁜 딸아이를 낳고 주부가 되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여성이야기입니다.

 

 

 

이 평범한 여자의 이름은 김지영입니다. 평범한 여성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인데, 이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김지영 씨가 우리나라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게 이토록 만만치 않은 일인줄은..... 근데 이 김지영 씨 이야기가 자꾸 내 머리 깊은 곳에 있는, 웬만하면 잘 끄집어 내지 않는 기억을 자꾸 불러옵니다.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그런 기억들을 말이죠.

 

 

 

벌집 같은 기숙사와 열악한 공장에서 열 몇시간을 눈 빠지게 일해서 모은 돈을 오빠와 남동생 학비로 보탠 김지영 씨의 어머니를 보면서, 수십 마지기 농사일 밖에 없는 허울 뿐인 장손한테 시집 온 우리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갓 지은 밥은 아버지, 김지영 씨 남동생, 할머니 순으로 퍼 담고, 간식이 두개면 김지영 씨 남동생이 한개를 먹고 나머지를 김지영 씨와 그녀의 언니가 먹는 장면을 보면서 어릴 때의 누나와 여동생, 그리고 할머니가 생각이 났습니다.

 

 

 

나중에 당신이 시집와서 우리 아버지가 태어나고 내가 태어난 오래된 집에서, 그 할머니를 모시고 1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살았지요. 겨울이면 안채에서 멀리 떨어진 화장실에 가는 것이 무서워 함께 가자고 졸랐던, 여름이면 밤에 살짝 나와 모기를 쫓으며 우물가에서 목욕을 하던 당신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굳이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이국땅에서 아이를 낳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모습도, 남산만한 배를 가지고 도쿄 신밤바 밤거리를 씩씩하게 걷던 모습도, 살이 너무 많이 쪘다고 일반 병원에서는 안되겠다고 해서 대학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울던 당신 모습이 거의 십여년만에 소환되어 가슴이 찌릿하기도 했습니다.

 

 

 

세째를 낳고 며칠이 되지 않아 주말 부부가 되고, 주말부부도 성에 안차 4개월에 한 번씩 만나는 견우와 직녀가 되었어도 당신은 아이 셋을 잘 키워 내었습니다. 아빠가 꼭 있어야 되는 장면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텐데 꿋꿋하게 잘 살아주었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없어서 더 나은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떼를 부려보기도 했습니다.

 

 

 

"아이고, 점심 묵은 지 한참 됐는데 공주는 와 안오노?" 손녀 오는 것을 목 빠지게 기다리면서 손자 며느리는 보내 줄 생각이 전혀 없으시던 명절의 살아 생전 할머니 모습을 떠올리고, 지금도 잘난 남편이 여동생을 꼭 보고 가야 된다고 해서 올케가 오고 가족들이 다 모여 이야기를 나눌만큼 나눈 후에야 친정에 갈 수 있는 당신이었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김지영 씨도 그랬는데 말이죠.

 

 

 

 

 

 

책에 나오는 82년생 김지영은 현재를 사는 보편적인 여성이라고 합니다. 72년생 집안의 장손이며 경상도 남자가 이 보편적인 82년생 김지영을 이해하기는 무리가 따릅니다. 그러나 82년생 김지영을 74년생 최영주로 바꿔 보면 그렇게 이해하기 힘든 것도 아닙니다. 뭔가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입니다.

 

 

 

며칠 전 정의동 노회찬 원내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고 합니다. "82년생 김지영을 안아주십시오" 라는 당부의 메시지와 함께요. 아마도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에서 인생의 굴곡마다 있는 뿌리 깊은 성차별을 겪어야만 하는 수많은 여성을 보듬어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 소설은 내 주위의 많은 '82년생 김지영'을 돌아보게 하고, '74년생 최영주'에게 감사와 반성과 분발의 편지를 쓰게 했습니다. 여태까지 나와 사이좋게 잘 살아주어서 고맙고, 집안 일은 내가 해 주는 게 아니라 마땅히 할 것이며, 특히 주말 아침은 미리 딱 차려 놓아 당신이 일어나자마자 밥숫갈 뜰 수 있도록 하며, 당신이 그리고 우리 딸이 여자이기에 혹시나 억울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고 있지 않은지 눈을 크게 뜨고 보겠습니다.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남자들에게도 이 책을 읽도록 권할께요.

 

 

 

74년생 최영주와 82년생 김지영, 그리고 10년 후 '92년생 김지영'이 세대가 달라져서 더 나은 세상에 살 수 있을까요? 그것은 나의 손에, 우리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딸 '03년생 김들'이 사는 세상은 적어도 '82년생 김지영'의 세상과는 달라지길 희망합니다. 그렇게 될 겁니다.